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법정·사회파 드라마 33화

바다가 증언석에 앉는 날

P-17의 철판

관의 번호는 저절로 나오지 않았다. 오재호는 작업복 소매로 녹을 닦으려다가 손을 멈췄다. 어제 회색 결정을 채취한 자리에서 손바닥만큼 떨어진 곳이었다. 마른 흙과 녹이 얇게 붙어 있었고, 그 밑으로 글자처럼 보이는 돌출이 있었다. 재호는 현장 담당자와 양쪽 감정인이 올 때까지 표시줄 밖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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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의 번호는 저절로 나오지 않았다. 오재호는 작업복 소매로 녹을 닦으려다가 손을 멈췄다. 어제 회색 결정을 채취한 자리에서 손바닥만큼 떨어진 곳이었다. 마른 흙과 녹이 얇게 붙어 있었고, 그 밑으로 글자처럼 보이는 돌출이 있었다. 재호는 현장 담당자와 양쪽 감정인이 올 때까지 표시줄 밖에 앉았다.

강만석이 그를 보러 왔다. “아직도 못 봐요?”

“봤다고 쓰려면 다 같이 봐야죠.” 재호가 답했다.

“그 번호 하나 때문에 사람들이 하루를 또 기다리네요.”

“그러게요.”

재호는 전날 도시락을 들고 왔던 딸이 오늘 아침 학교에 가며 자신에게 물은 말을 떠올렸다. ‘아빠가 만든 관이야?’ 그는 만들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러자 아이는 ‘그럼 왜 아빠가 혼나요?’라고 물었다. 그 질문에는 아직 답하지 못했다. 관이 오래됐다는 것과 오늘 관 옆에 선 노동자의 책임은 서로 다른 시간이었지만, 동네에서는 둘이 쉽게 섞였다.

입회자들이 도착하자 표면 보전 상태를 먼저 찍었다. 재호는 허가받은 부분의 흙만 작은 붓으로 털었다. 물을 붓지 않았고, 칼날로 녹을 긁지도 않았다. 각인이 흐릿하게 드러났다. P-17-04. 금속 자체에 오래전 새긴 글자였다.

“P-17이네요.” 만석이 말했다.

최다온은 외경과 각인 위치를 다시 봤다. “같은 계열의 네 번째 구간이라는 표시로 읽힙니다. 도면의 위치와 맞는지 확인해야 해요.”

“그래도 아무 관이나 나온 건 아니잖아요.”

“그건 맞습니다.”

다온이 반박만 하지 않자 만석은 오히려 잠깐 조용해졌다. 수년 동안 자신이 말하면 누군가는 늘 ‘그것만으로는’이라고 했다. 오늘은 그 앞에 ‘그건 맞다’가 붙었다. 번호 하나가 죽은 조개를 되살리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바라보던 땅 아래에 정말 오래된 설비가 있다는 사실은 움직이지 않았다.

배세희는 공장 자산대장에서 P-17을 찾았다. 12년 전 설비 폐쇄 사업, ‘철거 완료’라는 글자, 검수란의 날인. 그녀는 그 서류를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다. 회사에서 환경점검 자료를 제출할 때도 같은 표현을 썼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는 철거됐어야 할 관의 옆면이 햇볕에 드러나 있었다.

“내가 이걸 그대로 믿고 보고서에 넣었어요.” 세희가 말했다.

가람은 그녀의 목소리가 크게 흔들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걱정됐다. 세희는 지난해부터 야간 세척펌프의 비정상 값을 묻고 싶어 했지만, 생산본부의 ‘정상’이라는 답에 여러 번 막혔다. 이제는 자산대장의 완료 표시까지 설명해야 했다.

“세희 씨가 그 공사를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죠.” 가람이 말했다.

“아니요. 그 시절엔 입사 전이에요. 그렇지만 제 보고서는 제가 썼습니다.”

