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주대로의 붉은 매듭
은값이 아니면 돌아간다
길상은 소피와 기름으로 습격 흔적을 꾸민 일을 시인하고, 은 투자에 이끌려 북쪽으로 간 사람들이 감시꾼 합류 뒤 귀환을 막혔다고 말한다. 일행은 그의 가족을 옮길 연락을 마련하고, 석구는 그 일을 거들러 떠나며 길상은 마른 개울의 갈림길까지만 안내하기로 한다.
길상은 다락에 들어와서도 신을 벗지 않았다. 문턱 안으로 두 발을 들이면 다시 나갈 수 없는 것처럼 한쪽 뒤꿈치가 계단에 걸려 있었다. 석구가 그 발을 보고 자리를 내줬다. 강복단은 문을 닫지 않았다.
“나갈 수는 있소. 다만 내 말은 듣고 나가.”
그녀가 말했다.
“죽었다고 적힌 사람들 집에 쌀을 빌려 주고 왔소. 살아 있는지 몰라서 그릇도 못 치우는 집들이오.”
길상은 눈을 내리깔았다. 사과하지 않았다. 사과하면 그릇을 치운 집보다 자기 속이 먼저 편해질 것 같았는지, 아니면 사과할 자격조차 없다고 여기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연화는 자리를 권하지 않고 반쪽 종이를 돌려 보여 줬다.
은값이 아니면 돌아가겠다.
그가 문장을 보자 손가락이 움츠러들었다.
“덕수의 글이오.”
“써 놓는 것을 봤습니까?”
“수레 옆에서 쓰는 건 봤소. 그 말로 다툰 것도 들었고.”
연화는 종이를 거뒀다. 젖었다 마른 자리가 등잔 아래에서 비늘처럼 일어났다. 길상이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자기가 만지면 부서질 것을 이제야 아는 듯했다.
월선이 밥상 대신 물과 빈 사발을 가져왔다. 술을 달라고 할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다. 길상은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석구가 사발을 그의 손에 쥐여 줬다. 그제야 그는 문턱에서 발을 떼고 바닥에 앉았다.
“소피는 내가 샀소.”
방 안에서 아무도 붓을 움직이지 않았다. 길상은 말을 멈추고 그들을 번갈아 봤다. 기다리던 꾸지람이 쏟아지지 않자 오히려 무릎 위에 놓인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수레에도 발랐소. 천에 묻혀 문짝에 끼우고, 바퀴는 빼 놓았지. 누가 봐도 사람을 덮친 자리처럼.”
복단이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석구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으나 그녀가 노려보자 내렸다.
“누가 시켰소?”
길상은 물을 마시려다 사발을 너무 기울였다. 목으로 넘어가지 못한 물이 턱에서 떨어졌다. 그는 소매로 닦고 입을 열었다.
“서필주.”
연화는 그 이름을 다시 묻지 않았다. 이름 하나를 얻는 것보다 그 말을 어디서 어떻게 받았는지가 필요했다. 길상에게 처음 들은 말부터 해 달라고 했다. 그는 다락 바닥의 나뭇결을 보며 시간을 거꾸로 더듬었다.
***
처음 내민 것은 쇠사슬이 아니라 은값이었다.
길상은 심대업이 새 은맥에 몫을 넣으면 의주까지 갈 필요 없이 더 큰 이문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 일을 털어놓았다. 어느 고개를 지나면 되는지, 수레가 들어갈 만한지 길상에게 먼저 물었다. 길상은 길을 안다고 대답했다. 길을 모른다고 했으면 다른 마부를 찾았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
복단이 곧바로 말했다.
“그래서 네가 해도 괜찮았다는 말이냐?”
“그 말이 아니오.”
길상은 손을 흔들었다.
“은을 실어 오는 줄 알았다는 거요.”
“빈 수레가 돌아왔지.”
범수가 말했다. 낮은 목소리였다. 길상이 그를 봤다. 범수는 붉은 흙길에서 그린 바퀴 간격을 펼쳤다. 깊은 자국과 얕은 자국이 나란히 있었다. 길상은 거기까지 따라왔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도 탔습니까?”
연화가 물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을 보러 가는 동안 수레에 오르기도 하고 걸어가기도 했다고 했다. 길이 나빠지면 내려서 밀었다. 덕수는 값부터 보고 아니면 돌아가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 말에 토를 달거나 제 몫을 더 셌다. 그때 길상은 수레를 돌리라는 말을 듣지 못했다고 했다.
“그다음은요.”
