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 43미터의 종
명부에 없는 철 상자
명부에 없는 철 상자의 사진과 사라진 27분을 발견한 해솔과 우찬이 화물 기록과 생존자 기억을 분리해 확인한다.
세 번째 도시락은 손대지 않은 채 식어 있었다.
해솔은 사고대책실 복도에 놓인 상자를 지나쳤다가 돌아왔다. 뚜껑 위에 적힌 이름이 눈에 걸렸다. 지워진 이름 위에 다른 이름을 덧쓴 도시락이었다. 자리가 바뀌었거나, 돌아올 사람이 돌아오지 않았거나. 이곳에서는 그 두 가지가 같은 모양으로 남았다.
“먹을 거면 하나 가져가요.”
자원봉사자가 말했다. 해솔은 고맙다는 말 대신 고개를 숙였다. 청람호가 가라앉은 지 이틀째였다. 오전 교대가 끝난 뒤부터 속이 비어 있었지만 배고픔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젓가락을 뜯자 전화가 울렸다.
“영상 왔습니다.”
우찬이었다. 해솔은 밥을 한 숟갈 입에 넣고 일어났다. 씹지 못한 쌀알이 입천장에 붙었다.
***
선미를 비추던 화면이 잠시 멎었다.
흙빛 물속에서 녹색 모서리가 나타났다. 난간보다 안쪽, 어제 해솔의 선이 당겨졌던 문 가까이였다. 원격 카메라가 옆으로 이동하자 길쭉한 상자의 벽이 드러났다. 비스듬히 밀린 컨테이너가 화물창 출입문이 움직일 자리를 가로막고 있었다.
해솔은 저도 모르게 왼쪽 어깨를 만졌다.
“저겁니다.”
“어제도 봤습니까?”
“봤다고 할 수는 없어요. 저쪽에서 뭔가 움직였고, 시야가 사라졌습니다.”
그는 어젯밤 자신이 적은 보고서를 떠올렸다. 검은 면이라고만 썼다. 오늘 화면을 보고 어제의 기억까지 녹색으로 칠하고 싶지는 않았다.
카메라의 빛이 상자 옆면을 훑었다. 누군가 덧칠한 페인트가 갈라져 있었다. 틈 사이로 흰 곡선이 반쯤 나왔다. 선사 로고의 날개였다. 해솔은 복도 도시락 뚜껑의 겹쳐 쓴 이름이 생각났다. 지운 것이 오히려 시선을 붙드는 때가 있었다.
“이 자리는 비어 있어야 하는데.”
작업 담당자가 벽의 도면을 보며 말했다.
종이 속 청람호는 물에 잠기지도, 옆으로 기울지도 않았다. 반듯한 사각형마다 화물 번호가 적혀 있었다. 녹색 상자가 있어야 할 칸만 흰색이었다.
해솔은 모니터와 도면을 번갈아 보았다. 바다 밑의 상자가 잘못 놓여 있는 것인지, 종이 위의 빈칸이 잘못된 것인지. 그 차이를 알아내기 전에 누군가는 다시 저 문 앞까지 내려가야 했다.
***
류경문은 우산을 접으며 회의실에 들어왔다.
비는 조금 전에 그쳤다. 그의 구두에서는 물기가 보이지 않았다. 수행 직원이 의자를 빼 주려 하자 경문은 서 있는 채로 화면부터 보았다. 녹색 벽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의 눈썹이 움직였다.
“회송하는 빈 상자 같군요.”
“목록에는 없습니다.”
우찬이 말했다.
“배에 실린 것 전부를 화물로 잡지는 않아요. 우리 장비도 있고, 돌아오는 공용 상자도 있지.”
“그러면 그 장비 목록이나 회송 지시서를 보여 주십시오.”
경문이 직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직원은 가방에서 서류철을 꺼냈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났다. 뒤편에서 해솔이 의자를 당기다 말았다.
그들은 상자를 보고 놀라는 대신 상자를 부를 말을 찾고 있었다.
“마지막 수정본은 전산 문제로 바로 못 뽑습니다. 우선 보험사에 제출했던 사본이에요.”
경문이 펼친 적부도에도 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
“빈 상자면 치우고 안을 보면 되지 않습니까. 밖에서 사진만 찍으면 언제 끝나요?”
