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주대로의 붉은 매듭
피보다 짙은 소기름
갈대밭에서 건진 천과 쪽지, 폐사당 꼬챙이를 푸줏간 판매장부와 대조하면서 습격 흔적의 재료가 드러난다. 석구는 길상을 감추는 대신 직접 데려오고, 마른 반쪽 글에서는 은값이 맞지 않으면 돌아가겠다는 조건이 읽힌다.
노칠이 가리킨 갈대는 다리 아래에서 보면 모두 같은 모양이었다. 민연화는 치맛자락을 무릎 위로 걷고 돌을 디뎠다. 주범수가 먼저 내려가 손을 내밀었으나 그녀는 손 대신 그 옆의 마른 돌을 잡았다. 사람 손은 둘이 함께 넘어질 수 있고 돌은 적어도 먼저 도망가지는 않았다.
그 생각을 했을 때 돌이 흔들렸다.
범수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연화는 한쪽 짚신을 물에 빠뜨리지 않으려 발가락에 힘을 줬다. 위에서 강복단이 웃었다.
“산가지로 돌 무게까지 셀 수는 없지?”
“셌으면 아주머니부터 내려오시라 했겠지요.”
입으로는 받아쳤지만 종아리까지 들어온 물이 차가웠다. 범수는 손을 놓기 전에 다음 디딜 곳을 짚어 줬다. 연화는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갈대 뿌리 안쪽에 붉은 것이 걸려 있었다. 범수가 긴 가지로 건드리려 하자 연화가 말렸다. 위쪽에 종이 모서리가 보였다. 천을 잡아당기면 함께 찢어질 듯했다. 그녀는 품에서 깨끗한 종이를 꺼내려다 젖을 것을 깨닫고 손을 뗐다. 복단이 위에서 얇은 널조각을 내려줬다.
범수가 갈대를 벌리는 동안 연화는 널을 물밑으로 밀어 넣었다. 물결이 한 번 밀려와 종이를 덮었다. 기다렸다가 물이 빠지는 쪽으로 조금씩 움직이자 반쪽 글이 천과 따로 널 위에 올라왔다. 노칠이 그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이 떨어뜨린 것이 맞느냐고 물었다.
“당신이 본 모양과 같소?”
연화가 되물었다.
노칠은 다리 위에서 허리를 굽혔다. 떨어지는 것을 봤을 뿐 글까지 보지는 못했다고 했다. 연화는 그 말을 더 묻지 않았다. 그가 못 본 글을 찾았다는 기쁨에 보았다고 말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마른 곳으로 올라온 뒤 복단이 붉은 천을 펼쳤다. 검게 굳은 가장자리에 개미가 붙어 있었다. 연화는 젖은 종이를 바람 그늘에 두고 천 쪽으로 몸을 돌렸다. 기름 냄새가 났다. 폐사당 수레의 틈에서 맡았던 냄새와 닮았다.
석구가 천에서 손을 뗐다.
“사람 피요?”
“냄새 맡는 재주로 그걸 안다고 하면 무당집 문턱이 닳겠소.”
복단이 말했다. 연화가 천에 붙은 짧은 털을 가리켰다. 소털처럼 보이는 털과 굳은 기름이 함께 있었다. 수레 축에서 받아 둔 푸른 대나무 꼬챙이도 꺼냈다. 노칠은 꼬챙이를 보더니 가까운 푸줏간을 가리켰다. 고기 꾸러미를 묶을 때 저런 것을 쓰는 만쇠라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석구는 꼬챙이보다 길을 봤다. 함께 마구간 밥을 먹던 길상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그랬다. 연화는 그에게 쪽지를 맡기지 않고 널째 자기 손으로 들었다.
“만쇠에게 물을 동안 이것은 말려야겠습니다.”
“글도 못 읽는데 물에 들어간 품부터 들었군.”
복단이 말했다.
연화가 젖은 짚신을 한 번 털었다.
“물에 빠진 글은 외상으로 읽는 셈이지요.”
***
푸줏간 처마에는 고깃덩이보다 빈 갈고리가 많았다. 만쇠는 일행을 보자 손에 든 칼을 도마 위에 내려놓았다. 강복단의 광주리를 먼저 보고, 범수의 허리춤을 보고, 마지막으로 연화가 든 널조각을 봤다.
