해양 구조·재난 스릴러 36화

수심 43미터의 종

압력 여섯 바퀴

물은 사람의 기대 같은 건 모르고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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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사람의 기대 같은 건 모르고 흘렀다.

투명한 관을 채운 푸른 액체가 표식을 지나자 박은서가 손을 들었다. 펌프 소리가 낮아졌다. 강해솔은 작업대 모서리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모형의 왼쪽이 기울어 있었다. 정우찬이 새벽부터 예측한 쪽과 반대였다.

누군가 종이에 그어 둔 붉은 화살표가 민망하게 보였다.

“오늘 첫 번째 결과는 실패네요.”

은서는 그렇게 말하고 장갑을 벗었다. 관찰석에 앉은 선사 대리인이 바로 노트북을 열었다.

“모형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까?”

“우리가 넣은 조건 중에 틀린 것이 있다는 뜻이죠.”

“어제는 여섯 단계의 압력 변화가 선체 기울기에 영향을 줬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영향이 있었는지 시험하겠다고 했습니다.”

대리인은 대답 대신 문장을 입력했다. 손가락이 빨랐다. 해솔은 화면을 볼 수 없었지만 그 사람이 무슨 제목을 붙일지는 알 것 같았다. 조사팀 가설, 재현 실패.

우찬은 그쪽으로 가지 않았다. 작업대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물받이를 살폈다. 넥타이가 바닥에 닿으려 하자 해솔이 손가락으로 집어 올렸다.

“이것부터 좀 빼요.”

그는 뒤늦게 목을 만졌다. 밤에 잠깐 다녀온 기관 회의의 흔적을 여태 달고 있었다.

“왼쪽 칸에 남아 있던 양을 못 뺐습니다.”

모형 제작자가 얼굴을 굳혔다. 우찬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제가 초기 조건 확인표를 넘겼어요. 제 항목입니다.”

대리인의 타자가 잠깐 멎었다. 틀린 사람이 숨어 주지 않으면 공격할 문장을 고르는 데 시간이 더 걸리는 모양이었다.

해솔은 붉은 화살표 옆에 작은 숫자 하나를 적었다. 첫 번째 시도. 실패를 지우지 않은 종이가 새 기록판에 올라갔다.

창고를 빌린 시험장에는 바다 냄새가 없었다. 세제와 고무와 식은 커피 냄새가 났다. 바닷속에서 본 밸브와 같은 규격의 부품은 유난히 깨끗했다. 해솔은 그 표면이 싫었다. 청람호의 것은 그을음처럼 내려앉은 침전물과 조개껍데기 사이에 있었다. 사람들은 깨끗한 물건으로 더러운 날을 되풀이할 수 있다고 믿고 싶어 했다.

은서가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너무 다르죠?”

“소리부터요.”

“같게 만들 수 없는 것은 같이 적어 둘 거예요.”

작업대 옆 판에는 세 줄이 있었다. 알고 있는 것. 범위를 가진 것. 아직 모르는 것. 마지막 줄이 가장 길었다.

시험에 쓰는 액체는 청람호의 폐액이 아니었다. 같은 관 지름을 맞춰 놓아도 온도와 점도가 바뀌면 흐름이 달라졌다. 은서는 그 차이를 지워 버리는 대신 느린 경우부터 빠른 경우까지 조건을 나눴다. 한 번 잘 나온 영상을 골라 내놓겠다는 방식이 아니었다.

해솔이 가져온 것은 밸브 축 높이를 비교한 사진과 여섯 단계의 위치 그림이었다. 여섯 바퀴 풀린 높이와 여섯 번에 나뉜 움직임은 같은 말이 아니었다. 레버의 헛도는 구간까지 그림 옆에 따로 표시돼 있었다.

그는 수중에서 장갑 낀 손을 뻗었다가 거둔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 한 번 돌려 봤다면 지금 이 그림에는 자신이 만든 일곱 번째 변수가 끼었을 것이다.

