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법정·사회파 드라마 29화

바다가 증언석에 앉는 날

몫을 빼앗지 않는 기금

배상금이 임금으로 빠져나갈 것이라는 두려움 앞에서 가람은 각 재원의 출처와 아직 확보되지 않은 조건을 나눠 놓는다. 대여금의 상환 의무까지 감추지 않은 설명 끝에 반대하던 어민은 찬성 약속 대신 표결에 참여하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글자 크기

강만석은 색연필 네 자루를 나란히 놓았다. 서가람이 가져온 것이었다. 아이들 공부방에서 빌려 온 것 같은 짧은 연필을 보고 회관 앞줄의 어민이 얼굴을 찌푸렸다.

“색칠해서 돈이 늘어납니까?”

만석은 웃지 않았다. “나도 그걸 물을 거요.”

가람은 큰 종이를 벽에 붙였다. 다섯 줄 공동요구 옆이었다. 원인규명, 긴급지원, 위험공정 정지, 임금유지, 주민입회. 어제는 함께 할 행동으로 보였는데 오늘은 각 줄 끝에서 돈을 내놓으라는 손이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앞줄 어민은 임금유지 줄만 보고 있었다. 자기 배가 묶인 동안 공장 사람 월급까지 지켜 줘야 하느냐고 했다. 보험금에 한도가 있으면 누군가 더 받아 갈 때 누군가는 덜 받는다는 말이었다. 틀렸다고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한도가 있는 돈은 맞습니다.” 가람이 말했다. “그래서 모두 같은 돈인 것처럼 적지 않겠습니다.”

그는 제일 위에 ‘이미 확보한 돈’이라고 쓰지 않았다. ‘재원별로 요구하고 확인할 것’이라고 적었다. 아무도 오늘 설명회를 나가면 지급이 시작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먼저 읽어 주었다. 회관 뒤에서 한숨이 나왔다.

“결국 아직 돈은 없다는 말이네.”

“확정되지 않은 것을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회사 임금 책임을 어민 배상금에서 빼는 안으로 내지 않겠다는 것은 오늘 정할 수 있습니다.”

배세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공장 노동자 쪽 앞에 앉아 있었다. 만석은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어제부터 같은 종이 앞에 앉았지만 서로의 통장까지 믿게 된 것은 아니었다.

“임금유지는 회사가 먼저 부담하도록 요구합니다. 회사가 멈추는 공정의 노동비를 주민 피해 보상에서 가져와 채우는 방식은 아닙니다.”

어민이 물었다. “회사가 돈 없다고 하면?”

세희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가람도 대신 회사에 충분한 돈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현금 자료를 받아야 했고, 적용 가능한 고용 관련 재원이 있다면 요건과 기간을 확인해야 했다. 지금 그 자격이 모두 승인된 것처럼 쓸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 배상 통장으로 넘기는 것을 미리 허락하자는 건 아닙니다.” 세희가 말했다. “회사가 어떻게 낼지 설명하게 하자는 거예요.”

노은실이 계산기 덮개를 열었다. 종이 위 금액을 합산하려고 가져왔는데 숫자보다 미확정 표시가 많았다. 그녀는 자기 가게의 지난 매출표와 오늘 요구하는 돈이 아직 다른 단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지원이라고 쓰인 항목마다 성격이 다른 것은 직접 물어야 했다.

“긴급지원 중에 갚아야 하는 돈도 있죠?”

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방 생계대여와 배상금을 같은 말로 안내해서는 안 됐다. 대여라면 갚을 의무와 조건을 보아야 했고, 긴급지원이라도 대상과 중복 조정이 정해져 있었다. 은실은 그 답을 듣고 초록 연필을 집었다.

“그러면 빌리는 칸에 빌린다고 씁시다. 지원받았다고 좋아했다가 가게 빚만 늘면 안 되니까.”

그녀가 직접 적자 뒤쪽 상인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어민과 노동자의 돈 이야기를 듣던 표정이 달라졌다. 자기 가게에도 닿는 질문이었다. 가람은 배상, 긴급 생계, 임금유지, 정화의 목적을 각각 나누고 구체적 재원과 연결했다.

