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 구조·재난 스릴러 32화

수심 43미터의 종

선미의 은색 레버

문재필은 기관장의 이름 옆에 놓인 펜을 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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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필은 기관장의 이름 옆에 놓인 펜을 치웠다.

정우찬이 아직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 그랬다. 펜은 탁자 끝까지 굴러갔다. 재필이 먼저 손을 뻗어 떨어지기 전에 잡았다. 잡은 채 돌려주지 않았다.

“이 세 사람 중 하나라는 거죠?”

대장에는 선장, 기관장, 선사 감독관에게 지급한 열쇠가 적혀 있었다. 우찬은 빈 의자를 당겼다.

“지급받은 사람이 셋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시작해서 끝에는 늘 못 돌아온 사람 이름이 남더라고요.”

재필은 앉지 않았다. 우찬은 종이를 뒤집지 않았다. 가린다고 없어질 의심은 아니었다.

통신 담당자가 문밖에서 그를 불렀다. 잠수팀이 선미 통로 입구에 도착했다고 했다. 우찬은 재필을 남겨 두고 가려다가 멈췄다.

“직접 보시겠습니까?”

재필의 손에서 펜이 작게 울렸다. 그는 주머니에 넣으려던 펜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

어제 붙인 표식은 제자리에 있었다.

강해솔은 표식 바로 옆에 있는 검은 선을 확인했다. 케이블은 몸이 돌아누운 청람호의 벽을 따라 비스듬히 뻗었다. 갑판에서는 선미로 걸어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벽과 바닥을 가려내는 데에도 빛을 두 번 돌려야 했다.

통로에 들어가기 전 확인한 제한 시간은 아직 남아 있었다. 남아 있다는 이유로 다 쓰지는 않기로 했다. 보조 잠수사가 뒤쪽에서 응답했고, 해솔은 정해 둔 범위 안에서 카메라를 먼저 보냈다.

은색이 나타났다.

수중등을 조금 움직이자 그것은 손잡이 모양이 됐다. 작고 납작한 레버. 세 칸으로 나뉜 판 위에서 가운데를 가리키고 있었다. 숫자도 글자도 없었다. 무엇을 여는지 모르는 사람이 봐도 손부터 올리게 될 만큼 단순한 모양이었다.

“종점 확인했습니다. 기계식 연결로 보입니다.”

해솔은 레버 아래를 비췄다. 어제 따라온 케이블 외피가 작은 상자에 고정돼 있었다. 그 주변 페인트만 사각형으로 결이 달랐다. 넓은 벽을 칠한 뒤 상자를 붙인 게 아니라, 붙인 자리를 가리려고 그 주변을 다시 칠한 것처럼 보였다.

“전기 장치입니까?”

수면 위 누군가 물었다.

“보이는 쪽에는 기계 연결입니다. 배에 전원이 없어도 힘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내부는 아직 못 봅니다.”

불이 꺼지면 멎는 장치가 아니었다.

해솔은 레버를 잡지 않은 채 옆면과 고정 부위를 차례로 촬영했다. 가운데가 중립인지도 알 수 없었다. 어제 닫힘이라는 글자에 속았는데, 오늘 아무 글자도 없는 가운데 칸을 안전하다고 부를 수는 없었다.

그때 주황색 한 올이 보였다.

레버 아래의 좁은 틈이었다. 물결에 끝만 조금 움직였다. 해솔은 손전등 각도를 고정한 뒤 화면이 흔들리지 않기를 기다렸다.

“섬유 있습니다. 주황색.”

우찬의 응답이 한 박자 늦었다.

“종줄 쪽과 비교 가능하겠습니까?”

“같은 색인 것만 압니다.”

해솔은 그 뒤에 말을 덧붙였다.

“이 배에서 많이 쓴 줄이면 다른 데서도 나옵니다.”

수면 위에서 재필이 화면에 가까이 갔다. 우찬은 그의 반응을 보았지만 물을 수 없었다. 눈이 움직였다고 기억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화면에는 은색 레버와 그 아래의 주황색 끝이 함께 잡혔다.

