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증언석에 앉는 날
땅 아래의 빈 선
갯벌은 썰물 때마다 땅속에 없는 길을 그렸다. 물이 빠진 자리에 가느다란 홈이 생겼다가 다음 들물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강만석은 그 홈을 밟지 않고 건너는 법을 알았다. 그러나 법원 현장검증 차량이 가져온 화면에는 그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선이 그어져 있었다. 공장 담장 아래에서 남쪽 우수관 쪽으로 이어지는, 길고 가는 반사선이었다.
갯벌은 썰물 때마다 땅속에 없는 길을 그렸다. 물이 빠진 자리에 가느다란 홈이 생겼다가 다음 들물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강만석은 그 홈을 밟지 않고 건너는 법을 알았다. 그러나 법원 현장검증 차량이 가져온 화면에는 그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선이 그어져 있었다. 공장 담장 아래에서 남쪽 우수관 쪽으로 이어지는, 길고 가는 반사선이었다.
“P-17 아닙니까?” 만석이 물었다.
최다온은 화면에 손가락을 올렸다가 떼었다. “그럴 가능성은 있어요. 지금은 땅속에서 길쭉한 물체가 반사된다는 것만 말할 수 있습니다.”
“공장 도면에는 없다잖아요.”
“옛 도면에는 있을지 모르죠. 빈 관일 수도 있고, 다른 재질의 구조물일 수도 있어요.”
만석은 더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난밤 마을회관의 표결함 앞에서 ‘모두 같은 결론을 말하지 않아도 함께 요구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을 오늘 자신이 먼저 지켜야 했다. 찬성 78표가 반사선을 누출관으로 바꾸지는 못한다.
바닷바람에 측량 막대의 붉은 깃이 떨렸다. 공장 노동자들은 아침 교대 후 먼 울타리 안에서 현장을 봤다. 안전모를 쓴 남자 하나가 만석에게 손을 들었다. 만석의 조카가 그 공장에서 일했다. 둘은 지난달부터 집에서 밥을 먹어도 공장 이야기를 피했다. 마을이 다섯 줄 요구에 동의한 건 사실이지만, 폐쇄를 원하는 만석의 마음과 다음 달에도 임금을 받고 싶은 조카의 마음이 같아진 것은 아니었다.
서가람이 법원 현장검증 기록 담당자에게 다가왔다. “회사에서 제출한 폐쇄배관 목록을 함께 보시겠습니까?”
공장 측 변호사가 자료봉투를 내밀었다. 오래된 설비번호 옆에 ‘12년 전 폐쇄’라고 적혀 있었다. 실제 철거인지 차단인지, 비워 둔 채 묻었다는 뜻인지는 한 장의 표로 알 수 없었다. 가람은 ‘누출관’이라는 제목을 써 둔 자기 메모를 접었다.
“존재부터 확인하겠습니다.”
다온이 그 말을 듣고 가람을 봤다. 둘은 언제나 같은 편이었지만 속도는 달랐다. 가람은 위험이 현재 진행 중이면 하루라도 빨리 좁은 정지명령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온은 틀린 위치를 파헤치거나 다른 배관을 건드리면 현재 위험만 커진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차이는 법정에서보다 현장에서 더 크게 들렸다.
레이더를 운용하는 기술자가 두 번째 주행을 했다. 선은 같은 위치에 다시 나타났지만 중간에 짧은 공백이 있었다. 만석은 그 공백을 가리켰다.
“여기서 끊겼다는 겁니까?”
“신호가 약해진 구간입니다. 관이 끊겼는지, 위의 자갈층 때문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기술자가 말했다.
“모르겠다는 말이 참 편하네요.”
“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삽을 뜨면 누군가 그 땅 아래로 들어가야 하니까요.”
기술자는 공장 담장 바로 안쪽의 가동배관 위치를 표시했다. 반사선과 가까웠다. 세희가 작업구역 자료를 가져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밤새 잠들지 못한 피곤이 남아 있었다. 환경관리자로서 자신이 알던 P-17은 문서상 폐쇄돼 있었다. 그런데 레이더가 보여 준 길은 도면 바깥에서 계속됐다.