“살 것도 아니면서 여럿이 오셨네.”
“산 사람을 찾는 길이오.”
복단이 말했다.
“그 길에 당신이 판 것이 끼어들었고.”
만쇠는 도마를 닦던 천을 접었다. 연화는 젖은 종이를 그늘진 평상 한쪽에 놓고 붉은 천과 꼬챙이만 보여 줬다. 만쇠가 꼬챙이를 집으려 하자 그녀는 아직 손에 들고 있겠다고 했다. 대신 남은 묶음을 옆에 놓아 달라고 청했다.
푸른 대나무의 마디와 깎은 폭이 닮았다. 몇 개의 끝에는 칼날이 지나가다 남긴 같은 결이 있었다. 그렇다고 세상의 꼬챙이가 이 집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연화는 언제 이런 묶음을 썼는지 물었다.
“대나무가 날짜를 세오?”
“주인은 외상 날짜를 세실 것 같아서요.”
만쇠가 입을 다물었다. 복단이 평상 모서리에 엽전을 놓았다.
“고기 한 점 잘라 주시오. 질문이 공짜면 답이 자꾸 물러지는 모양이니.”
“고깃값이랑 말값은 다르오.”
“그러니 고기만 사겠소. 말은 안 썩었을 때 당신이 꺼내고.”
만쇠는 고기를 썰다가 붉은 천을 다시 봤다. 칼 끝이 멈췄다. 석구가 먼저 길상의 이름을 꺼냈다. 만쇠의 눈이 그에게 갔다.
“같은 마방 사람이오?”
석구가 그렇다고 하자 만쇠는 뒤쪽으로 돌아갔다. 궤짝에서 얇은 장부를 가져왔다. 종이 끝이 기름에 절어 있었다. 그는 한 줄을 손톱으로 누른 채 보였고, 연화는 날짜와 품목을 읽었다. 소피와 기름, 고기 꾸러미에 쓰던 천이 함께 나간 줄이었다.
길상의 이름이 있었다.
석구가 장부를 잡으려다가 멈췄다. 만쇠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았다. 피를 사 간 사람이 수레에 사람 죽은 자국을 만들 줄 어찌 알았겠느냐고 했다. 연화는 장부에서 눈을 떼고 그를 봤다.
“수레 이야기는 누가 했소?”
만쇠의 입이 닫혔다. 복단도 웃음을 거뒀다.
“나는 아직 이 천을 어디서 주웠다는 말만 했습니다.”
연화가 말했다.
만쇠는 도마에 붙은 기름을 손가락으로 밀었다. 곧 칼을 들어 닦는 척했지만 칼날에 닿기 전에 손이 멎었다. 범수는 그의 손이 아니라 뒷문을 봤다. 막아서지는 않았다. 문밖에는 장사 끝낸 빈 광주리가 쌓여 있었다.
“뒤에 들었소.”
만쇠가 말했다.
“누구에게?”
“길상에게. 내가 옷 버리게 피를 어디 쓰느냐 물었지. 처음에는 짐승 잡은 자리라고 했는데, 물건 더 달라고 왔을 때 수레 밑에도 발라야 한다 했소. 산적이 뒤진 것처럼 보여야 한다고.”
석구가 숨을 들이켰다. 만쇠는 그 소리를 듣고 목청을 높였다. 자기는 사람을 해치라는 말도, 죽은 사람을 봤다는 말도 한 적 없다고 했다. 복단이 칼 놓인 도마를 손바닥으로 한 번 눌렀다.
“그래서 무엇을 팔았는지부터 묻잖소.”
***
만쇠가 남은 천을 꺼내자 가장자리의 올이 붉은 천과 비슷했다. 그는 기름을 굳히는 그릇과 소피를 담았던 통도 보여 줬다. 연화는 냄새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두 물건을 같은 것이라고 쓰지 않았다. 장부의 날짜와 길상이 두 번 찾아왔다는 말, 대나무를 함께 내준 까닭을 따로 물었다.
