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판 위 다섯 센티
밀지 말고 받쳐 주세요
라온이 일방적인 도움 대신 필요한 지원 방식을 직접 정하고 팀은 이동 경로와 지원 시간을 훈련표에 반영한다.
목요일 오후 다섯 시 사십육 분, 소라온은 재활체육관 앞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늦지 않았다. 문제는 가방이었다.
무릎 위에 얹은 검은 공구가방에는 수리를 마친 휴대용 라디오 세 대와 교체한 콘덴서 봉투, 고객에게 건넬 명세서가 들어 있었다. 라디오 주인은 체육관 근처 전파사 주인이었다. 훈련 전 가게에 들러 대금을 받으려 했지만, 주인은 시내 출장에서 돌아오는 중이라며 컬링장으로 가져다 달라고 했다.
라온은 버스 경사판을 내려온 뒤 가방 끈을 다시 조였다. 수리대금을 받아야 대관료를 낼 수 있었다. 가방을 무릎에서 떨어뜨리면 오늘 훈련도 같이 떨어지는 셈이었다.
체육관 자동문을 통과했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교통사고 손해조정을 맡은 류승후였다.
“지금 통화 괜찮습니까?”
“여섯 시 전까지만요.”
승후는 배달 플랫폼 운행내역을 내려받는 방법을 설명했다. 사고 전 석 달간 완료 건수와 취소 건수가 함께 보이는 원본 파일이 필요하다고 했다. 라온이 캡처 화면이면 되느냐고 묻자, 승후는 편집하지 않은 내려받기 파일과 발급 시각을 남겨 달라고 답했다.
“오늘 상담실로 오시면 같이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섯 시 반 예약밖에 비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훈련입니다.”
“그럼 내일 오전에 전화로 화면을 보면서 하죠. 급하다고 임의로 숫자를 옮겨 적지는 마세요.”
라온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시간을 봤다. 다섯 시 오십이 분. “내일 아홉 시에 전화 주세요.”
통화를 끊고 지하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리자 배진수가 안쪽에서 나왔다.
“늦는 줄 알았습니다.”
“안 늦었습니다.”
진수는 벽시계를 보았다. 시작까지 여덟 분이었다. “빙판 입구 경사로에 지금 장비 카트가 서 있어요. 돌아가면 오 분은 더 걸립니다.”
“지나갈 수 있습니다.”
라온은 가방을 한 손으로 누르고 의자를 굴렸다. 경사로 초입에는 스톤 손잡이와 공구함을 실은 낮은 카트가 벽 쪽 절반을 막고 있었다. 남은 폭은 생활용 의자가 겨우 지날 만큼이었다. 라온은 오른쪽 림을 짧게 밀어 방향을 틀었다.
뒤에서 진수가 다가오는 소리가 났다. “제가—”
말이 끝나기 전에 의자가 갑자기 앞으로 솟았다.
진수가 등받이 손잡이를 잡아 밀어 올린 것이다. 앞바퀴가 경사면에서 들리자 무릎 위 가방이 미끄러졌다. 라온이 팔꿈치로 막았지만 지퍼가 반쯤 열린 틈으로 라디오 한 대가 떨어졌다. 플라스틱 케이스가 바닥에 부딪히고, 뒤이어 작은 부품봉투와 종이들이 경사로 아래로 흩어졌다.
“손 떼요!”
라온의 고함이 복도에 울렸다. 진수는 즉시 손을 놓았고, 의자는 왼쪽으로 비틀렸다. 라온이 림을 움켜쥐어 벽에 부딪치기 직전에 멈췄다.
라디오에서는 켜지지 않은 채로도 안쪽 나사가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미안합니다. 좁아서 빨리 올리려고—”
“누가 빨리 올려 달랬습니까?”
“훈련 시작이 곧이라서요.”
“그래서 내 물건을 떨어뜨려도 됩니까?”
진수의 얼굴이 굳었다. “떨어뜨리려던 건 아닙니다.”
“밀려고 한 건 맞잖아요.”
