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료·완화의료 휴먼극 27화

열세 번째 야간 왕진

기억이 틀린 손

세현은 현재의 손동작을 재현하다가 그것만으로 과거 경보 음소거 여부를 증명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반복해서 들은 원장의 설명과 자기 기억이 섞인 지점을 분리하고, 자신의 판단 지연은 남긴 채 영숙이 읽기 쉬운 큰 글씨의 돌봄 기록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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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현은 책상 위 종이를 세 번 돌려놓았다. 마취기 버튼 배치도였다. 의자에 앉았을 때 보이는 방향과 서서 내려다보는 방향을 바꿔 봐도 낯설지는 않았다. 낯익다는 것이 문제였다. 손끝이 먼저 아는 물건이라고 생각할 때마다 기억도 그 뒤를 따라 확실해졌다.

초인종이 울리자 그는 종이를 뒤집었다. 문하진이 문 앞에서 그 행동을 보았다. 오라고 해 놓고 자료를 숨기는 모양이었다. 세현은 멋쩍게 종이를 다시 폈다.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제가 읽어 드리기로 한 부분만 봅시다. 늦게까지는 못 있어요.”

그 말에 세현은 오히려 편해졌다. 하진에게도 이 방을 나갈 시간이 있었다. 자신의 과거가 오늘 밤까지 전부 차지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의자에 걸어 둔 옷을 치우고 물컵 두 개를 꺼냈다.

컵 하나가 오른손 안에서 가볍게 떨렸다. 그는 왼손으로 옮겨 놓았다. 하진은 그것을 모르는 척하지도, 괜찮으냐고 매번 묻지도 않았다. 세현이 다 놓은 뒤 자리에 앉았다.

책상에는 과거 진술서 사본과 장비 자료가 있었다. 사고 뒤 원장 면담에서 들은 말도 별도 종이에 적어 놓았다. 하진은 진술서 첫 장부터 읽으려다가 세현에게 물었다. 오늘 무엇을 부탁한 것이냐고.

“제가 기억한다고 쓴 게 어디서 나온 말인지, 같이 봐 주십시오.”

“제가 맞는 기억을 골라 드릴 수는 없습니다.”

“네. 그러지 말아 주세요.”

세현은 스스로 대답하고 잠깐 멈췄다. 사실은 골라 주기를 바랐을지도 몰랐다. 원장이 쓴 문장은 틀렸고, 자신이 이제 떠올린 것이 진짜라고 누가 말해 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 마음을 소리 내지는 못했지만 종이를 더 가까이 당기지도 않았다.

하진이 당시 진술의 경보 부분을 읽었다. 세현은 오른손을 배치도 위에 놓았다. 어떤 버튼을 눌렀느냐고 그녀가 묻기 전에 손가락이 한 칸에 닿았다. 음소거라고 생각한 자리였다.

배치도의 설명은 화면전환이었다.

세현은 손을 뗐다가 다시 대었다. 같은 칸이었다. 하진은 바로 다른 버튼을 가리키지 않았다. 세현이 스스로 표시를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 침묵이 단정적인 위로보다 오래 버티기 어려웠다.

“그러면 제가 끈 게 아니었을 수도 있겠네요.”

“오늘 손이 닿은 곳만으로 그날 무엇을 눌렀는지는 알 수 없죠.”

세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먼저 했어야 하는 사람이 자신이었다. 오늘의 떨리는 손과 그날의 손은 같은 손이면서 같은 조건은 아니었다. 종이 위에 손을 올리는 것과 수술실에서 장비를 다루는 것도 달랐다.

그래도 하나는 분명했다. 머릿속에서는 선명하던 위치가 설명과 맞지 않았다. 자기가 확실히 기억한다고 써 놓은 문장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하진은 사고 뒤 면담 메모를 읽었다. ‘경보를 껐을 가능성.’ 같은 표현이 여러 곳에 있었다. 처음에는 질문처럼 적혔고, 다음에는 세현이 확인해야 하는 설명처럼 적혔다. 뒤의 진술에는 ‘제가 경보를 껐습니다’라는 문장이 남았다.

세현은 그 줄을 오래 보았다. 어느 순간 가능성이 자신의 기억으로 바뀌었는지 날짜 하나로 고를 수 없었다. 병원에서 나오던 때, 사직서를 쓰던 때, 잠들기 전 같은 말을 되풀이하던 때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새 장면을 더 만들어 붙이고 싶지 않아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처음부터 저 문장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진이 그 말을 받아 적었다. ‘모른다’를 ‘아니다’로 바꾸지 않았다. 세현은 종이 위에서 그 짧은 차이를 보았다.

“제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는 당시 활력 변화를 본 뒤 판단이 늦어진 구간을 짚었다. 경보 버튼을 어떤 손으로 눌렀는지 불확실해져도 그 시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도와줄 인력이 부족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자신이 지연하지 않은 사람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하진은 그쪽 종이를 덮지 않았다. 세현이 볼 수 있도록 옆으로 펴 두었다.

“그걸 남겨 두고 다른 문장을 고치면 됩니다.”

세현은 고개를 저었다. “가족에게는 이제 와서 빠져나가려는 사람으로 보이겠죠.”

“그분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제가 대신 말할 수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틀릴 수 있는 기억을 끝까지 확실하다고 쓰는 게 더 책임 있는 설명은 아니죠.”

세현은 물컵을 잡았다가 내려놓았다. 집으로 돌아와 자료를 폈을 때도 같은 말을 혼자 해 보았다. 다른 사람이 말하면 쉬워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서명을 고치는 순간 자신이 한때 얼마나 확신했는지도 함께 드러났다.

