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지난 복숭아밭
천막을 접지 않은 사람들
상인회에서 스스로 빠지려던 보리는 자기 상품에 관한 질문을 직접 받기로 한다. 11대3 판매 유지 결정 뒤 남은 다섯 병이 정가로 팔리고, 해진과 함께 우산 중심을 잡는 행동이 일방적인 보호를 서로의 배려로 바꾼다.
빗물이 천막 끝에 배를 만들었다. 류미정이 긴 막대로 안쪽을 밀자 모여 있던 물이 한꺼번에 떨어졌다. 윤보리는 서류를 끌어안고 물벼락을 피했다. 종이는 지켰지만 운동화 앞코는 벌써 짙은 색이었다.
“오늘은 망했네요.”
미정이 막대를 내렸다. “비 얘기면 맞고, 장사 얘기면 아직 안 열었어.”
보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상인회 회의까지 십오 분이 남았다. 냉장 판매분은 장비 안에 두었고 가격표도 아직 세우지 않았다. 어제 붙인 이력표 견본과 제조·표시 자료는 투명 파일에 들어 있었다. 그 맨 뒤에 취소된 주문 세 건이 끼어 있었다.
최옥순은 빈 의자를 빗물 떨어지지 않는 쪽으로 옮겼다. 보리가 따라 들려고 하자 손을 저었다. 회의하러 갈 사람이 우선 앉아 있으라는 말이었다. 보리는 의자에 앉지 않고 천막 다리의 고정끈을 다시 잡았다. 접어야 한다면 이 매듭부터 풀게 될 터였다.
“제가 빠진다고 말할게요.”
옥순이 의자를 내려놓았다. “어디서?”
“오늘 판매에서요. 제 사진도 안 걸고, 설명도 미정 씨가 하면…….”
말은 그럴듯하게 나왔지만 끝이 흐려졌다. 보리가 만든 제품인데 보리만 없으면 괜찮다는 것이었다. 어제 농민들의 얼굴을 팔지 않겠다고 해 놓고 오늘은 자기 얼굴부터 치우려고 했다.
옥순이 물었다. “누가 물어보면 네가 안 만든 거라고 하니?”
“그런 뜻은 아니죠.”
“그럼 만든 사람만 없는 데서 무슨 대답을 해.”
빗소리가 사이를 채웠다. 보리는 파일을 가슴에서 조금 떼었다. 종이 모서리에 땀이 배어 있었다. 팔 안쪽으로 들고 있을 것이 아니라 펼쳐야 하는 종이였다.
상인회는 장터 뒤 비가림 공간에 모였다. 배정자가 물기를 훔친 의자를 보리 앞으로 밀었다. 보리는 맨 끝에 서 있으려다 그 의자에 앉았다. 사람들은 인사보다 먼저 손에 든 휴대전화를 봤다. 오래된 기사 제목이 비슷한 각도로 떠 있었다.
“우리 장터 이름까지 검색에 붙기 시작했어요.”
판매중단을 요구한 상인이 말했다. 그는 자기 가게 계정에 달린 질문을 내밀었다. 그 제품 팔아도 괜찮은 곳이냐는 문장이 있었다. 보리는 다른 사람까지 해명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에 파일을 여는 손이 늦어졌다.
“오늘만 쉬면 안 돼요? 회사랑 정리하고 다시 나오면 되잖아.”
“언제 정리될지 모르잖아요.” 옥순이 답했다.
“그럼 언제까지 장터가 같이 감당해요?”
목소리가 높아졌다. 미정은 보리의 파일에서 견본표를 꺼내 바닥에 깔지 않고 탁자 중앙에 놓았다. 어느 집 원료인지 묻는 칸, 어느 날 만든 제품인지 적힌 칸이 보였다. 과거 회사 이야기를 덮을 수 있는 종이는 아니었다. 지금 팔 제품이 무엇인지 묻는 사람에게만 대답할 수 있었다.
“원산지나 위생 때문에 문제 있는 건가요?” 배정자가 물었다.
“그게 다가 아니죠. 손님 신뢰도 있지.”
“그래서 묻는 거예요. 누가 먹고 탈 났다는 신고예요, 표시가 거짓이라는 거예요, 예전 회사 분쟁이 있다는 거예요?”
반대하던 상인은 세 번째라고 답했다. 다른 사람이 그래도 표절이면 훔친 제품 아니냐고 했다. 보리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제일 무서워하던 질문이었다. 자료 안쪽에는 지금 쓰는 배합과 원재료가 있었다. 예전 회사 서버의 원본은 아직 없었다.
“과거 일은 제가 확인할 자료를 찾고 있습니다.”
그녀는 목이 잠겨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두 번째 문장은 더 천천히 말했다.
