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트랙은 비어 있다
액션 레일의 연필점
아침 햇빛이 악기창고의 높은 창을 통과해 작업대 위에 네모난 칸을 만들었다.
아침 햇빛이 악기창고의 높은 창을 통과해 작업대 위에 네모난 칸을 만들었다.
한이솔은 전날 촬영한 액션 레일 사진을 그 빛 안에 놓지 않았다. 햇빛은 종이의 굴곡을 잘 드러냈지만 시간에 따라 각도가 변했다. 대신 이동식 보존등 두 개를 같은 높이에 세우고, 314와 점 세 개와 세로선이 찍힌 사진을 회색 기준판 위에 고정했다.
피아노는 앞판을 닫은 채 벽에서 떨어져 있었다. 폐기 스티커 위에는 민혜주가 붙인 칠 일 보존 보류표가 겹쳐졌다. 자산팀에 보낼 정오 중간보고 시각만 붉은 펜으로 동그라미 쳐져 있었다.
최노을이 얇은 투명 필름을 사진 위에 올렸다. “원본 목재에는 아무것도 대지 않습니다. 어제 좌표 사진에서 선만 옮길게요.”
“탁본이라고 하지 마세요.”
백정호가 문을 열며 말했다. 그는 가죽가방 대신 누런 서류봉투 두 개를 들고 왔다.
“왜요?” 노을이 물었다.
“내 세대 조율사한테 탁본이라 하면, 종이 대고 연필 문지를 사람부터 생각나니까. 저 나무에 그러면 남아 있던 흑연까지 번져요.”
노을이 투명 필름의 보호지를 벗겼다. “그래서 비접촉 전사라고 부르겠습니다.”
“말은 길어도 그게 낫지.”
백정호는 봉투에서 작은 수첩과 접힌 조율표들을 꺼냈다. 종이마다 음 이름, 기준 주파수, 손본 현의 번호가 빽빽했다. 어떤 표에는 동그라미와 빗금이 있었고, 어떤 표에는 숫자 사이에 점이 찍혀 있었다.
이솔은 먼저 출처를 물었다. “누가, 언제 작성한 겁니까?”
“이건 내 수첩. 2003년부터 썼소. 이쪽은 방송국에서 버리려던 조율표를 내가 정리해 둔 것. 가장 오래된 건 1996년이라고 적혀 있고.”
“반출 기록은 있습니까?”
“없소. 폐지함에서 주워 온 걸 자랑할 생각은 없었으니까.”
노을이 표를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그러면 비교 자료의 보관 경위는 불완전하다고 적어야 합니다.”
백정호의 눈썹이 올라갔다. “종이가 가짜라는 거요?”
“가짜라는 말이 아닙니다. 중간 이력이 없다는 말이에요.”
“그 차이를 누가 알아줍니까? 보고서에 불완전이라고 쓰면 사람들은 못 믿을 종이라고 읽지.”
이솔은 가장 위의 조율표를 손대지 않은 채 보존봉투째 돌려 보았다. “그래서 이 종이로 결론을 내리지 않겠습니다. 선생님이 표식을 어떻게 읽는지 배우고, 같은 시기 독립 기록에서 다시 찾겠습니다.”
“결국 못 믿겠다는 말이군.”
“선생님 기억을 사실로 만들려면 선생님 혼자 받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백정호는 대답 대신 돋보기를 꺼냈다. 창고 밖에서 지게차가 지나갔다. 오늘은 경고음이 들리지 않았고, 두꺼운 고무 바퀴가 바닥의 이음매를 넘는 둔탁한 진동만 작업대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노을은 투명 필름에 숫자와 점의 위치를 옮겼다. “됐어요. 이제 사진으로만 봐요.”
전날 찍은 여든여덟 해머가 긴 띠로 작업대에 펼쳐졌다. 가운데 두 옥타브는 골이 깊었다. 고음 쪽에는 띄엄띄엄 진한 자국이 있었고, 저음 끝은 한동안 손대지 않은 듯 둥글었다. 빛을 머금은 펠트들은 닳은 치아처럼 보였다.
이솔은 수인이 연주한 카덴차 사본을 그 아래에 펼쳤다. 47박자를 센 연필점, 끝에서 세 번 반복한 하행 음형이 남아 있는 페이지였다.
“해머 마모와 악보 음을 맞추려는 거요?” 백정호가 물었다.
“그날 악보가 어느 음역을 많이 썼는지 보고 싶습니다.”