“저 구간은 설비팀이 정확한 위치를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배세희가 말했다. “제 기록만으로 안전거리 못 잡아요.”
가람은 세희가 표시한 곳에 펜을 대지 않았다. 오늘 신청서에 넣으면 빠를 것 같았던 지점이었다. 설비팀 확인을 기다리는 동안 만석의 시선이 그의 손에 머물렀다. 가람은 펜을 접었다. 오늘 빈칸을 넘기면 내일 그 아래에 사람이 들어가야 했다.
법원 차량에서 안주원 재판장이 내렸다. 그는 레이더 화면보다 먼저 울타리와 사람의 위치를 봤다. 현장검증이 시작되면 회사 직원과 어민, 조사 인력이 같은 좁은 통로에 모인다. 그 안에서 누구 하나 다치면 물증은 법정에 도착하기도 전에 비용이 된다.
“오늘 명령 범위는 지표탐사입니다.” 주원이 말했다. “시험굴착은 작업계획을 보고 따로 정하겠습니다. 양쪽이 원하는 지점은 표시해 두세요.”
만석이 바로 반박했다. “배관이 있으면 파서 보자는 것 아닙니까? 또 한 주 기다리면 갯벌은 한 주 더 죽어요.”
“그래서 필요한 범위는 빨리 보겠습니다.” 주원이 답했다. “가동관 위치가 불명확한 곳을 오늘 기분으로 파지는 않겠습니다.”
공장 측은 울타리 바깥 한 곳만 보자고 했다. 만석은 선 전체를 따라 열 군데를 요구했다. 세희는 가동배관 근처에 탐지 간섭이 적은 지점 셋을 표시했다. 다온은 그중 하나를 하류의 회색 띠와 가장 가까운 곳으로 옮겼다. 반사선이 지하에서 이어져도 지표의 물길과 닿지 않는다면 니켈의 경로라고 단정할 수 없다. 반대로 젖은 토양과 관의 물질이 맞으면 다음 질문이 선명해진다.
“셋이면 부족해요.” 만석이 말했다.
“열 군데는 사람도 열 번 위험하게 해요.” 세희가 대답했다.
둘의 말 사이에 조카가 있었다. 만석은 안전모 쓴 노동자들을 다시 보았다. 자신이 배를 못 띄우는 동안 저들은 아직 공장으로 들어간다. 아침에 조카가 손을 들었을 때 그는 못 본 척했었다. 이제 불러 위험한 땅을 대신 파라고 할 수는 없었다. 열 군데를 표시하려 들었던 펜을 움켜쥐자 손톱 밑으로 흙이 눌렸다.
점심 무렵 작은 배 한 척이 멀리서 들어왔다. 만석의 이웃 어민 재문이었다. 그는 회관 표결에서 반대했다고 소문이 난 사람이다. 배에 실은 것은 조개가 아니라 플라스틱 통과 젖은 장갑이었다. 만석이 물었다.
“어디 다녀왔어?”
“바깥 조업선. 살아 있는 것 있는지 보고 왔지.”
“어땠어?”
재문은 통 뚜껑을 열지 않았다. “그건 분석하는 사람한테 보여 줄 거야. 어제 표를 반대로 찍었다고 내 눈을 버릴 생각은 없으니까.”
잠시 뒤 들물이 예상보다 빨리 들어왔다. 첫 번째 표시말뚝 아래의 마른 모래가 젖으며 줄이 느슨해졌다. 기술자가 화면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말뚝이 움직였습니다.”
만석이 장화를 신고 내려가려 하자 다온이 막았다. 물은 아직 얕았지만 그 아래에는 배관도, 작업용 선도 있었다. 측량 기준이 흔들리면 첫 주행과 두 번째 주행을 같은 위치라고 부를 수 없었다. 기술자는 고정된 담장 모서리를 기준으로 다시 위치를 확인했다. 말뚝은 사람 발 하나만큼 바다 쪽으로 밀려 있었다.