***

레버를 보호할 투명 커버는 그보다 훨씬 컸다.

갑판에서 치수를 확인할 때 해솔은 너무 커 보인다고 했다. 작업 담당자는 고정 부품까지 피하려면 이만큼 떨어져야 한다고 대답했다. 현장에 가져가 보니 큰 것은 커버가 아니라, 저 작은 레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비워 두어야 할 자리였다.

증거 채취 담당 잠수사가 볼트 머리의 흔적을 복제하는 동안 해솔은 조명과 주변 시야를 맡았다. 두 갈래로 벌어진 긁힘이 보였다. 녹과 새 흔적이 뒤섞여 있어 먼저 생긴 것이 무엇인지는 눈만으로 알 수 없었다.

주황 섬유는 별도로 수거했다. 같은 장소에서 나왔다는 이유로 같은 봉투에 들어가면 안 됐다. 수면 위에서 각 표본을 인계하는 순서를 미리 말해 두었는데도, 해솔은 통신으로 다시 확인했다. 우찬이 하나씩 받아 적는 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고정 전에 커버 한쪽에 불빛이 비쳤다. 해솔은 자기 얼굴 대신 수중등의 둥근 빛을 보았다. 이 안에 손을 넣었던 사람도 이런 크기로 손잡이를 봤을 것이다. 긴 팔이나 특별한 힘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이 통로에 들어올 수 있는 열쇠였다.

해솔은 고개를 들었다. 문틀에 남은 경첩이 보였다. 문이 제 구실을 했던 때, 문밖에서는 상자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출입문과 제어함 위치 함께 찍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이번에는 물건이 아니라, 물건을 숨긴 자리가 화면에 들어왔다.

***

우찬이 돌아왔을 때 재필은 여전히 서 있었다.

그는 젖은 잠수 장비를 벗는 해솔에게 먼저 물었다.

“그거, 저 안에서 당겨야 움직입니까?”

“어디서 조작됐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오늘은 선이 연결된 것까지 봤습니다.”

“기관장이 달았다는 얘기는 안 나왔죠?”

“안 나왔습니다.”

재필은 그 말을 듣고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대기실에서 함께 화면을 봤던 선사 직원이 지나가자 그의 어깨가 다시 올라갔다.

우찬이 말했다.

“기관장에게 열쇠가 있었다는 사실은 지울 수 없습니다.”

재필이 그를 돌아봤다.

“알아요.”

“감독관에게 있었다는 사실도 지우지 않을 겁니다.”

“제가 해 달라는 건 지우라는 게 아니라…….”

재필이 말을 끊었다. 복도 끝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를 발로 조금 밀었다. 의자가 기울자 그가 곧바로 손으로 받쳤다. 화를 내면서도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동작이었다.

“그 양반은 열쇠 빌려주고 못 받으면 저녁마다 찾으러 다녔어요. 허리춤에 달려 있다고 하루 종일 자기 손에 있던 게 아닙니다.”

우찬은 지급대장을 재필 쪽으로 밀었다.

“그 얘기를 먼저 합시다.”

재필은 서류에 손을 대지 않았다.

“제가 빌린 날도 있습니다.”

우찬의 펜이 멈췄다. 해솔은 잠수복 지퍼를 끝까지 내리다 말았다.

“항해 중에요?”

“예전 정박 때. 물건 가지러. 언제였는지는 대장 봐도 안 나올 겁니다. 줄 때도 그냥 주고, 받으면 그냥 걸었으니까.”

재필이 끝내 의자에 앉았다. 기관장에게서 의심을 덜어 내려다가 제 이름을 보탠 사람의 얼굴이었다.

우찬은 그 진술을 받았다. 사고 당일 출입을 뜻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재필이 변명처럼 먼저 설명하지 않아도 되게 했다.

종이 한 장에 세 사람의 이름을 적어 놓으면 문 세 개처럼 보였다. 실제로는 그 문들 사이로 열쇠가 돌아다녔다. 재필은 우찬이 그 흐름을 적는 동안 한 번도 펜을 치우지 않았다.

