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에는 요괴택배
접힌 계약의 두 번째 등
편의점 냉장고 셋째 문은 새벽 두 시가 지나야 안쪽 손잡이가 차가워졌다. 남해온은 그때까지 유통기한이 지난 도시락을 빼고 우유 상자를 채웠다. 계약을 다시 읽겠다고 말해 놓고도 문을 여는 데 두 번 망설였다. 야시장에서 본 흰 장갑이 마지막 줄을 가릴 때, 그는 그 문장을 읽고 싶은 마음을 먼저 들켰다.
편의점 냉장고 셋째 문은 새벽 두 시가 지나야 안쪽 손잡이가 차가워졌다. 남해온은 그때까지 유통기한이 지난 도시락을 빼고 우유 상자를 채웠다. 계약을 다시 읽겠다고 말해 놓고도 문을 여는 데 두 번 망설였다. 야시장에서 본 흰 장갑이 마지막 줄을 가릴 때, 그는 그 문장을 읽고 싶은 마음을 먼저 들켰다.
김콩쇠는 계산대 아래에서 손바닥만 한 종이함을 끌어냈다. 첫날 해온이 서명한 종이였다. 함 뚜껑의 붉은 실이 해온의 손가락에 닿자 한 번 팽팽해졌다. 도망가지 못하도록 묶은 실 같았다.
“원래 이렇게 두꺼웠나?”
“네가 그때는 첫 장만 읽었지.” 콩쇠가 말했다. “나도 끝을 몰라. 배송원 계약은 자기 눈으로 읽은 문장만 기억에 남는다고 해서.”
“그걸 알면서 대신 서명해도 된다고 뒀어요?”
“그때 말렸어. 늦었지만.”
콩쇠는 농담을 붙이지 않았다. 해온도 대답을 고르다 손을 뺐다. 자신이 바쁘다는 이유로 남의 이름을 썼던 밤을 콩쇠가 모두 떠안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위험을 아는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갑자기 서러웠다.
채원이 온 것은 야시장 접수목록을 맡기기 위해서였다. 그가 계약함을 보자 해온은 뚜껑을 닫으려 했다. 채원이 말했다.
“이건 네 계약이야. 내가 허락해 줘야 읽을 물건은 아니지. 다만 어제 거울 속 종이와 같은 원본인지는 나도 확인 못 해.”
해온이 손을 뗐다. 채원은 먼저 바깥표지를 살폈다. 발급방울 자국은 첫날 것과 같았지만, 접힌 뒷등에는 종이가 한 겹 더 붙어 있었다. 냉장고 형광등 아래에서 각도를 바꾸자 접착선이 색을 달리했다. 해온이 손톱으로 들추려 하자 채원이 조용히 종이받침을 밀어 주었다.
“뜯으면 어느 날 붙었는지 알 길도 같이 뜯겨. 읽을 수 있는 데부터 보자.”
계약은 백 번의 해 뜰 무렵까지 배송을 끝내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해온의 이름 아래에는 수취인이 거부한 물건을 억지로 문턱 안에 놓을 수 없다는 조항이 있었다. 조끼 안쪽에 꿰맨 세 규칙과 어긋나지 않았다. 그는 그 부분을 읽고 겨우 숨을 쉬었다.
그다음 장에는 완료 보수가 적혀 있었다. 숫자가 아니라 ‘이름 한 사람분의 이동권’이라는 낯선 말이었다. 해온이 소리 내어 읽자 콩쇠가 고개를 들었다.
“사람길에서 어디든 갈 자유?”
“그렇게 쓰여 있지 않아.” 채원이 말했다. “누구 이름인지, 어떤 길인지도 비어 있어.”
해온은 당장 자신에게 돌아올 보수라고 생각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월세를 낼 때마다 다른 구역 야간일을 구해도 버스가 끊겨 포기한 적이 있었다. 도윤이 다친 날에도 사람길과 요괴길 사이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다면, 사고 뒤 처리만큼은 조금 빨랐을지 모른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 데는 한순간이면 충분했다.
“멋진 보수인 척하네.” 콩쇠가 손바닥을 쳤다. “내가 대신 사인을 받으면 이동권 둘을 주나?”
“웃기려고 하는 거 아니죠.”
“안 웃기면 네가 이걸 진짜 갖고 싶어 하는 게 보여서.”
해온은 반박하지 않았다. 갖고 싶다는 말이 곧 받겠다는 결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렇게 마음에 드는 값을 앞에 놓으면, 빈칸의 주인을 다시 보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채원이 마지막 장을 넘겼다. 거울 속 장갑이 가렸던 자리였다. 해온의 계약함 속에는 ‘마지막 배송 완료 후 선택권 행사’라는 인쇄문과, 사라진 듯 흐린 두 칸이 있었다. 하나는 ‘개인 수령’, 다른 하나는 ‘원부의 권리 회복’.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대상과 범위는 최초 발급 규칙에 따름’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럼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건가요?”
