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음악 고딕 미스터리 33화

일곱 번째 트랙은 비어 있다

조율사가 남긴 간격

백정호의 공방에는 시간이 서로 다른 소리로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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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호의 공방에는 시간이 서로 다른 소리로 걸려 있었다.

벽시계는 초마다 딸깍거렸고, 창가의 메트로놈은 멈춘 채 태엽이 풀리는 미세한 마찰음을 냈다. 천장 가까이 매달린 음차들은 문이 열릴 때마다 아주 낮게 부딪쳤다. 맑은 음이 아니라 쇠끼리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소리였다.

한이솔은 작업대 앞에 서서 전날 문서실에서 본 서명을 떠올렸다. 흐린 두 글자. 백정호는 짐작이 간다고 했지만 이름부터 말하지 않았다. 오늘 공방으로 오라는 연락에도 그 이름은 없었다.

강태오는 먼저 와 있었다. 그는 보험 조사 서류보다 큰 1998년 사업장 주소록을 펼쳐 놓고 있었다.

“철도창고가 세 곳입니다.” 태오가 말했다. “화영역 화물창고, 남부선 보세창고, 차량기지 부품창고. 314를 동·통로·칸으로 읽으면 어디든 하나쯤 맞을 수 있어요.”

“그러니 숫자부터 주소로 만들면 안 됩니다.”

“주소일 가능성을 보러 온 것 아닙니까?”

백정호가 공방 안쪽에서 나왔다. 양손에는 두꺼운 장부 한 권이 들려 있었다. 검은 천으로 싼 모서리가 닳아 판지가 드러나 있었다.

“둘 다 조용히 하시오. 종이가 사람보다 목소리가 작소.”

그는 장부를 작업대에 놓고 창문을 닫았다. 거리의 버스 소리가 얇아졌다. 장부가 펼쳐지자 오래된 흑연 냄새와 기름 먹인 종이 냄새가 올라왔다. 한 장마다 피아노 이름과 조율일, 교체한 현과 해머 번호가 손으로 적혀 있었다.

“방송국에서 가져온 겁니까?” 태오가 물었다.

“내 공방 장부요. 돈 받은 일은 내가 적었지.”

“그럼 보관 경위가 이어집니까?”

“내 손에서 내 서랍으로 이어졌소. 그 이상 필요한가?”

태오가 입을 다물지 않자 이솔이 장부 옆에 1997년 방송국 정비표 사본을 놓았다. “먼저 글씨를 보죠.”

백정호의 장부에서 숫자 3은 윗부분이 편평했고, 4는 세로획이 아래로 길게 빠졌다. 방송국 정비표의 3은 위아래가 거의 같은 크기였고 4는 삼각형이 닫혀 있었다. 업라이트 액션 레일의 314도 후자에 가까웠다.

백정호는 확대 사진을 보자마자 시선을 돌렸다.

“선생님 글씨는 아니네요.” 이솔이 말했다.

“처음부터 아니라고 했소.”

“어제는 그렇게까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 기억은 사진보다 늦게 선명해질 때가 있어.”

태오가 흐린 서명 부분을 가리켰다. “누구입니까?”

백정호는 장부 가장자리를 엄지로 눌렀다. 음차 하나가 천장에서 가볍게 울었다.

“내 밑에서 일하던 아이가 있었소. 아이랄 나이는 아니었지만 다들 그렇게 불렀지. 방송국 피아노는 내가 맡았고, 창고와 학교는 그 사람이 다녔어. 차비도 제 돈으로 내고.”

“이름을 알려 주십시오.”

“연락해서 뭘 물을 거요? 스물아홉 해 전 연필을 네가 쥐었느냐고?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쟁이, 맞다고 하면 공범으로 만들 작정이오?”

태오의 턱이 굳었다. “원반이 윤태문 제작실로 흘러간 경로를 찾는 일입니다.”

“그 사람은 피아노를 고쳤어. 원반이 아니라.”

“둘이 같은 창고에 있었다면 다릅니다.”

백정호가 장부를 덮으려 하자 이솔이 손을 올리지 않고 말했다. “사람에게 묻기 전에, 그 표식이 정말 그 시절 작업 방식이었는지 더 볼 수 있습니까?”