두 문장을 세희는 스스로 갈랐다. 가람은 그녀 대신 무죄라고 말하지 않았다. 법정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무엇을 알았고, 확인할 권한이 있었으며, 어떤 문장을 밖으로 보냈는지였다. 세희가 자신의 몫을 숨기지 않는 것이 다른 사람의 몫까지 떠안는 뜻이 되어서는 안 됐다.

공장 설비팀의 오래된 작업자는 ‘폐쇄’라는 말을 다르게 썼다. 생산에서 더 이상 사용하지 않으면 폐쇄라고 했다. 관을 땅에서 꺼냈는지는 별도 철거 작업이다. 재호도 그런 말을 들으며 일해 왔다.

“손잡이를 잠그고 표찰 달면 폐쇄입니다.” 재호가 말했다. “철거랑은 달라요.”

“하지만 여기에는 철거 완료라고 적혔어요.” 세희가 대장을 가리켰다.

재호가 글자를 읽었다. 그는 그 시절 외주업체의 일용직이었다. 관 옆에서 세척장비를 나르는 일을 했을 뿐, 어떤 날인도 하지 않았다. 기억은 짧았다. ‘관을 잘라 버리는 걸 보지 못했다’는 말조차 현장 전체를 보지 않았다는 사실과 붙어야 했다.

법원 심리에서 공장 측 변호사는 각인의 의미를 인정했다. 그러나 철거 완료란 표현은 내부 회계상 자산 폐기였지 실제 제거를 뜻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가람은 그 설명을 메모하면서 회사가 보험 위험평가서에도 같은 말을 보냈는지 물었다. 공장 측은 그 문서의 작성 경위를 확인하겠다고 했다.

안주원 재판장은 두 변호사의 문장을 끊었다. “자산대장의 용어와 현장의 상태가 다르다는 점은 보입니다. 무엇이 왜 달라졌는지는 관련 공사내역을 보고 판단하겠습니다.”

만석은 방청석에서 혀를 찼다. “눈으로 봤는데도 또 서류예요?”

옆자리의 상인 은실이 조용히 말했다. “눈으로 본 건 관이 남았다는 거지. 누가 거짓말했는지는 아직 아니잖아요.”

만석은 은실을 봤다. 그녀는 가게 셔터를 절반만 올린 채 매출을 증명해야 하는 사람이다. 문 하나가 닫혀 있다는 사실과 왜 닫혔는지를 나눠 말하는 일에 이미 지쳐 있었다. 만석은 대꾸하지 않고 다시 법정을 봤다.

가람은 폐쇄 사업의 공사계약, 작업일지, 자재 출고, 검수사진, 지급 내역을 특정해서 제출해 달라고 요청했다. 오래된 설비의 모든 기록을 무작정 달라는 요구가 아니었다. 공장 측은 자료가 남아 있는 범위를 확인하겠다고 했다. 주원은 제출기한을 정하되, 보관 기간이 지난 자료가 없다는 사실도 그대로 설명하도록 했다.

점심에 세희는 법원 앞 작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은실이 임시로 낸 도시락 판매대였다. 반찬통은 반만 차 있었고 메뉴판의 생선구이는 종이로 가려져 있었다. 은실은 세희에게 밥을 건네면서 영수증을 붙였다.

“회사에서 쓰라고 하나요?” 은실이 물었다.

“제 돈이에요.”

“그럼 더 받지는 않겠습니다.”

세희는 가격표대로 계산했다. 평소보다 낮은 가격 옆에 ‘생선구이 제외’라는 작은 글씨가 있었다. 회사 직원에게 주는 호의가 아니라 빠진 반찬의 값이었다. 그녀는 그 글씨를 오래 보다가 영수증을 접었다. 옆자리에서 재호가 작업복을 입은 채 도시락을 열었다. 두 사람이 같이 앉자 다른 손님 하나가 자리를 옮겼다.

재호는 그 움직임을 못 본 척했다. “제 딸이 관 찾았다고 반 친구한테 들었대요. 걔들은 제가 거기서 일하니까 제가 만든 줄 아나 봐요.”