연화가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사발 테두리를 문질렀다. 복단이 물을 더 부어 주려 하자 몸을 피했다. 젖는 것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다정한 손을 받을 때마다 다음 말을 할 수 없게 되는 듯했다.
길상은 감시꾼 여섯이 붙은 뒤의 길을 말했다. 칼을 찬 사람들이 앞뒤로 섰다. 돌아가자는 사람이 나오면 은맥이 코앞인데 삯을 버릴 셈이냐고 했다. 웃으며 설득하던 말이 길을 막는 몸으로 바뀌었다. 다리에서는 사람들이 제 발로 건넜다. 그는 그 말 뒤에 노칠도 그렇게 보았을 것이라고 했다.
연화가 삯패 그림을 내밀었다. 원래 것과 급히 깎은 여섯 장을 나눠 그린 종이였다.
“노칠에게 이 그림만 받았습니다. 웃었다고 해서 돌아올 수 있었다고 적지는 않았고요.”
길상이 한참 그림을 보았다.
“웃던 사람이 나중에는 입을 다물었소.”
그가 말했다.
“나는 그래도 수레를 몰았고.”
석구가 바로 이유를 덧붙이려 했다. 칼이 있었지 않느냐고, 네가 무슨 수로 막느냐고 했다. 길상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그만하라고 말했다. 석구의 입이 벌어졌다.
“네가 대신 말해 주면 내가 또 그것만 말하게 되오.”
길상은 무릎을 쓸었다. 먼지가 없는 자리인데도 계속 털었다.
“사람 발에 쇠사슬이 채워졌을 때는…… 돌아올 길이 이미 닫혔소. 그걸 보고도 나는 빈 수레를 몰고 나왔소.”
월선이 아래층 계단에서 멈췄다. 손에 든 밥그릇이 작게 부딪쳤다. 아무도 그녀에게 문을 닫으라고 하지 않았다. 소리가 사라진 뒤에도 방 안 사람들은 같은 쪽을 보고 있었다. 길상의 발목이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묶여 있지 않은 발목.
***
연화는 그가 직접 본 데까지만 길을 그리게 했다. 붓을 잡은 손이 떨려 선이 끊어졌다. 그는 글보다 그림도 못 그린다며 붓을 내려놓았다. 범수가 마른 나뭇조각 몇 개를 가져와 바닥에 놓았다. 긴 것은 고개, 짧은 것은 다리였다.
“그럼 수레 몰듯 놓으시오. 길은 내가 그릴 테니.”
길상이 처음으로 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뭇조각 사이에 손을 넣어 방향을 바꿨다. 어느 데서 바퀴가 걸렸는지, 어디서 사람들에게 내리라 했는지를 말했다. 연화는 서필주의 지시를 받은 때가 그 전인지 뒤인지 다시 물었다.
그는 습격 흔적을 만드는 일을 따로 이야기했다. 연화가 각 시점을 나누자 복단이 왜 자꾸 토막 내느냐고 물었다. 누구 짓인지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서필주가 시켰다는 것은 길상의 말입니다. 우리가 본 수레하고 붙는 데부터 이어야지요.”
“붙이지 못하면 이 말은 버릴 셈이오?”
“못 붙였다고 숨기지 않을 셈입니다.”
복단은 팔짱을 풀었다. 연화가 미덥지 않아서 따지는 말은 아니었다. 이렇게 잘게 나눠 적는 동안 아래의 사람들이 더 오래 묶일 것 같아서였다. 그녀는 지도를 들여다보다 은광 쪽의 빈자리를 손톱으로 눌렀다.
“여기를 말해.”
길상의 손이 나뭇조각에서 떨어졌다.
“안 됩니다.”
“네가 몰고 간 사람들은 돼?”
그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복단이 목소리를 높이기 전에 석구가 그녀 앞을 막았다. 이번에는 길상이 죄가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식구가 있습니다.”
석구가 말했다.
“그 집을 누가 아는지부터 물어 주시오. 저놈이 벌받을 일하고 식구 목에 칼 오는 일은 다르지 않소.”
길상은 손바닥으로 눈을 눌렀다. 울음소리는 나지 않았다. 복단은 석구를 밀어내지 않고 옆으로 비켰다. 길상에게 누가 무엇을 말했는지 물었다. 식구를 입에 올린 말과 길상이 혼자 두려워한 것을 갈랐다. 그가 말하는 동안 연화는 식구의 거처를 모두가 읽을 종이에 적지 않았다.