“오늘 만드는 제품의 원물과 배합시험 기록은 여기 있습니다. 지금 공개한 정보가 틀린 곳이 있으면 고치고, 판매를 멈춰야 할 문제가 확인되면 멈추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여기서 예전 분쟁이 다 끝났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어요.”
“그러면 결백하다는 말도 못 하겠다는 거네.”
“제 기여를 빼앗겼다는 제 입장은 그대로입니다. 그 입장을 증명할 회사 원본을 아직 못 받았다는 뜻이에요.”
보리는 숨을 들이쉬었다. 입장을 말하는 것과 사람들에게 당장 자신을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을 한 문장으로 섞지 않으려고 했다. 정자는 그녀의 말을 대신 정리해 주지 않았다. 다른 상인들이 묻도록 기다렸다.
질문은 생각보다 생활에 가까웠다. 팔고 난 뒤 반품 전화는 누가 받는가. 농가 코드로만 적힌 병도 원료를 찾을 수 있는가. 오늘 비가 오는데 제품을 천막에 그대로 내놓을 것인가. 미정은 질문이 나온 순서대로 답했다. 자신이 실제 맡는 일이라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보리는 그 옆에서 견본을 돌렸다.
개인 농가 번호 대신 조합 연락처가 있다는 말을 듣자 한 상인이 자기 번호도 포장지에 잘못 찍힌 적 있다고 했다. 농담처럼 꺼낸 말이었지만 그 뒤로 사람들은 화면의 기사 제목보다 병에 붙은 글씨를 더 오래 봤다.
반대하던 상인이 팔짱을 끼었다. “그래도 난 걱정됩니다.”
옥순이 뭐라고 하려 하자 보리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시는 걸 없애 달라고 하지는 않을게요.”
“없애지 않으면 장사가 되나.”
“그래도 오늘 팔지 말지를 정하는 기준은 있어야 해요. 제가 여기 없더라도 다음 사람한테 같은 기준을 쓰실 수 있게요.”
보리는 자기 입으로 ‘여기 없더라도’라고 한 뒤 입술을 다물었다. 떠나겠다는 뜻으로 들릴까 봐 곧 덧붙였다.
“오늘은 제가 있겠습니다. 질문도 제가 듣고요.”
배정자가 탁자 위 휴지를 모았다. 젖은 것과 마른 것을 나누어 쓰레기봉투에 넣은 뒤 말했다. 위생과 표시 기준을 지키는 동안 판매를 유지하고, 명예분쟁 결과는 확인되면 따로 알리자는 안이었다. 기준을 어기는 것이 발견되면 다른 가게처럼 처리한다는 말도 붙었다.
표결은 금방 끝나지 않았다. 한 사람이 기준을 다시 읽어 달라고 했다. 다른 사람은 찬성한다고 보리의 과거 주장을 모두 인정한 것으로 쓰지 말라고 했다. 옥순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보리는 의자 아래서 쥐었던 손을 풀었다.
찬성 열하나, 반대 셋.
숫자가 불렸을 때 보리는 박수부터 들릴 줄 알았다.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상인들은 우산을 챙기고 자기 좌판으로 돌아갔다. 반대표를 던진 사람도 자료를 밀어 주며 비 안 맞게 덮으라고 했다. 그것이 이상하게 큰 도움이 됐다. 모두가 갑자기 자기 편이 된 척하지 않아도 오늘 일을 할 수 있었다.
천막으로 돌아오자 미정이 가격표를 들었다.
“이제 세워도 되지?”
보리는 빈 상자를 옮기고 가격표 자리를 닦았다. “네. 제가 할게요.”
그녀는 표가 손님 쪽을 향하도록 세웠다. 취소된 주문표는 버리지 않았다. 옥순에게 넘겨 취소된 만큼만 남겼다. 아직 취소하지 않은 사람까지 잃은 매출처럼 셀 필요는 없었다. 그 대신 천막 앞으로 한 발 나왔다.
첫 손님은 가격을 묻지 않고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이 사람이냐는 질문이었다. 보리는 자기라고 답했다. 미정은 옆에서 제품을 먼저 먹어 보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손님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여기 것은 누가 만드느냐고 다시 물었다.
“제가 배합을 개발하고 류미정 씨와 같이 만듭니다. 원물은 조합 농가에서 왔고요.”
보리는 새 견본표를 가리켰다. 손님은 글씨를 읽고 돌아갔다. 사지 않았지만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보리는 손바닥을 앞치마에 문질렀다. 이렇게 끝나는 질문도 있었다. 모든 사람을 설득해야만 하루가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점심이 지나자 빗줄기가 조금 가늘어졌다. 해진이 우산을 들고 왔다. 그가 천막 끝 고인 물을 보고 우산을 옆으로 들자 보리는 반사적으로 파일부터 끌어안았다.