“이미 봤잖소.”

“점은 봤습니다. 숫자 사이의 거리까지는 안 봤어요.”

이솔은 액션 레일 사진과 정비표 사본을 같은 크기로 맞췄다. 3과 1 사이는 넓고 1과 4 사이는 좁았다. 점의 개수만 달랐던 것이 아니다. 숫자들이 일정한 칸 안에서 한쪽으로 밀려 있었다.

백정호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는 서랍에서 금속 자 대신 오래된 건반 간격자를 꺼냈다. 상아 건반 폭에 맞춰 홈을 낸 얇은 황동판이었다.

“이걸 왜 쓰십니까?” 태오가 물었다.

“피아노 위에서 읽는 숫자라면 건반 폭으로 띄웠을 수 있으니까.”

황동판을 사진 위에 직접 대지는 않고 투명 덮개 위로 옮기자, 3은 저음 쪽 넓은 칸, 1은 가운데 칸, 4는 고음 쪽 좁은 칸의 중심에 놓였다. 그러나 백정호가 기대한 옥타브 경계와는 반 칸씩 어긋났다.

“안 맞네요.” 태오가 말했다.

백정호는 들은 척하지 않았다. 간격자를 한 칸 옮기고 다시 맞췄다. 또 어긋났다. 세 번째에는 점 하나가 홈 사이에 걸렸다.

“그만하죠.” 이솔이 말했다.

“잠깐.”

“선생님 방식이 틀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표식이 건반 자리를 직접 가리키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에요.”

백정호가 황동판을 작업대에 내려놓았다. 금속이 나무에 닿으며 탁, 하고 마른 소리를 냈다. 그의 손등에는 힘줄이 선명했다.

“내가 그 사람한테 가르쳤소.” 그가 말했다. “조율표를 보면 피아노가 어디서 아팠는지 알 수 있게 쓰라고. 그런데 그 사람은 늘 숫자 사이를 이상하게 벌렸어. 칸을 그리면 종이가 아깝다면서.”

백정호는 벽에서 가장 작은 음차를 내렸다. 고무 받침에 가볍게 치자 맑은 라 음이 공방의 먼지를 가르고 길게 떨었다. 그는 작업대 아래 낡은 공구함 뚜껑을 열었다. 안쪽에는 연필로 그은 세로선과 점들이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처음 일 배울 때 그 아이는 맥놀이를 눈으로 셌소.”

“소리를 눈으로요?” 태오가 물었다.

“두 현이 어긋나면 웅웅하는 간격이 생기지. 그 아이는 손가락을 접어 가며 세었어. 귀가 나쁜 게 아니라, 내 앞에서 틀릴까 봐 몸에 숫자를 숨긴 거요.”

음차의 떨림이 공구함 철판으로 옮겨 붙었다. 처음에는 하나였던 음이 얇은 두 겹처럼 벌어졌다가 다시 합쳐졌다. 이솔은 47초 원반의 두 방이 접합선에서 겹치던 순간을 떠올렸다. 서로 다른 시간이 한 프레임 동안 같은 자리를 차지했던 소리. 그러나 여기서 울리는 맥놀이는 편집이 아니라 금속과 금속의 작은 차이가 만든 것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선생님 공방 이름만 쓰게 했습니까?” 이솔이 물었다.

백정호는 음차를 손으로 감싸 울림을 죽였다. “내 이름이 있어야 일감을 줬소. 그게 그 아이를 먹여 살린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지금 이름을 먼저 꺼내고 싶으신 거군요.”

“죽은 기술자한테도 자기 몫은 있어.”

“있습니다. 다만 그 몫에 하지 않은 일까지 얹으면 또 빼앗는 게 됩니다.”

백정호는 공구함을 닫지 않았다. 안쪽 점들은 증거가 아니라 한 사람이 숫자를 몸으로 세던 버릇의 잔해였다. 이솔은 사진을 찍지 않았다.

“칸 대신 간격을 썼군요.”

“아마도.” 백정호가 처음으로 그 말을 쉽게 내놓았다. “창고 물건을 찾을 때도 그랬소. 동 번호, 통로, 선반 칸을 종이 한 줄에 적었지. 점으로 구분하고.”