환경책임 담보는 실제 계약과 책임 범위를 확인해야 했다. 회사 운영자금은 회사가 부담해야 할 임금과 연결했다. 지방의 긴급 생계대여는 별도 요건과 상환 조건이 있었다. 정화보증금은 바다와 토양을 복구하는 목적을 가진 돈이었다. 이름이 다른 통장이 있다고 해서 모두 동시에 마음대로 꺼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만석은 정화 칸을 가리켰다. “저 돈도 결국 한도 있는 거 아니오?”

“네. 담보와 보증 조건을 확인해야 합니다. 같은 비용을 두 군데서 다 받은 것처럼 적을 수도 없고요.”

“그럼 나중에 부족해지면?”

“부족한 부담을 회사에 어떻게 요구할지 남겨야 합니다. 부족하다는 이유로 피해자가 다른 피해자의 몫을 가져오도록 합의하지는 않겠습니다.”

만석은 말을 되씹었다. 돈의 부족이 없어지는 대답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이 세희를 붙잡고 월급을 포기하라고 요구해야 할 문제는 아니었다. 회사가 지급 능력과 부담을 설명하는 자리로 돌려야 할 질문이었다.

앞줄 어민은 여전히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의 옆 사람은 선원 임금은 어느 칸이냐고 물었다. 만석은 직접 대답하려다 가람을 봤다. 선주의 손실과 선원의 생계가 같은 항목에 모두 합산되면 실제 손해를 두 번 적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선원은 따로 이름을 내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가람은 하나의 가상 금액을 적어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대신 실제 손실의 주체와 기간부터 맞춰야 한다고 설명했다. 은실은 같은 사람이 어선 일도 하고 가게도 도우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두 역할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한쪽을 지우지 않고, 실제로 어느 소득과 비용이 사라졌는지 확인해야 했다.

뒤쪽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그걸 다 적다 굶겠소.”

방 안에 웃음이 나지 않았다. 가람은 긴급 생계와 최종 배상을 따로 요구하는 이유가 그것이라고 답했다. 최종 손실을 모두 계산해야만 당장의 식탁을 보겠다는 문서가 아니었다. 동시에 급한 돈을 받는 조건으로 개별 청구를 포기하게 하지 않도록 해야 했다.

만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벽판보다 회관 사람들을 봤다. 바닷일이 끊기고도 다른 일자리를 바로 구하지 못한 얼굴들이었다. 공장 쪽 사람들도 같은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서로 눈을 피하고 있었다.

“지금 서로에게 빼앗길까 봐 묻는 거요.”

그가 말했다. “내가 제일 먼저 그랬소. 임금유지 적으면 우리 배상금 줄어드는 것 아니냐고.”

세희는 말없이 들었다.

“그런데 여기 이 표대로면 회사가 내야 할 월급은 회사한테 먼저 묻는 거지. 우리가 뱃값에서 떼 주겠다는 게 아니고.”

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만석이 이제 모두 이해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실제 담보와 지급 요건은 아직 확인할 부분이 있었고 사람마다 자기 사정이 달랐다. 오늘 합의할 수 있는 경계만 분명히 했다.

세희가 앞으로 나왔다. “임금은 회사가 먼저 책임지고, 정화비는 보증금과 해당 담보의 조건을 확인해 마련하도록 요구합니다. 같은 통장처럼 말하지 맙시다.”

‘조건을 확인한다’는 말에 앞줄 어민이 다시 물었다. 보험사가 안 된다고 하면 누구를 믿느냐고. 가람은 보험자의 주장도 그대로 결론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답했다. 계약과 원인, 손해 범위를 다투어야 했고 회사의 책임도 따로 남았다. 그 싸움이 끝났다고 거짓말하지 않았다.

어민은 팔짱을 풀었다. 찬성하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는 벽 앞으로 나와 자신이 가장 걱정한 두 칸 사이에 선이 있는지 봤다. 임금유지와 어민 배상 사이였다.