“서류는 이제 안 젖어도 돼. 나를 좀 가려 줘.”
해진이 우산 각도를 바꿨다. 보리 어깨에 떨어지던 빗방울이 멎었다. 대신 그의 왼쪽 소매가 천막 밖으로 나갔다. 보리는 우산대를 잡아 가운데로 밀었다. 두 사람 사이 거리가 반걸음 줄었다.
“회의는 어땠어?”
“열하나 대 셋.”
“야구 점수 같네.”
“좋은 말 골라서 다시 해.”
“오늘 안 접어서 좋다.”
보리는 우산 안에서 그를 봤다. 자신의 억울함이 풀렸다고 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오늘 천막을 접지 않았다는 것. 그가 와 보니 자신이 이 자리에 있었다는 것. 그만큼이면 지금은 정확했다.
배정자가 옆 좌판에서 손을 흔들었다. “강 기사, 우산이 한쪽으로 너무 기울었어. 표결보다 노골적인 증거잖아.”
해진은 손잡이를 놓지 않은 채 정자를 봤다. “물이 저쪽에서 떨어져서요.”
“그러면 네 어깨에 내리는 건 이슬인가?”
미정이 웃음을 참다 등을 돌렸다. 보리는 우산을 빼앗아 이번에는 자기 쪽 팔이 조금 젖게 들었다. 해진이 손잡이를 다시 잡으려 하자 놓지 않았다.
“교대예요.”
“우산도?”
“한 사람이 다 맞지 말자면서.”
그는 더 당기지 않았다. 손잡이의 좁은 부분에 두 사람의 손이 붙어 있었다. 정자가 다시 놀리기 전에 보리는 손님에게 인사를 했다. 해진도 바로 옆으로 물러났다. 웃음을 핑계로 일할 자리까지 차지하지는 않았다.
폐장 시간이 가까워지자 판매 가능한 냉장분 가운데 다섯 병이 남았다. 옥순은 남은 양을 보고 묶어 싸게 팔자는 말을 꺼내려다 가격표를 다시 봤다. 보리가 어제부터 지키려던 값이었다. 미정이 보관 상태를 확인하는 동안 정자가 자기 가게를 정리하고 왔다.
“하나 줘요. 손주 줄 거 아니고 내가 먹을 거니까 작은 숟가락도.”
정자는 가격표에 적힌 돈을 놓았다. 뒤따라온 상인들이 한 병씩 골랐다. 회의에서 질문을 많이 했던 사람도 있었다. 보리는 무료로 드리겠다는 말이 튀어나오기 전에 영수증부터 들었다.
“보관은 여기 적힌 대로 해 주세요.”
“먹는 법도 좀 알려 줘야지. 만든 사람이 있잖아.”
보리는 빵에 얇게 올려 먼저 먹어 보라고 했다. 너무 많이 바르면 복숭아보다 단맛이 앞설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자는 그제야 듣고 싶던 설명을 들었다는 듯 웃었다. 마지막 병까지 각자의 봉투에 들어갔다. 다섯 병 모두 정가였다.
매출표에는 이름 대신 판매 수량과 금액이 남았다. 보리는 ‘도와주신 분’이라는 칸을 만들지 않았다. 정자가 돌아서다 말했다.
“내가 반찬 팔 때도 한 번 와. 맛없으면 사지는 말고.”
“맛있으면 정가로 살게요.”
천막을 접을 때는 해진도 끈을 잡았다. 아침에 보리가 오래 쥐고 있던 매듭이었다. 젖은 끈이 잘 풀리지 않자 그녀가 옆에서 고정핀을 받쳤다. 두 사람이 한쪽씩 힘을 빼자 매듭이 풀렸다.
접는 천막 아래 빈자리는 아침에 상상했던 것과 달랐다. 내쫓겨 사라지는 자리가 아니라 오늘 장사를 끝낸 자리였다. 보리는 손바닥의 빗물을 털고 해진에게 지금 잠깐 시간이 있느냐고 물었다.
“정산 시작할 때까진. 왜?”
“퇴사할 때 가져온 상자, 같이 좀 봐 줘. 혼자 열면 또 다 내보이고 싶을 것 같아.”
해진이 빈 상자를 들어 차로 옮겼다. “그럼 버릴 것부터 정하지 말고, 뭐가 있는지부터 보자.”
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옥순은 공용 천막과 장비를 다 거둔 뒤 주방에서 정산하자고 했다. 보리도 자기 물건은 다 실었다. 오늘 지킨 자리에 가져올 기록을, 기다리는 동안 조금이라도 찾아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