“이 페이지가 진짜라면.” 채원이 대답했다. “그리고 최초 발급 규칙이 뭔지도 확인돼야 해. 어제 본 건 백결이 흔든 사본일 수 있고, 여기도 누가 덧댄 장이 있어.”
해온은 계약을 처음부터 다시 넘겼다. 바깥 종이와 덧붙은 안쪽 등의 섬유결이 달랐다. 원래 등 접힌 곳에만 보이는 작은 점 셋이 덧붙은 등에는 없었다. 그 차이를 처음 발견한 것은 기뻤다. 동시에 그동안 한 번도 펼쳐 보지 않았다는 게 부끄러웠다.
그때 냉장고에서 짧은 울림이 났다. 평소 발급방울 소리보다 낮았다. 콩쇠가 주문표를 꺼냈다. 야시장 입구에서 만난 조끼 입은 요괴에게 온 수선비 청구서였다. 수취인은 어제 이름표를 떼지 않은 그였다. 발신자는 실제로 조끼를 고친 가게였고, 청구액은 어제와 같았다.
“백결 쪽에서 보낸 미끼일 수도 있어.” 콩쇠가 말했다.
“가게 확인부터 하자.”
해온은 봉투를 들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요괴길의 수선가게에 채원이 정해 준 연락신호를 보내고, 발신표식의 실밥 방향을 가게 장부와 맞췄다. 수선사는 투덜거리며 어제 고친 소매의 사진 대신 치수와 봉제 순서를 말해 주었다. 사람 휴대전화에 제대로 잡히지 않는 흔적을 증거랍시고 요구하지 않는 편이 빨랐다.
“그 요괴가 이름표 맡기려고 했다던데요.” 수선사가 물었다. “정말 안 맡겼습니까?”
“어제는요. 오늘도 그분이 결정할 일이고요.”
“돈은 누가 결정해 주는지 모르겠네.”
해온은 대답 대신 청구서의 지급기한을 확인했다. 밤 세 번이 남아 있었다. 상담 장소와 시간을 함께 적어 전할 수 있었다. 청구서를 배송하면서 수선사가 연락을 끊지 않게 해 달라는 요청도 받았다. 소포 한 장을 제때 전하는 게 오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지하상가 바깥 계단은 분명 하나였는데, 해온이 도착하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한 칸 더 생겼다. 그 끝에 조끼 입은 그림자가 앉아 있었다. 그림자는 안전핀이 꽂힌 쪽 어깨를 가리키며 손을 내밀었다.
“여기 넣으면 돼요. 이름은 제가 대신 써 줄게요.”
해온은 발을 내딛지 않았다. 계단 끝은 수취인의 생활공간 문턱처럼 어둡게 접혀 있었고, 안으로 오라는 허락은 그림자가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수취인에게서 받은 허락이 아니었다. 그는 봉투의 발신표식과 수선사가 말해 준 소매 치수를 다시 확인했다. 그림자는 치수를 들을 때마다 모양을 바꿨다. 마지막에는 해온의 조끼 주머니에서 방금 꺼낸 종이와 똑같은 청구서를 손에 쥐고 있었다.
“진짜면 밖으로 나오세요. 청구서 때문에 안으로 들어가진 않겠습니다.”
계단 아래에서 누군가 기침했다. 어제 본 요괴가 본래 계단의 난간 뒤로 고개를 내밀었다. 안전핀은 그의 조끼에 남아 있었고, 소매에는 수선가게가 말한 엇갈린 박음질이 보였다. 그림자는 그걸 흉내 내려다 소매가 없는 팔을 드러냈다. 콩쇠가 빌려준 핀의 그림자만 훔친 모양이었다. 해온이 종이를 접어 봉투 안에 넣자 거짓 계단이 한 칸씩 접혔다.
“왜 저기 앉아 있었어요?” 해온이 물었다.
“누가 먼저 내 이름을 불러 주면 빚 얘기부터 안 해도 될 것 같아서요.”
그의 말에 해온은 멈췄다. 어제 매대에서 이름을 담보로 내놓으려던 손이 또 보였다. 이름을 부르지 않은 것은 옳았지만, 그가 어떤 마음으로 난간 뒤에 숨었는지는 이제 알았다.
수취인은 계단 바깥으로 나왔다. 안전핀이 아직 조끼에 꽂혀 있었다. 그는 종이를 보자 먼저 수리비 숫자부터 확인했다.
“안 줄일 생각이군요.”