다시 물을 채우는 동안 미례가 들어왔다. 보온가방을 든 손보다 빈손이 더 붉었다. 버스에서 손잡이를 오래 잡고 왔다고 했다.

“점심 먹고 시작한 줄 알았더니.”

그녀가 꺼낸 주먹밥은 벌써 딱딱해져 있었다. 우찬이 받으려 하자 미례는 먼저 책상 위 사진을 뒤집었다. 선체 단면이 사라지고 종이의 흰 뒷면이 드러났다.

“먹을 때는 배를 좀 엎어 놔요.”

누구도 웃지 않았지만 모두 잠깐 앉았다.

미례는 실험을 구경하러 온 게 아니었다. 가족 모임에서 질문을 받아 왔다. 오늘 나온 결과로 수색 구역을 바꾸느냐. 선사와 협의 중인 비용이 다시 밀리느냐. 문재필이 내일 사람들 앞에 나오느냐.

“재필 씨 공개 일정은 잡힌 게 없습니다.”

해솔이 마지막 질문부터 답했다. 미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그래도 누가 하루에 한 번씩 묻네. 그 사람은 언제 나오느냐고.”

그 말 뒤에 붙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해솔은 물어보지 않았다. 살아남은 사람이든, 바다에 있는 사람이든, 가족들은 기다리는 법을 강요받고 있었다.

두 번째 시험은 제대로 출발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액체가 관의 굴곡을 돌았고, 바늘이 조금 움직였으며, 모형의 옆구리에 붙은 눈금이 반 칸 내려갔다. 뒤에서 누군가 기침했다. 해솔은 작은 기울어짐이 얼마나 쉽게 사람의 시선을 속이는지 알고 있었다. 바닥이 움직일 때 사람은 먼저 자신의 발을 의심했다.

세 번째 단계에서 모형 안의 액체가 다른 칸으로 넘어갔다.

미례가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우찬은 말없이 손을 펴 보였다. 가까이 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위험해서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그림자가 눈금을 가렸다.

미례가 한 발 물러났다.

마지막 단계 뒤, 작은 문을 대신한 표시등이 꺼졌다. 실제 청람호의 문이 그 순간 닫혔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 조건에서 통행을 유지하기 어려워지는 한계를 넘었다는 표식이었다.

기록 담당자가 시간을 읽었다.

은서는 바로 다음 조건을 지시했다. 누구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해솔은 사람들이 재현에 성공했을 때 기뻐하는 장면을 상상했다가 입 안이 썼다. 잘될수록 나쁜 날이 더 선명해지는 일이었다.

오후가 되어 세 묶음의 시험이 끝났다. 가장 느리게 움직이도록 잡은 조건에서도 기울기는 같은 방향으로 커졌다. 다만 도달 시간은 달랐다. 우찬은 대표값 하나로 줄이려던 표를 다시 세 칸으로 벌렸다.

선사 대리인의 전화가 울렸다. 그는 번호를 보고 문밖으로 나갔다가, 잠시 뒤 영상 통화를 켜서 돌아왔다. 작은 화면 안에서 류경문이 넓은 책상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수조에 배를 띄워 놓고 실제 바다에서의 일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은서가 카메라 앞에 섰다.

“그래서 모형 시험이라고 적었습니다.”

“사고 당시 폐액의 정확한 상태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짧은 대답이 오히려 류경문을 멈추게 했다.

“그런데 우리 회사를 향한 발표를 준비하고 있어요?”

“당신 회사 이름을 넣기 전에 조건표부터 공개할 겁니다. 그중 어떤 값이 다르다고 보는지 자료를 주십시오.”

류경문은 대답하지 않았다. 화면 밖에서 누군가 종이를 내밀었다. 그가 그것을 읽는 동안 해솔은 통화창 너머의 방을 보았다. 창가에 물 한 방울 없는 유리 화병이 있었다. 여기서는 하루 종일 물을 닦았는데, 그 방에서는 아무것도 젖지 않았다.

