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트랙은 비어 있다
해머 아래 세 자리 수
폐기 스티커는 피아노의 검은 옆구리에 붙어 있었다.
폐기 스티커는 피아노의 검은 옆구리에 붙어 있었다.
붉은 사선 아래 적힌 반출 시각은 정오. 한이솔이 화영방송국 악기창고에 도착했을 때 벽시계는 열 시 십일 분을 지나고 있었다. 창고 셔터 밖에서는 지게차가 후진 경고음을 토했다. 짧고 높은 전자음이 콘크리트 벽을 두 번 튕겨 돌아왔다.
업라이트피아노는 철제 악보대와 접이식 의자 사이에 끼어 있었다. 덮개 위 먼지는 손바닥으로 쓸어 낸 듯 가운데만 희었고, 바퀴 한쪽에는 노란 운반끈이 걸려 있었다. 전날 자산 사진에서 본 번호표도 그대로였다.
P47-314.
“사진 속 물건은 맞습니다.”
민혜주가 자산카드를 내밀었다. 카드에는 ‘화영방송국 제2연습실 업라이트’라고 적혀 있었다. 취득 연도와 제작번호, 마지막 조율일 아래에 폐기 승인 도장이 세 개 찍혀 있었다.
“반출업체가 열한 시 반에 들어와요. 조사 때문에 멈춘다는 공문은 받았는데, 자산팀장은 현장에서 가치 없으면 그대로 내보내겠답니다.”
이솔은 피아노에 손대지 않고 둘레부터 돌았다. 뒷판은 벽과 손 하나 들어갈 만큼 떨어져 있었다. 마른 목재 냄새와 오래된 펠트 냄새, 기계유의 단내가 희미하게 섞여 났다. 바닥에는 네 바퀴가 눌러 만든 회색 원이 있었다. 최근에 움직인 흔적은 노란 끈이 끌린 반달뿐이었다.
“백정호 선생님은요?”
“안에서 기다립니다.”
낮은 목소리가 피아노 뒤에서 들렸다.
“기다리는 게 아니라, 저걸 누가 쓰레기라고 부르는지 듣고 있었지.”
백정호는 조율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손잡이가 반질반질 닳은 가죽가방이었다. 그는 일흔이 가까워 보였지만 이솔보다 먼저 피아노 바퀴와 페달 아래를 훑었다. 건반 덮개 쪽으로 손을 뻗다가 이솔의 시선을 보고 멈췄다.
“안 누릅니다. 소리가 나는지 궁금한 게 아니오.”
“저도 압니다.”
“표정은 모르는 표정인데.”
최노을이 장비 상자를 작업대에 올렸다. “두 분, 피아노랑 기 싸움 그만. 앞판 열기 전에 바퀴부터 봐요.”
노을이 짧게 상태를 불러 주는 동안 이솔은 운반끈과 바닥의 반달 자국을 찍었다. 노란 끈을 풀자 먼지가 묻은 매듭이 손바닥 안에서 바스락거렸다. 이솔은 인계받을 혜주에게 끈을 건넸다. 혜주가 빈 받침을 가져올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매듭보다 풀고 난 끈을 어디에 두느냐가 오늘 두 사람을 더 오래 붙잡았다.
그때 자산팀장과 작업복 차림의 남자 둘이 셔터를 밀고 들어왔다.
“공문에는 확인 후 반출이라고 돼 있습니다.” 자산팀장이 말했다. “피아노 중고가는 운송비보다 낮아요. 안쪽 카드 하나 보자고 일정을 또 미룰 수는 없습니다.”
혜주가 대답하려 하자 이솔이 먼저 자산 사진을 펼쳤다. “중고가를 다시 매기러 온 게 아닙니다. 이 피아노의 조율카드 번호가 원반 이동 조사에서 나온 반환 목록과 같습니다.”
“번호가 같으면 카드만 빼 가세요.”
백정호가 코로 숨을 내쉬었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뭘 빼 갑니까.”
“앞판 열고 찾으면 되잖아요.”
“찾겠다고 망치면, 찾은 게 원래 거기 있었는지부터 시비가 붙지.”
팀장은 벽시계를 보았다. “열한 시까지 결론 주세요. 그 뒤에는 업체 대기료가 붙습니다.”
셔터가 닫히자 경고음도 한 겹 멀어졌다. 이솔은 폐기 스티커와 시계를 한 화면에 넣었다. 혜주는 조건부 보존서의 비용 부담 칸을 채우다가 이솔에게 내밀었다. 오늘 서명을 하지 않으면 정오의 반출이 남고, 서명을 하면 아무 관련도 없는 악기일 때의 비용도 자기들이 맡았다. 이솔은 기간 칸부터 읽었다. 칠 일. 그 안에 되돌려 놓을 수 있는 작업만 하자고 말하고 자기 이름을 적었다. 노을은 앞판을 받칠 자리를 비우며 이제 시간이 실제로 줄고 있다고 했다.