태오가 주소록을 당겼다. “그러면 3동 1통로 4칸.”

“그렇게 빨리 가지 마세요.” 이솔은 주소록을 덮었다. “점이 음역인지 항목 구분인지, 세로선이 끝인지 반출 표시인지 아직 겹쳐 있습니다.”

백정호는 이솔을 노려보다가 뜻밖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설명이 숫자를 주소로 바꾸는 데 쓰이자 오히려 겁이 난 얼굴이었다.

“그 아이는 표식을 두 번 썼소.” 그는 장부 뒤쪽을 펼쳤다. “하나는 피아노에서 읽는 것. 하나는 창고에서 읽는 것. 생김새가 같았어.”

장부 한 페이지에는 조율비를 받지 못한 작업들이 따로 적혀 있었다. 학교 강당, 방송국 소공연장, 화물창고 임시 보관품. 몇 줄은 백정호 필체였고, 몇 줄은 다른 손이었다. 다른 손은 숫자 사이를 일정한 폭으로 벌리고 점을 찍었다.

태오는 휴대전화로 찍으려다 멈췄다. “촬영해도 됩니까?”

“오늘은 예의가 있군.”

백정호가 허락한 페이지에서 이솔은 두 종류의 표식을 골랐다. 피아노 정비 표식에는 숫자가 건반 수에 맞춰 1부터 88 사이에 있었다. 창고 작업 표식에는 3·1·4처럼 짧은 숫자가 세 묶음으로 나뉘었다. 모양은 같아도 쓰임이 달랐다.

“314를 건반 순서로 바꾸려던 게 첫 번째 오답이었네요.” 태오가 말했다.

“오답까지는 아니오.” 백정호가 퉁명스럽게 받았다. “어느 표를 보고 썼는지 잘못 골랐지.”

“그 차이가 오답을 만듭니다.”

두 사람이 다시 맞붙기 전에 이솔은 장부 아래쪽의 작은 숫자를 발견했다.

88.

건반 수처럼 보였지만 옆에는 네모난 도장이 반쯤 찍혀 있었다. 도장 테두리 안에는 `화영철도 시설기록 88`이라는 글자가 희미했다.

“이건 조율 숫자가 아닙니다.” 이솔이 말했다.

백정호가 돋보기를 들었다. “장부를 쓴 사람이 철도 기록에서 옮긴 모양이군.”

태오는 조금 전 덮인 주소록 대신 시립철도기록관 목록을 열었다. 시설기록 88번은 온라인 열람 대상이 아니었다. 제목만 남아 있었다.

`1998 화영역 화물창고 배치 및 단기임차 구획.`

공방의 음차들이 다시 한 번 가볍게 부딪쳤다. 이번에는 문도 열리지 않았는데 백정호가 작업대 아래 발을 떨고 있었다.

“그 사람을 찾으러 갈 겁니까?” 그가 물었다.

이솔은 기록관 열람 신청 화면에서 신청자 칸을 채웠다. “아니요. 먼저 그 사람이 본 도면을 보러 갑니다.”

신청을 보낸 시각은 오후 네 시 십이 분이었다. 시설기록 원본은 당일 즉시 꺼내 볼 수 없다는 안내가 먼저 떴다. 십팔 분 뒤, 기록관에서 다음 날 오후 네 시 도면실 한 자리를 배정했다. 승인 문구 아래에는 원본을 직접 누르지 말 것, 촬영은 담당자 입회 아래 할 것이라는 조건이 붙었다. 이솔은 그 화면까지 저장한 뒤 노트에 적었다. `열람 승인 16:30. 원본 확인 전 주소 사용 금지.`

백정호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장부를 닫으며 낮게 말했다.

“기술은 사람보다 오래 남는다고 생각했소. 오늘 보니, 사람 이름을 대신 끌고 다니기도 하는군.”

작업대 위 황동 간격자는 끝내 맞지 않았다. 실패한 자리에 남은 반 칸의 어긋남이 그들을 피아노에서 철도창고로 밀어냈다.

88은 건반의 수가 아니라, 다음 날 열어 볼 기록 묶음의 번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