***

그날 오후 우찬은 사람 이름을 가린 대장을 한 장 더 만들었다.

열쇠 번호, 지급일, 반납 시각, 예비 보관함의 봉인번호만 남겼다. 원본은 그대로 옆에 뒀다. 사람 이름을 영영 지우자는 게 아니라 먼저 읽히는 순서를 바꾸려는 것이었다.

해솔이 컵 두 개를 들고 왔다.

“이러면 누군지 모르잖아요.”

“지금은 모르는 편이 낫습니다. 이름부터 보면 그 사람이 갈 수 있는 길만 찾게 돼서요.”

해솔은 우찬의 컵을 서류에서 먼 쪽에 놓았다. 자기 컵에는 뜨거운 물만 있었다. 손가락이 조금씩 펴졌다.

기록의 빈칸은 생각보다 많았다. 반납하지 않은 게 아니라 반납 여부를 적지 않은 날도 있었다. 둘을 같은 표시로 칠할 수 없어서 우찬의 표는 좀처럼 단순해지지 않았다.

“이것도 시간이 안 맞네요.”

해솔이 예비 보관함 칸을 짚었다.

“어디요?”

같은 열쇠에 붙은 봉인번호가 달랐다. 출항 사흘 전의 점검표와 이틀 전의 교체표 사이였다. 교체 사유는 두 글자였다.

분실.

“열쇠를 잃어버렸다는 겁니까, 봉인을 잃어버렸다는 겁니까?”

우찬이 물었다. 서류를 가져온 직원이 목을 만졌다.

“보통은 담당자가 적는 대로…….”

“보통 말고 이 건요.”

직원이 입을 다물었다. 우찬은 그에게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해당 교체를 처리한 기록과 수령 확인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직원은 원본을 챙기려다 사본만 가져가도 된다는 말을 듣고 멈췄다.

해솔은 빈칸을 내려다보았다. 잃어버린 물건 하나가 문을 더 많이 만들었다.

재필은 원본 뒤편에서 그 두 글자를 보고 있었다.

“자물쇠는요?”

그가 물었다.

우찬이 고개를 들었다.

“열쇠 잃어버렸으면 자물쇠도 바꿔야 하는데. 배에서 그거 바꿨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들었어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꼭 들었어야 하는지도 아직 몰랐다. 그래도 이제 가져와야 할 서류가 하나 더 생겼다. 우찬은 자물쇠 교체대장을 요청 목록 맨 위에 올렸다.

***

해가 기울 무렵, 표본을 인계받은 담당자가 전화했다.

우찬은 화면을 켠 채 해솔을 불렀다. 볼트 머리에서 떠 온 복제면과 예전에 화물창 잠금핀에서 확보한 흔적이 나란히 나타났다. 두 갈래 자국 사이의 폭이 비슷했다.

해솔이 먼저 의자를 당겼다.

“같은 겁니까?”

담당자는 같은 폭의 공구로 생겼을 가능성이라고 답했다. 아직 예비 비교였고, 공구 실물을 찾기 전에는 같은 공구라고 할 수 없었다.

해솔은 확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잠금핀을 건드린 도구가 저 레버를 달았을 수도 있었다. 줄 하나를 따라 들어간 끝에서, 이전에 지나온 문이 다시 나타난 셈이었다.

그는 탁자 위의 펜을 집어 들었다가 재필에게 건넸다.

“아까 떨어뜨릴 뻔한 거요.”

재필이 펜을 받았다. 뚜껑이 제대로 닫혔는지 눌러 본 뒤 우찬의 서류 옆에 놓았다.

“사람 셋 찾는 걸로는 안 되겠네요.”

우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어함을 달려면 배에 들어와야 했다. 공구를 가져와야 했고, 작업할 시간이 있어야 했다. 사고 당일의 열쇠보다 먼저 확인해야 할 문이 있었다.

해솔은 두 장의 흔적 사진을 나란히 뽑았다. 한쪽은 물건을 가둔 곳, 다른 쪽은 물을 흘려보낸 곳이었다.

두 자국 사이의 거리를, 이제 배 밖에서 찾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