노을이 앞판 상단의 고정 방식을 살폈다. 나사는 없었다. 양쪽 홈에 끼운 판을 위로 조금 들어 올리면 빠지는 구조였다. 백정호가 손을 씻고 새 면장갑을 꼈다.
“왼쪽이 먼저 들리면 오른쪽 모서리가 해머에 닿습니다.” 그가 말했다. “같이 올려야 해요.”
이솔과 노을이 양쪽에서 받쳤다. 백정호가 가운데를 잡았다. 판이 홈에서 빠질 때, 마른 나무가 오래 맞물려 있다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똑, 하고 작은 소리였다. 세 사람은 동시에 멈췄다.
“파손 아닙니다.” 노을이 홈을 확대해 보았다. “눌려 있던 먼지가 떨어졌어요.”
앞판을 받침대에 세우자 황갈색 해머들이 드러났다. 여든여덟 개가 줄지어 있었지만 색은 같지 않았다. 가운데 음역의 펠트는 깊게 눌렸고 양끝은 비교적 둥글었다. 몇몇 해머에는 현이 지나간 세 줄 자국이 손톱으로 그은 듯 남아 있었다.
이솔의 귀에 47초 캡처 속 의자 마찰이 떠올랐다. 가죽이 한쪽으로 비틀리던 소리. 하지만 같은 종류의 의자와 피아노였다는 이유로 이 악기에서 난 소리라고 적을 수는 없었다.
“건반을 누르면 해머 순서를 볼 수 있습니까?” 혜주가 물었다.
“볼 수는 있지.” 백정호가 대답했다. “대신 오늘 누른 자국도 보태게 되겠지.”
이솔은 말했다. “누르지 않겠습니다. 현재 위치로 먼저 찍죠.”
노을은 해머 아래에 긴 눈금자를 놓고 카메라를 천천히 옮겼다. 셔터가 열릴 때마다 황갈색 펠트가 한 줄씩 화면에 붙들렸다. 이솔은 가운데 음역의 깊은 홈을 보며 수인이 마지막 세 박자를 거듭 연습했다는 박선호의 악보를 떠올렸다. 손가락이 내려앉고, 나무가 밀고, 펠트가 현을 때리는 순서. 그러나 이 피아노가 그 손을 받았다는 증거는 없었다. 이솔은 입안에 올라온 이름을 삼켰다.
백정호는 액션 레일 오른쪽 끝을 가리켰다. “조율카드는 대개 이쪽에 끼우거나, 덮개 안에 붙여 둡니다.”
얇은 황동 집게가 있었지만 종이는 없었다. 집게 아래 먼지는 주변보다 옅었다. 누군가 카드를 뺀 시점을 알려 주지는 못해도, 종이가 오래 끼워져 있었던 모양은 남아 있었다.
“카드는 사라졌네요.” 혜주가 말했다.
“아직 안쪽을 안 봤습니다.”
백정호가 손전등을 낮춰 비췄다. 레일 앞면에는 제작사 각인과 부품번호가 있었다. 영문과 여섯 자리 숫자가 단정한 기계 글씨로 찍혀 있었다. 그 아래, 먼지와 흑연이 섞인 회색 면에 다른 선 하나가 비쳤다.
이솔은 몸을 숙였지만 손전등을 더 가까이 대지 않았다. “조명만 왼쪽으로 옮겨 주세요.”
사광이 지나가자 눌린 자국이 떠올랐다.
314.
세 숫자는 제작사 각인보다 작고 삐뚤었다. 1의 윗부분은 해머 받침에 가려져 있었고, 4의 세로획에는 흑연 가루가 조금 남아 있었다.
혜주가 자산카드를 내려다보았다. “P47-314.”
“끝 세 자리가 겹치네요.” 이솔이 말했다. “혜주 씨, 두 항목은 나란히만 적어 주세요.”
백정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누가 부품번호를 잘못 옮긴 건 아니오. 제작번호는 저 위에 따로 있잖소.”
“부품번호는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소. 피아노를 쉰 해 만졌는데 그 구별도 못 할까.” 백정호가 4의 세로획을 눈으로 더듬었다. “젊을 때는 이런 연필자국 하나로 밤 기차를 타기도 했소. 어느 학교 몇 번째 피아노가 갑자기 죽었다고 전보가 오면, 종이에 적힌 숫자만 들고 찾아갔지.”
이솔은 그 말 속에서 허세보다 오래된 피로를 들었다. “그때 숫자를 어떻게 읽었는지 보여 주세요.”
백정호는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가방에서 가는 검사용 거울을 꺼냈다. 노을이 손으로 막았다.
“접촉 도구는 촬영 뒤에요.”
노을은 거울을 받아 옆에 내려놓았다. “먼저 빛으로 봐요. 손은 나중.”
사광을 바꾸자 4의 획 끝에서 연필심이 한 번 부러진 자국이 드러났다. 백정호가 아주 작게 혀를 찼다. 그는 그 소리를 숨기려는 듯 가방의 금속 잠금쇠를 만지작거렸다.