“나중에 이 선을 지우면요?”

은실이 말했다. “그래서 사본을 가져가는 거죠. 회사만 문서 갖는 게 아니라 우리도.”

그녀는 배상과 긴급 생계의 차이가 적힌 종이를 한 장씩 돌렸다. 받는 사람에게 글씨가 읽히는지 물었다. 작다고 하면 큰 글씨본으로 바꿔 주었다. 설명회가 끝나기 전에 자기 가게 문을 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종이를 손님 주문표처럼 빨리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만석도 사본을 받았다. 그는 마지막에 적힌 문장을 천천히 읽었다. 공동요구 참여가 개별 손해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전면폐쇄에 대한 각자의 입장도 오늘 표로 지워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지금 위험을 멈추고 생계를 연결하자는 요구는 함께 낼 수 있었다.

설명회가 잠깐 끊긴 사이 세희는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녀 옆의 노동자가 자기 쪽 부속서를 접으며 말했다. 임금이 줄지 않는다는 확정표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고. 세희는 맞다고 했다. 회사에 무엇을 요구할지 적힌 표라고.

“그러면 왜 서명해요?”

“요구하지 않으면 멈추라는 말 뒤에 우리 임금은 없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는 종이를 다시 폈다. 서명해야 모든 위험이 사라지는 문서는 아니었다. 누가 어떤 위험을 떠안지 않겠다고 말하는 문서에 가까웠다. 만석은 그 대화를 옆에서 들었지만 끼어들지 않았다. 노동자도 자기 쪽 사람에게 설명해야 했다.

가람은 벽판 아래에 질문받은 내용을 덧붙였다. 상환 여부, 중복 조정, 회사 부담, 담보 한도, 정화 목적. 설명하지 못한 것은 추가 확인으로 남았다. 어느 칸에도 오늘 지급 확정이라고 쓰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본을 접으면서도 그 빈칸이 언제 채워지는지 물었다.

앞줄 어민이 맨 마지막까지 남았다. 그는 가람에게 물었다. 내일 표결하면 반대해도 자기 청구는 계속할 수 있느냐고. 가람은 그렇다고 답했다. 찬성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고 반대한 사람도 배제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 표는 넣겠소.”

만석이 그를 봤다. 찬성표인지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설명회에서 얻은 것은 모두 같은 편이라는 장면이 아니었다. 서로의 돈을 빼앗는 것으로 이해하던 사람이 자기 뜻을 비밀로 적어 참여하겠다고 한 것이었다.

어민이 나간 뒤 은실은 컵을 걷었다. 가람은 벽의 색연필 선을 사진이 아니라 제출할 문안으로 다시 확인했다. 색이 달라도 글자로 읽히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만석은 종이를 치우지 말고 다음 날도 붙여 두자고 했다.

“돈의 색을 나눈다고 사람 편까지 나누는 건 아니라는 말, 오늘 좀 알겠소.”

세희가 답했다. “같은 마을이라고 한 사람 통장처럼 쓸 수도 없고요.”

그 말에 은실이 짧게 웃었다. “그건 우리 집도 못 합니다.”

회관 가운데 빈 탁자가 옮겨졌다. 만석과 세희가 양 끝을 들었고 은실이 다리가 문턱에 걸리지 않게 봤다. 그 위에 무기명 표결함이 놓였다. 가람은 안내문을 확인했다. 무엇에 찬반을 표시하는지, 언제 투표하는지, 개별 권리가 남는지 읽혔다.

봉인하기 전 만석이 상자 안을 들여다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내일 그 안에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표도 들어올 것이다. 그는 빈 상자를 세희 쪽으로 돌렸다. 그녀도 안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으로 공장 쪽 퇴근버스가 지나갔다. 조금 뒤 선착장 가로등이 켜졌다. 만석은 그 두 불빛을 한 번씩 보고 회관 등을 껐다. 내일의 표가 바다를 바로 되돌려 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서로의 몫을 빼앗아야만 살 수 있다는 말로 표를 넣게 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