“한 발이 이렇게 큰 차이예요?” 재문이 물었다.
“깊이를 볼 때는 큽니다.” 기술자가 답했다. “특히 다른 관하고 가까울수록요.”
만석은 자신이 해마다 어장 경계를 잡던 방법을 떠올렸다. 바다에서는 깃발이 밀려도 멀리 있는 등대와 산의 어깨를 보고 다시 선을 찾았다. 그는 기술자에게 방파제 끝의 흰 표지를 가리켰다. 측량 기준으로 쓰기에는 멀었지만, 오늘 물이 닿는 높이를 설명하는 데는 도움이 됐다. 다온은 그 말을 현장 메모에 따로 적었다. 어민의 눈은 레이더를 대신하지 않았고, 레이더도 어민이 아는 들물의 속도를 대신하지 않았다.
줄을 다시 팽팽하게 매는 동안 재문의 통은 그늘로 옮겨졌다. 다온은 정식 채취병과 섞이지 않도록 통에 ‘참고자료’라는 표시를 붙였다. 재문이 그 글자를 보고 기분이 상한 듯 물었다. “내가 잡아 온 건 가짜예요?”
“아뇨. 어떻게 채취했는지 제 방법과 달라서, 나란히 놓되 같은 숫자로 합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당신이 본 위치는 다음 채취지점에 반영하겠습니다.”
재문은 더 묻지 않았다. 만석은 그가 통을 다시 가져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오늘 회관 표결의 반대표가 마을 밖으로 나간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온이 통의 위치와 채취방법을 물었다. 재문은 자기 배의 항해기록과 채취시각을 줬다. 공식 시료로 곧바로 합칠 수 없더라도, 오늘 추가로 볼 지점에는 도움이 됐다. 만석은 재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 적당한 자리를 찾지 못했다. 대신 통을 실은 배가 부두에 닿도록 줄을 잡았다.
오후에는 현장검증 계획을 두고 짧은 법정 협의가 열렸다. 공장 측은 지하탐사의 반사선이 실제 관이 아닌 옛 콘크리트 기초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가람은 P-17이 과거 목록에 있다는 점을 들어 세 지점 시험굴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다온은 양쪽 주장 모두에 한 문장씩 붙였다. 반사선만으로 물질을 알 수 없지만, 그 불확실성을 끝내려면 제한된 굴착이 유용하다는 문장이었다.
주원은 작업반경, 가동배관 확인, 중단조건을 서면으로 받은 뒤 굴착 허용 여부를 정하겠다고 했다. 만석은 장화를 갈아 신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바로 흙을 볼 줄 알고 가져온 것이었다. 가람은 흙 묻은 발로 복도를 걷는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제가 아까 그 선을 누출관이라고 썼어요.” 가람이 말했다. “다온이 말리지 않았으면 그렇게 제출했을 겁니다.”
“그랬으면 우리한테 유리했을 텐데.”
“오늘은 그럴 수 있었겠죠. 다음에 관이 비어 있으면 우리 말 전체가 약해집니다.”
만석은 바다 쪽을 봤다. 그는 변호사가 강하게 말해 주기를 원했다. 동시에 재문이 가져온 통을 ‘분석 전’이라고 적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럼 셋을 파요. 꼭 필요한 곳 셋.”
저녁에 안전계획을 만들기 위해 작업반이 다시 레이더 화면을 열었다. 중간 후보지의 지표는 마른 흙처럼 보였다. 하지만 금속탐침을 세우려는 기술자가 장갑 끝에 반짝이는 습기를 발견했다. 토양가스가 아니라 금속빛이 섞인 축축한 줄이었다. 누군가 그 자리를 물로 씻은 흔적은 없었다.
다온은 고개를 숙여 보기만 하고 손을 대지 않았다. “내일 작업 전에 표면시료를 따로 보전합시다. 이게 아래 관에서 온 것인지도 아직 몰라요.”
만석이 선 옆에 서서 말했다. “그래도 땅이 말을 하네요.”
“말이 아니라 자국이요.” 다온이 답했다. “우리가 잘못 듣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더 조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