방 구석 왕진가방에 달린 작은 지퍼가 열린 채였다. 세현은 손을 쉬려고 가방을 가져왔다. 기록지와 방문에 쓸 물품을 정리하다 종이 모서리가 지퍼에 걸렸다. 억지로 당기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는 왼손으로 천을 벌리고 오른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하진이 도와주겠느냐고 물었다. 세현은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지퍼가 풀린 뒤에야 가방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것을 본 하진이 다음 방문 준비는 되어 있느냐고 물었다.

“기록지는 넣었습니다.”

“영숙 씨가 읽을 것도요?”

세현은 가방에서 종이를 다시 꺼냈다. 글씨가 작았다. 자기 눈에는 한눈에 들어왔지만 영숙은 첫 줄부터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었다. 환자가 읽어야 하는 문서를 자기 책상에 맞춰 출력했다는 걸 이제 알았다.

그는 큰 글씨로 다시 준비하겠다고 했다. 하진은 과거 서류를 잠깐 밀어 주었다. 영숙의 오늘을 위한 한 장이 책상에 놓일 자리가 생겼다. 세현은 그 종이에 오늘의 실수를 적었다. 글씨를 키울 것. 질문 사이에 쉴 것. 답을 대신 끝내지 말 것.

“이건 제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진이 고개를 들었다. “잘하겠다는 말보다 실제로 해 주세요.”

그는 아주 작게 웃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는 사람 같았다. 수술을 못 하는 손은 여기서 무엇도 못 하는 손이 아니었다. 반대로 몇 가지 일을 할 수 있다고 후유증이 나아진 것도 아니었다.

가방을 정리하고 다시 진술서 앞으로 왔다. 하진은 시계를 봤다.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세현은 더 붙잡아 두고 싶었지만 새 종이를 펴는 것으로 답했다. 오늘 끝낼 문장이 있었다.

첫 줄을 썼다가 지웠다. ‘제가 경보를 끈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지금 확정할 수 있는 문장이 아니었다. 그는 그 아래 다시 썼다. 자신의 기억과 확인된 자료를 구분해 과거 진술을 정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음소거를 했다고 단정했던 진술은 철회했다. 현재 자료와 기억만으로 자신이 그 조작을 했다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는 이유를 붙였다. 활력 변화 이후 판단이 늦어진 사실을 인정한다는 문장은 지우지 않았다. 두 문장이 같은 종이에 있어야 했다.

하진이 소리 내어 읽었다. 그의 뜻보다 강해진 표현이 없는지, 알 수 없다는 부분이 책임이 없다는 말로 바뀌지는 않았는지 물었다. 세현은 가족에게 전달하기 전 조정에서 확인해야 한다는 점도 적었다. 자신이 이 방에서 정정했다고 사건의 결론까지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문장이 길어지자 하진이 중간에서 숨을 쉬었다. 세현은 그 소리를 듣고 문장을 두 개로 나눴다. 핑계처럼 안 보이려고 말을 덧붙일수록 읽는 사람이 받아야 할 짐만 늘었다. 그는 읽어 주는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말 대신 필요 없는 수식어를 지웠다.

“이렇게 쓰면 짧네요.”

“짧아도 어려운 말은 남아요.”

“네. 제가 해야 하는 말이니까요.”

서명할 자리에서 손이 다시 떨렸다. 세현은 습관처럼 왼손을 들어 오른손등을 덮으려 했다. 손을 감추면 보는 사람도 덜 불편할 것 같았다. 그러나 하진은 다른 곳을 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덮어야만 기다려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오른손을 종이에 둔 채 떨림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이름의 첫 글자가 조금 비뚤어졌다. 새 종이에 다시 쓰고 싶었지만 그럴 이유가 없었다. 오늘의 서명은 그의 손으로 끝났다.

하진은 읽은 사람이 감정 결과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남겼다. 세현은 알고 있다고 답했다. 그녀가 해 준 일은 기억을 정답으로 골라 준 것이 아니라, 자기가 모르는 것을 스스로 적을 때 곁에 앉아 있던 일이었다.

현관에서 하진이 신발을 신는 동안 세현은 내일 자료를 전달할 순서를 확인했다. 과거 원장과의 면담 준비와 다음 왕진 일정은 서로 다른 줄이었다. 하진은 팀 일정이 바뀌면 미리 알리라고 했다. 그는 자기 과거 때문에 현재 방문을 말없이 비우지 않겠다고 답했다.

문이 닫히자 방은 금방 조용해졌다. 세현은 컵을 씻었다. 한 손으로 두 개를 겹쳐 들지 않고 하나씩 옮겼다. 컵에 남은 물이 손등을 타고 흘렀다. 오늘은 그 손을 자세히 봐도 수술실이 먼저 떠오르지 않았다. 컵을 놓칠까 봐 천천히 움직이는 현재의 손이 있었다.

책상으로 돌아와 옛 진술서를 봉투에 넣다가 여백에서 익숙한 문장을 발견했다. ‘제가 경보를 놓쳤습니다.’ 원장과의 면담에서 제시받은 표현과 같았다. 앞에서 읽은 음소거 문장과 닮았지만 뜻이 같지는 않았다. 듣지 못한 것, 조작한 것, 판단이 늦은 것이 한 줄에 얽혀 있었다.

세현은 그 문장을 자기 말처럼 다시 읽지 않았다. 누가 제안했고 무엇을 뜻한다고 설명했는지 묻기 위해 표시했다. 다음 면담에서 원장은 이 문장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옛 진술서와 오늘 정정서를 나란히 넣었다. 하나를 찢고 새것만 남기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왕진가방 앞칸의 작은 글씨 종이를 꺼내 책상에 놓았다. 다시 크게 쓸 공간이 비었다. 내일 영숙에게 읽히려면 이제는 누가 듣는 말인지 생각하며 써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