“배를 지휘한 사람들의 행동도 같이 시험하십시오.”

통화가 끊겼다.

대리인은 노트북을 닫지 않았다. 이제 타자를 치는 대신 화면을 보고만 있었다.

해 질 무렵 우찬이 미례에게 결과표를 건넸다. 가장 보수적으로 잡은 시험 조건에서, 문제가 된 이동이 없을 때보다 한계에 도달하는 시점이 약 칠 분 빨라졌다.

미례의 엄지가 숫자를 덮었다.

“칠 분.”

그녀는 종이를 다시 내려다봤다.

“어시장 앞에서 여기까지 걸으면 그쯤 걸려요.”

해솔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사람 하나 내려오고도 남는 시간인데.”

우찬이 의자를 가까이 끌었다. 칠 분이 실제 사고에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어졌을 시간은 아니라고 설명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미례는 이미 표 아래의 작은 글씨를 읽고 있었다. 조건에 따른 비교. 실제 탈출 가능 시간과 다름.

“알아요. 여기 써 있네.”

그녀가 먼저 말했다.

“내가 못 읽어서 하는 말이 아니에요.”

우찬은 고개를 숙였다. 해솔은 미례가 가져온 빈 보온가방을 접어 주었다. 손잡이가 꼬여 잘 들어가지 않았다. 미례가 그의 손에서 가방을 받아 한 번에 넣었다. 그런 작은 일을 잘하는 손이 종이 한 장 앞에서 갈 곳을 잃고 있었다.

미례가 떠난 뒤에도 해솔은 한동안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시험장에서는 배수 소리가 났다. 투명했던 액체가 바닥 관 안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숫자를 안 내놓을 수도 없죠.”

우찬이 말했다.

“내놔야죠. 대신 그걸로 사람 마음까지 계산하지 말아요.”

그는 이번에는 변명하지 않았다.

해솔이 일어나 손을 씻고 돌아왔을 때, 우찬은 사고 당시 확보돼 있던 압력 기록을 책상에 펼쳐 놓고 있었다. 오늘 시험에서 생긴 기록과 섞이지 않도록 날짜가 다른 두 묶음 사이에 자를 세워 두었다.

재필이 말한 세 번째 벨. 그 시점을 기준으로 압력이 변한 구간을 옮겨 보니 흩어져 보이던 계단들이 일정한 간격을 드러냈다.

해솔이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이를 짚었다.

“사십 초?”

“여기도요.”

세 번째. 네 번째. 기록의 해상도 안에서 반복되는 간격이었다. 여섯 번의 변화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약 삼 분 이십 초에 걸쳐 있었다. 사고 직전의 약 사 분 안에 그 계단들이 들어갔다.

해솔은 깨끗한 밸브를 돌아보았다. 오늘은 작업자가 신호를 듣고 단계마다 움직였다. 실제 청람호에서는 누가 신호를 들었을까. 사람이 시계를 보았을까. 아니면 사람이 없는 곳에서 무언가가 혼자 다음 칸으로 넘어갔을까.

“제어함.”

우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함 안을 열어 보지 않았다. 은색 레버가 어느 장치와 이어지는지, 아무도 끝까지 보지 못했다.

“인양팀에 내일 회수 가능 여부 확인하겠습니다. 기존 격리 구간에서 할 수 있는 작업인지부터요.”

해솔은 여섯 계단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종이에는 진동이 없었다. 그런데 손가락 끝에서, 멀리 떨어진 금속이 다음 홈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사십 초.

누군가에게는 돌아설 틈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다음 일을 기다리는 간격이었다.

해솔은 손을 거두었다.

“열 때까지 재필 씨한테 이 간격은 말하지 말아요.”

우찬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 살아남은 사람의 기억 속에 시계 하나를 더 놓아두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