해솔이 고개를 들었다.
“누가 치웁니까?”
경문의 시선이 처음으로 그에게 왔다.
“그러려고 전문 인력이 와 있는 것 아닙니까.”
해솔은 반박하려다 입안에 남은 쌀알을 삼켰다. 배가 빈 공간처럼 그려져 있는 종이가 탁자 위에 있었다. 종이에서는 무엇을 들어내도 옆 칸이 흔들리지 않았다.
“안에 뭘 실었는지 아십니까?”
“비어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같다고 하셨습니다.”
경문이 우산 손잡이를 눌렀다.
해솔은 화면을 가리켰다. 상자의 아래쪽은 보이지 않았다. 문과 맞닿은 곳도 부유물에 가려졌다. 빈 상자라도 다른 화물을 받치고 있을 수 있었다. 들어 올리는 순간 무엇이 따라 움직일지 지금 영상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어제 저 아래에서 선이 걸렸습니다. 움직인 게 이 상자인지도 아직 모릅니다. 모르는 채로 사람부터 들여보낼 수는 없어요.”
“그 안에 사람이 있을 수도 있죠.”
말이 끝나자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해솔은 손톱이 손바닥에 닿을 만큼 주먹을 쥐었다. 자신이 가장 먼저 떠올렸던 말을, 저 사람은 자신을 움직이기 위해 쓰고 있었다. 그렇다고 틀린 말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저 문 너머에 누가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잠수감독이 해솔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수색은 다른 접근 구역에서 계속합니다. 이쪽 개입 여부는 구조 지휘에서 판단합니다. 지금 선주님께서 결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해솔은 주먹을 풀었다. 감독은 그를 보지 않았다. 그 덕분에 해솔도 앉을 수 있었다.
우찬이 사본을 자기 앞으로 당겼다.
“이것부터 확인하겠습니다. 제출하신 전자 파일도 같이 부탁드립니다.”
경문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창문을 보았다.
***
원격 영상은 반복될수록 낯설어졌다.
처음에는 상자만 보였고, 다음에는 문이 보였다. 세 번째에는 상자 뒤로 떨어져 나간 고정구가 보였다. 해솔은 그것이 침몰 전에 떨어졌는지, 바닥에 닿으며 부서졌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을 담당자에게 들었다.
알 수 없는 것이 하나씩 늘어났다.
그는 답답해서 복도로 나왔다. 난간 곁에 차미례가 서 있었다. 두 손으로 감싼 종이컵에서는 김이 나지 않았다.
“종은 아직 그대로요?”
“네.”
“아까 누가 상자 하나만 빼면 된다고 하던데.”
해솔은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회의실 문은 닫혀 있었지만 말은 벌써 문밖으로 나와 있었다.
“하나만 빼면 되는지 확인 중입니다.”
“그 확인은 얼마나 걸리고.”
해솔은 이번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미례는 고개를 돌려 바다가 보이지 않는 창밖을 보았다. 맞은편 청사 외벽에 빗물이 줄을 그었다.
“내가 재촉하면 자네가 내려가겠지.”
해솔이 미례를 보았다.
“내가 가라고 하는 게 아니오.”
그녀가 서둘러 덧붙였다. 그 말에는 미안함보다 두려움이 더 많았다. 기다리는 사람에게 남은 일이 누군가를 재촉하는 것뿐일 때, 재촉하지 않으려면 어디에 손을 놓아야 하는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해솔은 미례의 컵을 받았다.
“따뜻한 것으로 바꿔 드릴게요.”
그것밖에 해 줄 수 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돌아와 새 컵을 건넸을 때 미례는 다 마시지도 못한 찬물을 버린 것이 아까운 듯 빈 손을 한번 쥐었다 폈다.
***
우찬은 전자 파일과 출력물을 나란히 띄워 놓고 있었다.
“날짜가 뒤집혔네요.”
해솔이 화면을 보며 말했다. 파일 생성 시각은 출항 뒤였고, 종이의 승인 도장은 출항 전 날짜였다.
“다른 컴퓨터로 복사하거나 새로 저장해도 이 시각은 바뀔 수 있습니다.”
우찬은 파일을 닫지 않았다.