은실이 빈 반찬통을 닫으며 말했다. “우리 가게도 저 관 때문에 생선 못 팔아요. 누가 만들었는지 묻는 건 자연스럽죠. 그런데 아이한테 묻는 건 틀렸어요.”

세희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같은 말을 자신도 회사 안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번호와 철판을 확인한 오늘의 결과가 현장 노동자에게 몽땅 떨어지지 않도록. 그렇다고 회사가 만든 ‘철거 완료’라는 말의 주체를 흐릴 수도 없었다.

은실은 돌아가는 두 사람에게 도시락 통을 회수하지 않았다. “나중에 갖다 주세요. 가게는 아직 열려 있으니까.” 그녀의 말에는 부드러움과 고집이 같이 있었다. 공장 노동자에게 밥을 팔면서도 죽은 갯벌의 손실을 말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날 오후 재호는 회사 안에서 오래된 장비창고를 열었다. 세희와 법원 지정 기록 담당자가 입회했다. 선반에는 닳은 밸브 손잡이와 이름 없는 철판이 놓여 있었다. 재호는 유사한 부품 하나를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관이 P-17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필요한 것과, 자신이 일했던 과거를 뒤져야 한다는 부담이 뒤섞였다.

“제가 그때 세척용 호스를 날랐어요.”

세희가 고개를 들었다. “기억나요?”

“호스가 너무 길어서 두 사람이 끌었습니다. 철거 작업이면 절단기나 운반차가 있었겠죠. 근데 제가 못 본 날도 있었을 거예요.”

기록 담당자는 그 진술을 적었다. 재호가 방금 뒤에 붙인 단서를 빼지 않았다. 못 봤다는 말로 하지 않았다고 확정하지 않는 것. 만석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답답하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재호에게는 그 한 문장이 자신의 일을 있는 그대로 남기는 방법이었다.

다음 날 공사비 지급표가 도착했다. ‘세척 및 잔류물 회수’ 비용은 있었지만 관 절단, 반출, 되메우기 비용은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철거가 없었다는 직접 증명은 아니었다. 다른 계약에 묶였을 수도 있었다. 다만 자산대장의 ‘철거 완료’ 옆에 놓기에는 빈칸이 너무 컸다.

가람은 만석에게 지급표를 보여 줬다. 그는 처음에는 기뻐했다. “돈을 안 썼으니까 안 뽑았네요.”

“그럴 수 있습니다. 다른 지급이 있었는지도 봐야 합니다.”

“또 그럴 수 있다.” 만석이 한숨을 쉬었다.

“이번엔 회사가 보여 줄 차례예요. 철거했다면 무엇으로, 누가, 얼마에 했는지.”

만석은 그 말을 받아들였다. 질문이 한쪽에만 향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조업 손실도 배를 안 띄웠다는 사실만으로 모두 계산되지 않았다. 사람마다 돈과 시간의 장부가 필요했다.

퇴근 무렵 재호는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가 만든 관은 아니었어. 아빠가 본 건 그때 호스를 나른 일이야.” 아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럼 아빠가 본 것만 말했네”라고 했다. 재호는 웃으며 그렇다고 답했다.

세희는 P-17-04 사진과 자산대장 사본을 서로 다른 봉투에 넣었다. 관의 이름은 확인됐고, 폐쇄라는 말의 뜻은 갈라졌다. 바다로 향하는 길이 실제로 열려 있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12년 전 완료 도장 아래에 남은 철판은 누군가의 오래된 설명을 다시 부르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봉투를 맡기고 밖으로 나와 은실의 빈 도시락 통을 차에 실었다. 내일 가게에 돌려줄 생각이었다. 가게가 계속 열려 있다는 말이 세희에게는 이상하게 고마웠다. 공장 안의 사람과 바다 쪽 사람이 같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직 남아 있었다. 세희는 통을 뒷좌석에 놓고, 회사에 돌아가면 제출자료를 누가 승인했는지부터 확인하겠다고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