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판 위 다섯 센티
점수판 앞의 복기
벽에 붙인 점수판 사진은 생각보다 작았다. 육 대 칠. 소라온은 그 아래 놓인 자기 이름을 보다가 종이의 들뜬 모서리를 눌렀다. 사진을 평평하게 만든다고 숫자는 달라지지 않았다. 복기실 문 밖에서는 폐회식 의자를 접는 소리가 났다.
벽에 붙인 점수판 사진은 생각보다 작았다. 육 대 칠. 소라온은 그 아래 놓인 자기 이름을 보다가 종이의 들뜬 모서리를 눌렀다. 사진을 평평하게 만든다고 숫자는 달라지지 않았다. 복기실 문 밖에서는 폐회식 의자를 접는 소리가 났다.
테이블에 메달은 없었다. 오미란이 마지막 엔드 샷차트와 호출 녹음을 준비했다. 윤혜주는 전술판 옆에 앉았고 김단비는 자리를 골랐다가 다시 옮겼다. 라온 정면에서는 그가 무슨 표정을 짓는지 너무 잘 보였던 모양이었다. 배진수는 아직 녹음을 재생하지 않았다.
한강팀 정태문이 문을 두드렸다. 미란에게 요청받은 참관자였다. 그는 자기 팀의 경기 장면을 설명하러 왔지, 라온에게 벌을 주러 온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라온은 그가 의자를 놓는 작은 소리에도 어깨를 움츠렸다. 첫 경기에서 자신에게 좋은 말을 해 주었던 상대가 오늘은 이 방에 앉아 있었다.
“제가 먼저 말하겠습니다.”
라온이 입을 열었다. 종이에 써 온 문장은 세 줄이었다. 첫 줄을 읽고 나니 둘째 줄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는 말까지는 쉬웠다. 왜 그 잘못을 골랐는지를 사람들 앞에서 풀어놓으려니, 다른 사람처럼 쓰고 싶어졌다.
“단비 씨 돌 뒤에 더블 각이 생겼습니다. 그게 먼저 보였습니다.”
단비가 차트의 마지막 전 돌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라온은 거기서 자기 돌까지 선을 그었다. 강하게 맞히면 빨간 두 돌이 같이 움직일 것 같았던 각이었다. 그림에서는 지금도 선이 매끈했다. 실제 돌이 첫 돌을 너무 두껍게 맞힌 순간은 이 선 한 줄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다음에는요?” 혜주가 물었다.
“두 점을 따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점으로도 이겼어요.”
라온이 고개를 들었다. 진수의 목소리는 낮았다. 그는 드로 경로를 지우지 않은 채 더블 선 옆에 남겨 두었다. 라온은 같은 종이 안의 두 선을 보았다. 한 점으로 이긴다는 것을 모른 것은 아니었다. 두 점으로 이기고 싶었다. 둘 사이의 차이를 얼음 위에서는 작게 만들었고, 지금은 작게 말하려고 했다.
“제가 이기게 했다는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
단비가 몸을 뒤로 물렸다. 혜주는 뚜껑이 닫힌 펜을 굴렸다. 라온은 그 움직임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답을 찾으려다가 그만뒀다. 자신이 증명하고 싶었다는 말도 그들에게는 이미 결과와 함께 도착한 말이었다.
진수가 녹음을 틀었다. 방 안에 차가운 경기장의 울림이 들어왔다.
‘드로 한 점입니다. 시간도 있고 길도 열렸어요. 호출대로 놓으세요.’
라온은 목 뒤를 만졌다. 기억 속에서는 저 말이 조금 더 멀리 들렸다. 스틱이 움직인 뒤에 들었거나, 두 사람이 동시에 말해서 놓쳤다고 말할 틈이 없었다. 녹음에는 진수의 문장 끝과 라온이 움직이기 전의 빈 시간이 분명하게 남았다.
혜주가 그 시간에 표시를 했다. “여기서 더블을 제안할 수 있었죠?”
“네.”
“그런데 안 했고요.”
“확인하면 안 된다는 답을 들을 것 같았습니다.”