“아는 손입니까?” 이솔이 물었다.
“손까지 안다고 하면 늙은이가 거짓말하는 거요.” 그가 말했다. “다만 급하게 쓴 글씨는 아니야. 한 번 멈추고 다시 눌렀소.”
자산팀장이 다시 들어왔을 때는 열한 시가 삼 분 남아 있었다.
“숫자 하나 찾은 겁니까?”
“손글씨 세 자리와 오래 종이가 끼워져 있던 자리를 찾았습니다.” 이솔이 말했다. “오늘 내보내면 둘의 관계를 다시 볼 수 없습니다.”
“피아노 한 대를 언제까지 잡겠다는 거죠?”
혜주가 준비해 둔 조건부 보존서를 내밀었다. “우선 칠 일입니다. 조사팀이 보존 사유와 비용을 공동 서명하고, 연주나 임의 분해는 금지합니다. 관련성이 없으면 기존 절차로 돌립니다.”
팀장은 백정호를 보았다. “부품을 빼야 한다면서요?”
“액션은 원래 정비할 때 통째로 드나드는 구조요. 하지만 들어 올리기 전에 여든여덟 해머와 나사 위치를 다 남겨야 합니다. 다시 끼웠을 때 달라진 게 없어야 하고.”
“오늘 안에 가능합니까?”
노을이 대답했다. “원상 복구까지 포함하면 가능합니다. 반출은 보류해 주세요.”
팀장은 업체에 전화를 걸러 나갔다. 셔터 밖에서 억눌린 말소리가 이어졌다. 잠시 뒤 지게차의 경고음이 멀어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피아노 앞에 남은 사람들은 아무도 안도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액션을 들어 올리는 일은 앞판을 여는 것보다 오래 걸렸다. 노을이 브래킷 위치를 잡아 주고 백정호가 좌우 레버를 풀었다. 나무와 금속이 동시에 움직이자 해머들이 바람 없는 곳에서 아주 조금 떨었다. 서로 부딪치지는 않았지만 펠트가 공기를 미는 소리가 났다. 빗자루로 비단을 쓸 때처럼 낮고 부드러운 소리였다.
백정호는 그 소리를 듣고 잠깐 눈을 감았다. “예전에는 새벽 조율을 많이 했소. 방송 시작 전에 끝내야 했으니까. 텅 빈 스튜디오에서 액션을 빼면 꼭 비가 오는 것처럼 들렸지.”
“그때도 이 피아노를 보셨습니까?”
“모르오. 그때는 피아노가 너무 많았고, 나는 너무 젊었어.” 그는 웃지 않았다. “그래서 모르는 걸 안다고 하지는 않겠소.”
“무겁습니다.” 백정호가 말했다. “한쪽 먼저 들지 마시오.”
세 사람이 액션을 수평으로 받쳐 이동식 작업대에 놓았다. 레일 뒤편은 앞보다 먼지가 짙었다. 손전등을 비스듬히 대자 314의 반대쪽으로 더 가는 선들이 이어져 있었다.
3과 1 사이에 점 하나. 1과 4 사이에 점 둘. 4 뒤에는 점 세 개와 짧은 세로선.
점들은 우연히 튄 흑연처럼 둥글지 않았다. 각각 같은 높이에 눌려 있었고, 마지막 세로선은 숫자보다 얕았다. 그러나 어떤 뜻인지 말해 주는 표제도, 단위도 없었다.
백정호의 손이 작업대 가장자리에서 굳었다.
“이건 번호만 적은 게 아닌데.”
“무엇처럼 보입니까?” 혜주가 물었다.
그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가방 속 조율망치와 눈앞의 표식을 번갈아 보았다.
“내가 아는 표시와 닮았소. 닮았다는 데까지만 쓰시오.”
이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비교 자료를 가져오실 수 있습니까?”
“종이를 찾아봐야지. 기억만 들고 오면 당신이 안 믿을 테니까.”
백정호는 가방을 닫으려다 멈췄다. “못 찾으면 못 찾았다고 전화를 하겠소.”
이솔은 314 옆의 점과 세로선을 확대했다. “그래도 오세요. 오늘 어느 자리에서 닮았다고 보셨는지 같이 다시 보면 됩니다.”
백정호가 비로소 가방의 잠금쇠를 닫았다. 칠 일이라는 기간 안에 그에게도 하루의 약속이 생겼다.
백정호는 한참 뒤에야 시선을 거뒀다. 노을은 액션을 되끼우기 전 뒤편 전체를 격자로 촬영했다. 피아노는 그날 한 음도 내지 않았다.
그런데 작업대 위 사진에는 숫자보다 더 성가신 침묵이 남았다. 세 점과 한 줄이 314를 끊어 읽으라고 요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보이는 모양과 그 뜻 사이에는 아직, 건반 하나만큼도 건너가지 않은 거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