“수선한 사람에게는 그대로 남는 값이니까요.” 해온이 말했다. “대신 청구서를 직접 받고, 낼 날짜를 상의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요괴는 밤 세 번을 손가락으로 셌다. 당장 낼 돈이 없다고 했다. 해온은 자기 돈을 내겠다는 말을 삼켰다. 다음 주 월세의 절반도 아직 없었다. 대신 수선사가 받아들이겠다고 한 분할 상담 시간을 보여 주었다. 채원이 적어 준 피해지원 접수 시간도 따로 건넸다. 두 곳을 같은 제도인 것처럼 섞지 않았다.
“내 이름으로 받는 청구서는 무섭지만,” 요괴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내가 어디로 갈지 알아먹을 수는 있네요.”
그는 손바닥에 찍힌 수취 표시를 확인한 뒤 봉투를 조끼 안에 넣었다. 해온은 그제야 배송 완료를 적었다. 조끼 속 세 규칙 가운데 마지막 칸까지, 오늘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 채울 수 있었다.
편의점으로 돌아오니 콩쇠가 계약함 앞에 앉아 있었다. 얇은 두 번째 등은 그대로 붙어 있었다. 그 곁에 채원이 찾아온 오래된 표지철의 목록이 놓였다. 창립 때 발급한 원규칙을 보관했을 법한 장소가 셋이었다. 하나는 닫힌 서쪽 배차소, 하나는 조정소의 반출기록실, 마지막 하나는 시장에서 팔린 중간 소포였다. 어느 곳에 원본이 있는지는 아직 몰랐다.
“내가 고를 날까지 그냥 모른 척하면 될 줄 알았어요.” 해온이 말했다.
“그날에 고르려면 지금 무엇을 고르는지 알아야지.” 채원이 답했다.
해온은 개인 수령이라는 칸에 손가락을 올렸다. 지우지도, 서명하지도 않았다. 대신 두 종이의 서로 다른 점을 한 장에 옮겨 적고 날짜를 썼다. 자신의 욕심까지 적을 수는 없어서, 옆 여백에 작게 ‘읽고 싶었다’고만 썼다.
콩쇠가 그 글씨를 보더니 펜을 가져갔다.
“내 것도 적자. 나는 네가 계속 배달하면 이 일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줄 알았어.”
“그 말, 처음에는 안 했잖아요.”
“응. 네가 알면 그날 당장 종이를 찢을까 봐 겁났어.”
“찢는다고 제가 쓴 글씨까지 사라지진 않았겠죠.”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 보지 않았다.
해온이 바라보자 콩쇠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래서 처음에 더 말렸어야 했고.”
해온은 그 말이 고백인지 변명인지 가리려다 그만두었다. 콩쇠가 하루 늦게 분실방울을 신고한 책임도, 처음의 서명을 막지 못한 잘못도 있었다. 그러나 백결이 만든 송장까지 콩쇠에게 떠넘기면 자신이 무서워하던 방식과 다를 게 없었다. 그는 종이함 옆에 수선가게 청구서의 전달시간을 다시 적었다. 오늘 맡은 배송 하나만큼은 애매한 발급표식 뒤에 숨지 않았다.
“수선가게에선 세 밤을 기다린답니다.”
“받을 돈이 있는데 기다린다니, 인심 좋네.” 콩쇠가 말했다.
“기다리는 동안 그 요괴가 직접 오기로 했어요. 안 오면 청구는 그대로 남고요.”
콩쇠는 자기 조끼 주머니를 뒤졌다. 손가락 끝에 실 끝이 걸렸다. 어제 빌려준 안전핀을 기억한 모양이었다. “그 핀은 내일 회수할까?”
“이름표가 다시 붙을 때까지는 두죠.”
“그럼 대여장부에 쓸게. 안 적으면 잃어버렸을 때 내가 훔친 사람 되니까.”
해온은 콩쇠가 작은 장부를 펴는 것을 보았다. 조금 전 계단에 없던 소매가 나타났던 일이 떠올라 핀을 빌려 간 사람의 옷 모양도 적으라고 했다. 콩쇠는 “안 갚으면 그 옷 잡으러 갈 거냐”며 웃었지만, 장부 끝에 조끼 안쪽 박음질을 그려 넣었다. 작은 그림 하나를 같이 그리자 해온의 손이 덜 떨렸다.
냉장고 셋째 문 안에서 다시 울림이 났다. 이번에는 주문표가 아니었다. 종이함의 덧붙은 등만 미세하게 떨렸다. 아까는 없던 점 세 개가 원래 등의 자리와 맞춰 안쪽으로 스며 나왔다. 가운데 점이 검게 변하자 채원은 함을 닫지 못하게 받침을 댔다. 해온은 누가 덧붙은 장을 따라 읽고 있는지 아직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