“문제는 왜 다르냐는 질문에 지금 아무도 답을 안 한다는 겁니다.”
그는 터미널 담당자와 통화했다. 최종 배치계획, 크레인 작업표, 당시 검수원의 수기표를 보존해 달라고 요청했다. 전화 너머에서는 그중 일부가 야간 사무실에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우찬은 담당자 이름을 되물은 뒤 전화를 끊었다.
해솔은 탁자에 새로 놓인 선체 검토 의견을 읽었다. 상자 무게는 미상으로 남아 있었다. 모래에 얼마나 박혔는지로 무게를 말해 달라는 요청 옆에는, 침하 조건과 선체 하중을 분리할 수 없다는 답이 적혀 있었다.
숫자 하나가 나오면 쉬워질 것 같았는데, 쓰지 않은 숫자가 사람을 지키는 때도 있었다.
보험사 담당자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그때였다. 우찬의 대답이 짧아졌다. 긴급비용 선지급 검토에 추가 자료가 필요하다는 말을, 해솔은 전화가 끊긴 뒤에야 들었다.
“그럼 수색도 멈춥니까?”
“아닙니다. 이 비용을 누가 먼저 부담할지 다투는 것과 구조 지휘는 별개입니다.”
“현장 사람들한테도 그렇게 알려 주세요.”
해솔이 말했다.
“밖에는 상자 하나 빼면 끝난다는 말부터 돌아다닙니다.”
우찬은 잠시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주 측 비용 담당자를 다시 연결하는 동안 해솔은 도시락을 어디 두었는지 생각했다. 기억나지 않았다.
***
문재필은 저녁 면담에서 종 사진을 먼저 찾았다.
해솔은 녹색 컨테이너 사진 한 장만 탁자 위에 놓았다. 재필은 그것을 멀리서 보다가 앞으로 당겼다. 손가락이 로고의 갈라진 틈 위에서 멎었다.
“본 적 없습니다.”
우찬이 질문하기도 전이었다.
해솔은 재필의 손을 보았다. 엄지 끝이 사진 모서리를 조금씩 구겼다. 저 상자를 보고 저렇게 된 것인지, 물에 잠긴 자기 배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런 것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그날 어디 계셨는지 표시해 주실 수 있습니까?”
우찬은 빈 선박 도면을 꺼냈다.
재필은 펜을 잡지 않았다. 창밖에서 구급차 소리가 났다. 그는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을 뻗었다.
처음 점은 조타실이었다. 다음은 계단 앞. 선미 쪽으로 가던 선은 중간에서 멈췄다. 구조물 뒤편이라 상자가 있던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해솔은 그 선을 보며 자신이 배 안에 있었다고 해서 배 전체를 본 것은 아니었던 날들을 떠올렸다.
“교대는 이때 하셨고요?”
우찬이 당직표를 보였다.
재필은 조타실 앞에 작은 글씨로 여섯 시 십 분이라고 적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교대 시각이라고 했다. 당직표에 적힌 교대는 다섯 시 사십삼 분이었다. 두 시각 사이에는 스물일곱 분이 비어 있었다. 어느 쪽이 맞는지, 서로 다른 교대를 말하는 것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재필의 입술이 벌어졌다 닫혔다.
“시계가…….”
재필은 거기서 말을 멈췄다. 펜촉이 종이에 눌려 작은 구멍을 만들었다.
해솔은 물컵을 가까이 밀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우찬이 그를 보았지만 해솔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재필은 컵을 들지 못했다. 해솔이 펜부터 받아 놓자 그제야 손가락이 펴졌다.
병실을 나온 뒤 우찬은 복도 벽에 기대 섰다. 해솔은 더 묻지 못한 것을 사과할 생각이 없었다. 우찬도 사과를 기다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당직표의 빈 시간인지, 재필 씨 기억의 빈 시간인지 먼저 구분해야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해솔은 유리문 너머 병실을 보았다. 재필은 탁자 위에 남긴 도면을 뒤집어 놓고 있었다. 녹색 상자가 찍힌 사진도 그 밑으로 들어갔다.
청람호 도면에서 비어 있던 자리는 이제 채워졌다.
그 대신 한 사람의 하루에서 스물일곱 분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