라온은 말해 놓고 입술을 다물었다. 방 안에서 가장 싫은 문장이 자기 입으로 나왔다. 진수가 단호해서 말하지 못했다고 돌려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수가 듣지 않는다는 것을 시험하기도 전에, 자신은 듣기 싫은 답을 피했다.
정태문이 차트 앞에 왔다. 그는 라온이 그린 더블 선을 건드리지 않고 안전 드로 쪽을 짚었다.
“상대 자리에서는 이 길이 남은 게 보였습니다. 저희는 더블을 기다린 게 아닙니다. 그 드로가 들어오면 한 점을 줘야 한다고 봤어요.”
라온은 상대가 일부러 유혹한 덫처럼 느꼈던 각을 다시 봤다. 정태문은 상대 두 돌 사이의 거리와 가드의 열린 면을 설명했다. 그 두 돌이 자기 스톤 하나를 기다리며 이상하게 맞물려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승리를 크게 보이게 할 길을 골라서 보고 있었다.
“저 각, 잘 맞으면 두 개는 움직였을 겁니다.”
정태문이 덧붙였다. 단비가 고개를 들었다. 라온도 그를 봤다. 좋은 각이 아니었다는 말로만 덮였으면 조금 편했을 것이다. 좋은 기회처럼 보이는 것과 그 기회를 혼자 선택해도 되는 것은 다른 문제로 남았다.
미란이 기록표를 앞으로 밀었다. 그 각도의 더블 성공률은 십팔 퍼센트, 안전 드로는 칠십일 퍼센트였다. 라온은 두 수치를 입으로 읽었다. 더블의 성공 장면은 잘 기억났지만, 같은 각에서 실패한 돌들이 숫자를 만들었다는 것을 떠올리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그 샷이 들어갔으면요?” 단비가 물었다.
라온이 대답하기 전에 진수가 말했다.
“그 샷이 들어갔어도 같은 질문을 했을 겁니다. 왜 우리 셋의 판단을 건너뛰었습니까?”
단비는 진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지만, 곧 라온 쪽으로 다시 돌아왔다.
“저도 준결승에서는 남았으니까 됐다고 생각한 순간이 있어요. 결과만 보고 라온 씨가 맞았다고 하려 했고요.”
그녀는 자기 말에 웃지 않았다. 라온이 그 말을 나누어 짊어져도 된다는 허락처럼 받아들이려 하자, 단비가 먼저 마지막 전 돌을 가리켰다.
“그래도 오늘 이 돌은 제가 던진 거예요. 그 뒤를 어떻게 만들지는 같이 고르고 싶었습니다.”
라온은 종이에 써 온 사과를 접었다. 자신이 팀원의 선택을 빼앗았다는 문장을 읽는 것보다, 단비가 자기 돌의 뒤를 가리키는 것을 보는 편이 더 아팠다. 결승의 투구 순서는 경기 시작 전에 정해 두었다. 마지막 손을 맡았다는 이유로 앞의 세 사람을 지워 버릴 수는 없었다.
“증명하고 싶은 마음을 전술처럼 포장했습니다.”
라온은 진수와 혜주, 단비를 차례로 보았다.
“다음에는 대안을 말하겠습니다. 성공률을 확인하고, 확정을 기다리겠습니다.”
진수가 빈 종이를 당겼다. 라온은 그의 손이 자기 쪽에서 멀어질까 봐 종이를 놓지 못했다. 진수가 펜을 앞에 놓았다.
“말할 대안은 들을 겁니다. 제가 먼저 닫아 버리면 그때도 말하세요. 하지만 확정 전에 다른 돌을 던지면 같이 갈 수 없습니다.”
혜주가 그 종이의 세 빈 줄을 짚었다. 라온은 대안 제안, 성공률 확인, 스킵 확정을 적었다. 한 줄을 적을 때마다 곁의 빈칸도 보였다. 어디까지 제안이고 어디서 답을 받는지 정해 두지 않으면, 다음에는 자신이 말했으니 됐다고 할 수도 있었다.