라온은 경사로 아래로 굴러간 콘덴서 봉투를 보았다. 투명 비닐 안에서 작은 원통들이 제각각 섞여 있었다. 규격을 적은 종이딱지가 빠져 버리면 다시 하나씩 재야 했다. 라디오 주인이 도착해 망가진 물건을 보면 대금은커녕 수리비를 물어 달라고 할 수도 있었다.
“오늘 못 합니다.” 라온은 의자를 돌렸다. “이거 다시 점검해야 해요.”
그때 복도 끝 상담실에서 류승후가 나왔다. 다음 예약자를 기다리던 모양이었다. 그는 두 사람을 보고 달려오지 않고 경사로 위에 멈췄다.
“다친 곳 있습니까?”
“없습니다.”
“의자를 잡아도 됩니까?”
“아뇨. 종이부터 주워 주세요. 경사 아래에 있는 것만.”
승후는 고개를 끄덕이고 쭈그려 앉았다. 수리 명세서와 영수증을 한 장씩 모으되 순서를 바꾸지 않았다. 맨 위 종이에는 라디오 모델명과 수리 전 증상이 적혀 있었다.
“이건 작업 기록입니까?”
“네. 방금 떨어진 건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진수가 라디오를 집으려 하자 라온이 손바닥을 세웠다. “그건 두세요.”
진수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승후가 물었다. “어떤 도움은 괜찮습니까?”
라온은 숨을 고르며 경사로를 봤다. 카트, 오른쪽 벽, 무릎 위에서 기울어진 가방. “가방을 수평으로 들어 주세요. 의자는 제가 움직입니다.”
승후가 가방 양쪽 손잡이를 잡았다. 라온은 라디오를 다시 넣고 지퍼를 끝까지 잠갔다. 진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제가 가방을 들겠습니다.” 진수가 말했다.
“싫습니다.”
“알겠습니다.”
짧은 대답이 오히려 화를 건드렸다. 라온은 경사로를 내려가려 했다. 승후가 가방을 든 채 물었다.
“훈련을 그만두려는 이유가 물건 점검입니까, 방금 일 때문입니까?”
“둘 다요.”
“둘은 끝나는 시간이 다릅니다. 물건은 여기서 외관과 전원을 확인할 수 있고, 방금 일은 사과를 받아도 화가 바로 끝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진수가 입을 열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늦을까 봐 묻지 않고 밀었습니다. 안전하게 돕지도 못했고요.”
“그 사과 들으면 제가 바로 훈련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진수는 벽 쪽 카트를 끌어 통로를 넓혔다. “오늘 안 하셔도 됩니다.”
2번 시트 문이 열리고 오미란이 나왔다. 상황을 들은 그는 벽시계를 한 번 보고 말했다.
“여섯 시입니다. 훈련은 시작합니다.”
라온의 턱이 굳었다. “역시 지각 처리입니까?”
“아뇨. 라온 씨 첫 순서를 네 번째로 옮깁니다. 시작을 늦추지는 않고, 라디오를 확인할 시간은 드립니다. 못 던지겠으면 그때 말하세요.”
진수가 말했다. “제 때문에 생긴 일인데 제가 첫 순서를 빼겠습니다.”
“벌 세우는 시간이 아닙니다. 진수 씨는 원래 순서대로 던지고, 끝나면 이동 보조 규칙을 다시 씁니다.”
미란은 감정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는 말도, 팀을 위해 참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바뀐 순서만 확정하고 빙판으로 돌아갔다.
라온은 승후와 함께 로비 콘센트 옆으로 갔다. 라디오 케이스 모서리에는 얕은 흠집이 났지만 금은 없었다. 배터리를 빼고 흔들자 아까 들린 소리는 내부 나사가 아니라 배터리 덮개 스프링이었다. 안테나, 주파수 다이얼, 납땜부를 차례로 확인했다. 세 대 모두 전원과 수신이 정상이라고 명세서에 추가했다.