“스물여덟 해 동안 다른 사람도 쳤을 텐데.”
“한 곡의 자국이 스물여덟 해를 이기지는 못하겠죠.”
“다르면?”
“그때는 이 피아노라는 가설이 약해지겠죠.”
백정호는 처음으로 조금 웃었다. “틀릴 자리도 남겨 놓고 시작하는군.”
해머를 따라가던 이솔의 검지가 중간에서 자꾸 멈췄다. 악보의 마지막 세 점은 수인이 되찾아 간 원본 위에 남은 것이었다. 여기 패인 홈은 그보다 더 많은 손의 시간이 뒤섞인 자리였다. 한 사람을 찾는 마음이 강할수록, 아무 마모나 그 사람의 것으로 만들기 쉬웠다. 이솔은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카덴차에서 많이 반복된 음과 깊게 팬 해머 몇 개는 겹쳤다. 그러나 겹치지 않는 것도 많았다. 백정호는 그 불일치를 보고도 실망하지 않았다.
“연주자는 곡 하나만 치지 않소. 마모는 사람 서명처럼 깨끗하지 않아.”
“그럼 이 배열로 연주자를 특정할 수는 없겠네요.”
“당연하지. 대신 어느 음역을 기준 삼았는지는 볼 수 있지.”
그가 투명 필름의 점들을 가리켰다. 3과 1 사이의 점 하나, 1과 4 사이의 점 둘, 4 뒤의 점 셋. 마지막 세로선.
“조율사가 음역을 나눌 때 점을 쓴다는 겁니까?” 이솔이 물었다.
“모두가 쓰는 표준은 아니오. 피아노마다 건반 번호를 처음부터 세는 사람도 있고, 옥타브마다 다시 세는 사람도 있어. 현장에서 빨리 알아보려고 자기들끼리 약속한 표시가 생기지.”
백정호는 자기 수첩을 펼쳤다. 52·1·7 같은 숫자 사이에 작은 점이 있었다. 어떤 점은 하나, 어떤 점은 둘이었다. 숫자 끝의 세로선은 작업 구간이 끝났다는 뜻으로 쓰여 있었다.
“점 하나는 가운데 아래 옥타브, 둘은 가운데 위, 셋은 그 위. 여기 세로선은 더 읽지 말라는 끝표시요.”
노을이 짧게 물었다. “다른 사람 표도 있어요?”
“내가 배운 사람들.”
“방송국에서 썼다는 건요?”
백정호의 손가락이 수첩 위에서 멈췄다. “표시가 같잖소.”
“선생님 수첩하고는 닮았죠.”
“이 정도로 닮은 걸 우연이라고 하면 현장 기술은 영원히 증거가 못 되지.”
“방송국 종이 한 장만 더 봅시다.” 이솔이 말했다. “선생님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그 시절 선생님 혼자 일한 게 아니었으니까.”
백정호가 의자를 밀치고 일어났다. 금속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에, 다시 창고 앞을 지나던 지게차의 진동이 겹쳤다. 피아노 안쪽에서 가느다란 금속성 울림이 번졌다. 누구도 건반을 누르지 않았는데 창고는 한 음을 냈다.
세 사람은 동시에 피아노를 보았다.
노을이 먼저 말했다. “바닥 진동을 받았나 봐요.”
이솔은 손목 안쪽으로 그 한 음을 느꼈다. 47초의 무음에서 들었던 낮은 떨림도 처음에는 몸이 먼저 알아챘다. 그때는 방과 기계를 찾아냈고, 지금은 창고 밖을 지나간 지게차가 있었다. 소리가 사람의 뜻을 대신한다고 믿는 순간, 수인은 또 자기 말이 아닌 것으로 설명될 터였다.
백정호가 다시 앉았다. “저것도 기록합니까?”
“지게차가 지나가자 울렸다고만요.”
“당신들은 관계없는 걸 적는 데도 품이 많이 드는군.”
“나중에 누가 수인이 친 건반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니까요.”
백정호는 조율표 한 장을 봉투에서 꺼내려다 멈추고, 봉투째 이솔 쪽으로 밀었다. “그럼 내 말이 맞는지 보러 갑시다. 방송국에 그랜드 하나, 소공연장에 업라이트 하나가 더 있었소. 둘 중 어디에도 이 점이 없으면 내가 점심을 사지.”
“둘 다 있으면요?” 노을이 물었다.
“당신들이 사시오. 비싼 걸로.”