복단이 월선을 불렀다. 그녀가 아는 행상 가운데 식구를 옮길 길을 맡길 만한 사람이 근처에 있는지 물었다. 월선은 방금 떠난 일행은 놓쳤다고 했다. 다음 길은 새벽이었다. 복단이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 돈을 더 내면 밤에도 갈 수 있겠느냐고 묻지 않았다. 밤길을 맡길 사람까지 함부로 덫으로 들여보낼 수는 없었다.
석구가 자기가 먼저 가겠다고 했다. 길상의 식구가 사는 곳을 알고 있었다. 복단은 그에게 다 옮겼다고 소문부터 내지 말라고 했다. 월선이 짚신과 길양식을 챙기는 동안 어디서 행상들과 만날지 정했다. 거처를 옮기는 전갈은 장부 꾸러미와 따로 묶었다.
연화는 길상에게 그 준비를 그대로 설명했다. 아직 가족이 안전한 곳에 도착했다는 말은 아니었다. 길상은 그 차이를 알아듣고도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면 내 말을 먼저 다 하라고는 안 하겠소?”
“오늘 밤에 가족을 모두 구했다고 거짓말할 수는 없습니다.”
연화가 말했다.
“당신이 아는 갈림길까지 먼저 갑시다. 어디까지 왔는지 보러 가는 것이지, 사람을 데리고 문을 부수러 가는 것은 아닙니다.”
길상이 복단을 봤다. 복단은 그 약속을 대신 고치지 않았다. 지금은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석구는 그제야 길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길상은 피하지 않았지만 기대지도 않았다.
***
월선이 밥을 가져왔을 때 등잔기름이 거의 다 닳아 있었다. 길상은 숟가락을 들었다가 놓았다. 복단이 배부르면 남기라고 했다. 그 말에 그가 숟가락을 다시 들었다. 굶는 것으로 갚을 수 없다는 훈계를 더 듣지 않은 것이 오히려 먹을 틈을 준 모양이었다.
석구는 먼저 떠날 채비를 했다. 연화가 길상에게 받아 적은 말을 그 앞에서 읽었다. 소피와 기름을 산 일, 수레에 습격 흔적을 만든 일, 사람들이 스스로 북쪽 길을 골랐다가 돌아가지 못하게 된 일이 순서대로 나왔다. 서필주와 심대업의 이름은 길상이 어떤 말과 행동을 직접 보았다는 것인지 붙여 적었다.
석구는 길상 대신 고치지 않았다. 다 읽고 난 뒤 한 군데를 가리켰다.
“여기, 오늘 스스로 찾아왔다고 쓰지 마시오. 내가 데려왔습니다.”
길상이 고개를 들었다. 석구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오늘 처음으로 한쪽이 다른 쪽을 덜어 주지 않는 말이 나왔다.
“쓰시오.”
길상이 말했다.
“내가 문도 한참 안 열었다고.”
연화는 그 말을 더했다. 석구가 계단을 내려갈 때 길상이 일어나 따라갔다. 두 사람은 아래에서 잠깐 이야기했다. 연화에게는 말소리보다 월선이 양식 보따리 끈을 당기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이윽고 문이 닫혔다.
돌아온 길상은 벗어 둔 신을 가지런히 놓았다. 처음 들어올 때와 달랐다. 도망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지는 않았다. 대신 범수가 깔아 둔 나뭇조각 곁에 앉아 긴 것 하나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이 길은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큰 수레가 다니는 길은 초소에서 다 봅니다. 그쪽으로 가면 내가 보이오.”
복단이 가까이 왔다. 길상은 다른 선을 손가락으로 그었다. 물이 마르면 바닥이 드러나는 개울이었다. 광석수레만 다니는 곳이라 자갈이 눌리고, 비가 오면 안쪽 낮은 자리가 먼저 찬다고 했다.
“여기까지는 갔습니다. 그 위 갈림길에서 사람을 넘겼고.”
연화는 그가 보지 못한 안쪽을 비워 뒀다. 길상은 빈 부분을 채워 주려 하지 않았다. 범수는 날이 밝으면 물이 남은 데부터 살피겠다고 했다. 길상에게 빠른 길이 아니라 발을 돌릴 수 있는 곳을 알려 달라고 했다.
“내려올 자리도 찾아야 하오.”
범수의 말에 길상이 종이를 오래 봤다. 오늘 처음 들은 요구인 듯했다. 데려갈 곳만 묻는 사람들과 오래 일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바람이 들창을 울렸다. 월선이 등잔을 하나 더 가져왔으나 연화는 새 기름을 다 붓지 말아 달라고 했다. 남은 밤은 짧았고, 내려갈 길을 그릴 종이는 아직 남아 있었다.
길상이 마른 개울 밑에 손톱으로 짧은 금을 그었다. 물러설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