“사진도 남겨 두세요.” 승후가 말했다. “사고 배상 자료든 수리 일이든, 문제가 생긴 뒤 상태를 적는 습관은 같습니다.”
“뭐든 서류로 만들자는 말처럼 들리네요.”
“서류가 화를 대신하진 않습니다. 다만 나중에 화만 남아서 사실을 잃는 건 막아 줍니다.”
라온은 라디오의 흠집을 촬영했다. 그리고 내일 아홉 시 전화 상담을 달력에 넣었다.
빙판으로 돌아가니 세 번째 투구가 끝나고 있었다. 김단비가 라온의 빈 자리를 보며 말했다.
“오늘 안 오는 줄 알았어요.”
“그만둘까 했습니다.”
“그럼 참가비는요?”
“이미 냈으니까 아까워서 왔습니다.”
단비가 웃었다. “훌륭한 스포츠 정신이네요.”
라온은 웃지 못했지만 스틱은 받았다. 진수는 반대편 하우스에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손을 들었다가, 라온의 의자 쪽으로 오지 않고 그 자리에 멈췄다.
첫 투구는 중앙에서 왼쪽으로 흘렀다. 두 번째는 짧았다. 화가 손목에 남아 있어 스틱을 놓는 순간이 들쭉날쭉했다. 단비는 점수를 말하지 않고 시간만 불렀다.
“열다섯 둘.”
“다음은 열넷 팔.”
라온이 먼저 숫자를 말했다. 세 번째 돌은 하우스 앞에 섰다. 네 번째는 그보다 반 미터 길었다. 여섯 번째에는 노란 돌 두 개가 중앙 가드를 이루었다.
미란이 훈련 종료를 알렸다. “오늘 목표 여섯 개, 완료.”
진수가 빙판 입구에서 기다렸다. 경사로 앞에 도착하자 그는 양손을 자기 무릎에 올려 두고 물었다.
“무엇을 받치면 됩니까?”
라온은 한참 그를 보았다. 사과를 들었어도 떨어진 순간의 놀람은 남아 있었다. 남은 것을 없는 척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른쪽 가방만 들어 주세요. 경사로 끝까지. 의자에는 손대지 말고.”
“알겠습니다.”
진수는 가방을 들어 수평으로 유지했다. 라온이 림을 밀 때마다 반 걸음씩 속도를 맞췄다. 경사 중간에서 앞바퀴가 젖은 자국을 밟아 살짝 미끄러졌지만 그는 의자에 손을 뻗지 않았다.
정상에 오른 뒤 라온이 먼저 가방을 받았다.
“다음에도 먼저 물어보세요.”
“훈련표에 쓰겠습니다.”
“규칙으로 쓰기 전에 그냥 기억하면 안 됩니까?”
진수는 잠깐 당황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기억하겠습니다. 그래도 팀 규칙에도 쓰겠습니다. 제가 또 정시 핑계를 대지 않게.”
그때 전파사 주인이 헐레벌떡 로비로 들어왔다. 라디오 세 대를 하나씩 켜 보고는 수리대금을 건넸다. 모서리 흠집을 본 라온이 먼저 경위를 설명하자 주인은 소리가 멀쩡하면 됐다며 명세서에 인수 서명했다.
돈을 세어 보니 부품값과 오늘 대관료를 빼고도 버스비가 남았다. 큰돈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고 전 속도를 팔던 계정이 아니라 지금 손으로 번 돈이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승후에게 메시지가 왔다. 배달 플랫폼 운행기록 내려받기 항목이 여섯 줄로 정리돼 있었다.
라온은 내일 아침 알람을 맞췄다. 그 아래에는 오늘 투구 기록이 있었다. 가드 여섯 개 완료.
의자를 밀지 말라는 말은 거절로 끝나지 않았다. 무엇을 받쳐 달라고 말하는 데까지 가야 비로소 다음 동작이 생겼다. 라온은 가방을 무릎 위에 올리고 끈을 두 번 감았다. 이번에는 누군가 손대기 전에 자신이 원하는 위치를 먼저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