혜주가 점심 무렵 들어왔을 때, 세 사람은 처음으로 웃고 있었다.
“어제보다 아는 게 늘었습니까?”
이솔이 말했다. “백 선생님이 찾을 종이를 정해 주셨습니다.”
“314가 뭔지는요?”
백정호가 먼저 받았다. “그건 종이가 더 입을 열어야 알겠소.”
혜주는 정오 중간보고 양식을 펼쳤다. “칠 일 중 하루를 썼어요. 오늘 보고에는 뭐라고 적죠?”
노을이 전날과 오늘의 상태표를 건넸다. “원상 복구 끝. 오늘 문서실 갑니다. 추가 분해 없어요.”
혜주는 서류를 읽고 서명했다. “백 선생님 점심만 비싸지겠네요.”
“틀리면 내가 사는 거요.” 백정호가 중얼거렸다. “맞으면 이 피아노가 하루쯤 덜 외롭겠지.”
오후에는 방송국 문서실에서 연락이 왔다. 폐쇄된 A스튜디오 그랜드피아노의 정비철과 소공연장 피아노의 조율표를 찾았다는 것이었다. 원본은 옮길 수 없어 문서실 촬영대에서만 볼 수 있었다.
세 사람은 피아노의 앞판과 봉인표를 확인한 뒤 이동했다. 문서실은 오래된 복사용지 냄새로 가득했다. 기록 담당자가 회색 상자에서 1997년 조율표 묶음을 꺼냈다. 백정호의 자료와 달리 입수 경위와 보관 위치가 이어진 원본이었다.
첫 장에는 기준음과 교체 현 목록만 있었다. 두 번째 장에는 점 대신 빗금이 쓰였다. 백정호의 입술이 굳었다. 자기 기억과 다른 방식도 같은 방송국에서 함께 쓰였던 것이다.
“계속 보죠.” 이솔이 말했다.
세 번째 장은 그랜드피아노의 액션 정비표였다. 숫자 사이에 점 하나와 점 둘이 찍혀 있었다. 작업 구간 끝에는 짧은 세로선이 있었다. 백정호가 손을 뻗다가 투명 덮개 앞에서 멈췄다.
“백 선생님 말이 맞았네요.” 혜주가 속삭였다.
백정호는 점이 찍힌 자리보다 아래의 범례를 찾았다. “절반만. 점을 어떻게 썼는지는 맞아도, 314가 뭔지는 이 종이가 말 안 해.”
표의 아래쪽에는 작은 범례가 있었다. 점 하나, 점 둘, 점 셋 옆에 각각 저음역·중음역·고음역이라고 적혀 있었다. 백정호가 말한 구분과 완전히 같은 명칭은 아니었지만, 점의 수로 구역을 나누고 세로선으로 끝을 표시한다는 원리는 일치했다.
노을은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표식 체계 확인.”
백정호는 이겼다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투명 덮개 위로 손가락 그림자만 움직였다. “내 스승은 조율표를 죄다 태워 버렸소. 남의 피아노 속사정을 왜 남기냐고 했지. 그때는 그게 의리인 줄 알았어.”
그는 1997년의 얇은 종이를 한참 보았다. “남겨야 지켜지는 것도 있었군.”
이솔은 페이지 전체를 촬영하고 상자번호와 문서철 위치를 함께 남겼다. 314를 특정 건반 순서로 변환할 근거는 생겼다. 그러나 그 숫자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조율표 오른쪽 위에 연필로 쓴 짧은 메모가 나타났다.
‘철도창고 반출분과 동일 기호.’
날짜는 1997년 11월. 작성자 서명은 백정호가 아니었다.
그 아래에는 점 세 개와 세로선이 찍혀 있었고, 숫자 사이 간격은 업라이트피아노의 314와 같았다.
백정호가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저건 내가 쓴 게 아니오.”
“누가 썼는지 아십니까?”
그는 서명란의 흐린 두 글자를 오래 보았다.
“짐작은 가오. 하지만 이번에는 이름부터 말하지 않겠소.”
이솔은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사람을 찾기 전에 표식이 가리키는 체계부터 확인해야 했다.
문서실 바깥에서 철도 화물열차의 낮은 진동이 창유리를 스쳤다. 선로는 여기서 멀었고, 소리는 곧 사라졌다. 종이 위 ‘철도창고’ 네 글자만은 움직이지 않았다.
314는 아직 주소가 아니었다.
하지만 더는 피아노 안에 홀로 남은 숫자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