단비가 펜을 받아 들었다. “저도요. 빨리 던지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녀는 자기 이름을 적고 진수에게 넘겼다. 진수는 스킵 칸만 서명하는 대신 선수의 빈 줄에 이름을 썼다. 혜주가 마지막으로 날짜를 넣었다.
미란은 다음 엔드에 벤치로 물러나는 조건을 말했다. 특정 선수에게만 걸리는 벌이 아니었다. 대회에서 허용하는 교체 절차와 출전 인원을 갖춰야 실제 교체할 수 있다는 말도 붙었다. 라온은 자신만 빠지면 되는 단순한 그림을 떠올렸지만, 한 명이 그 자리를 비우면 나머지 셋도 그 엔드의 훈련을 잃을 수 있었다.
“오늘 약속한다고 다음에 저를 믿으실 수 있습니까?”
그가 물었다. 진수는 금방 그렇다고 하지 않았다.
“다음 돌에서 확인하겠습니다.”
그 답이 라온을 이 방에 남겼다. 미리 받아 놓는 용서는 없었지만, 다음 돌은 있었다. 그는 종이 아래 자기 이름을 다시 보았다. 사인을 한 손이 조금 떨렸다. 떨림을 멎게 하려고 이름을 한 번 더 긋지는 않았다.
녹음이 끝나자 문 밖의 소리가 크게 들렸다. 참가자 하나가 복기실 문을 열어도 되는지 묻고는 정태문 뒤에 앉았다. 라온은 다시 처음부터 말해야 할 것 같아 숨을 들이켰다. 미란이 마지막 엔드 차트를 돌려 주었다. 그는 첫 선부터 가리켰다. 새로 들어온 사람 앞에서도 수치와 호출을 바꾸지 않았다.
“첫 돌을 두껍게 맞혔고, 상대 하나만 밀었습니다. 제 돌은 하우스 밖으로 나갔습니다. 상대 한 점이 남아서 육 대 칠로 졌습니다.”
입으로 결과를 끝까지 말하고 나니 더는 점수판 모서리를 누르고 싶지 않았다. 라온은 차트를 내려놓았다. 정태문이 조용히 인사를 하고 나갔다. 문은 평소와 같은 속도로 닫혔다. 그가 라온을 특별히 용서하는 말도, 앞으로 잘하라는 말도 남기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혜주가 다음 달 훈련표를 꺼냈다. 미란은 네 사람에게 참가 의사를 다시 물었다. 진수는 계속하겠다고 했다. 혜주도 같은 답을 했고, 단비는 잠깐 라온을 보다가 자신의 칸에 동그라미를 쳤다. 라온은 마지막으로 펜을 들었다. 팀 안에 남고 싶다는 말을 쓰는 데는 길이가 필요 없었다.
그런데 요일 칸으로 넘어가자 펜들이 멈췄다. 혜주의 근무가 확정되지 않은 주가 있었다. 진수는 인쇄 마감과 아버지 귀가 시간을 확인해야 했다. 단비가 가능한 오후와 다른 사람이 가능한 저녁은 한 칸 안에서 겹치지 않았다. 라온도 수리 접수와 부품상 마감 사이를 비워 두었다. 빈칸은 절반을 넘었다.
“화요일은 우선 잡아 둔 대관이 있죠?”
미란의 말에 단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약속을 확인할 첫 시간이 그 칸이었다. 혜주는 휴대전화로 근무표를 열었고 진수는 먼저 출근표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라온은 가능하다는 답을 서둘러 넣지 않았다. 자기 생활을 줄 한 칸으로 만드는 일도 다음 돌을 놓는 일만큼 정확해야 할 것 같았다.
단비가 종이를 묶으며 말했다. “넷이 와야 그다음 돌을 볼 수 있어요.”
라온은 화요일 옆의 작은 빈칸을 봤다. 서명은 네 개였지만 시간은 아직 하나가 아니었다. 그는 전술판을 닫고 훈련표를 그대로 두었다. 복기실에서 챙겨 나가야 할 것은 잘못한 한 엔드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