석구는 평상 끝에 앉았다. 어느 때부터인가 길상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눈을 감고 있었다. 연화가 그 앞에 장부 사본을 놓자 그가 밀어냈다.
“그놈이 여기 없지 않소. 주인 말만 듣고 사람을 죽인 놈처럼 만들 셈이오?”
“죽였다는 말은 아무도 안 했소.”
복단이 답했다.
“죽었다고 믿게 만들었을 수 있다는 말이오.”
“믿게 만들었으면 죽인 것과 다르지 않다고 곧 말할 거요.”
석구의 목소리가 커졌다. 푸줏간 앞을 지나던 사람이 발을 늦췄다. 만쇠는 손짓해 가던 길을 가라고 했다. 연화가 장부 사본을 도로 가져왔다. 그녀는 붓을 들고 적은 문장을 읽었다. 길상이 소피와 기름을 샀다는 것은 만쇠의 말이었다. 그것을 수레에 발랐다는 말도 만쇠가 길상에게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때 사람을 해쳤는지는 아무도 여기서 보지 못했다.
석구가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나눠 적으면 누가 읽소?”
“길상이 먼저 읽게 해야지요.”
“글을 잘 모릅니다.”
“그러면 내가 읽어 주겠습니다. 틀린 데가 있으면 제 입으로 고치게.”
석구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동료의 허물을 안 적으면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미 길상 없는 자리에서 길상의 말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오늘 문을 닫고 나가도 그 말들은 사라지지 않을 터였다.
만쇠가 남은 꼬챙이 몇 개를 내놨다. 연화는 전부 달라고 하지 않았다. 여기서 비교할 만큼이면 됐다. 팔고 남은 묶음이 어디에 있었는지 만쇠가 보는 앞에서 그렸다. 그가 자기 이름까지 쓰느냐고 묻자 연화는 누구에게 들었는지 빼면 길상의 입으로만 남는다고 답했다.
그는 오래 머뭇거리다가 자기 이름 밑에 손을 댔다. 엽전 두 닢으로 받을 고기보다 그 한 번의 동작이 더 비싸 보였다.
“몰랐던 것을 안다고 쓰지는 마시오.”
만쇠가 말했다.
“그러니 이제 아는 것을 모른다고 하지도 마시오.”
연화는 사본을 들어 말렸다. 그 옆에서 젖은 반쪽 종이도 느리게 마르고 있었다. 붉은 천과 함께 걸려 있었다고 같은 사람이 버린 물건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범수는 다리에서 갈대까지 물이 흘러간 방향을 따로 그렸다. 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이 모아 둔 것을 사람이 한 꾸러미로 묶으면 안 됐다.
석구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찾겠습니다.”
누구를 찾겠다는지 묻는 사람은 없었다.
“나를 보면 도망은 안 갈 겁니다. 아니, 도망갈지도 모르겠소. 그래도 내 이름부터 부르겠습니다.”
복단은 푸줏간에서 산 고기를 작은 잎에 나눠 쌌다. 한쪽을 석구에게 줬다. 길상에게 네가 먼저 굶고 왔다고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 석구는 웃지 않았지만 고기를 받았다.
***
해가 낮아질 무렵 일행은 북쪽 길의 주막으로 향했다. 석구가 앞서 길상의 소식을 물으러 갔다. 연화와 범수는 물건을 맡길 곳을 정하고 그 뒤를 따랐다. 복단은 거래하던 행상들이 쉬는 곳마다 길상의 이름을 크게 부르지 않고, 석구가 찾는 마부가 있는지만 물었다. 찾는 사람보다 이름이 먼저 퍼지면 숨을 구멍이 더 깊어질 수 있었다.
연화는 반쪽 종이를 널 위에서 옮기지 못해 두 손으로 들고 걸었다. 바람이 세질 때마다 범수가 몸으로 바람을 가렸다. 그는 한 번도 종이 위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아직 못 읽는 것을 재촉한다고 글자가 더 빨리 마르지는 않았다.
주막에 닿자 월선이 빈 방은 다락뿐이라고 했다. 손님들이 잘 방이 아니라 말릴 것이 먼저 들어갔다. 월선은 화로 가까이 놓으려던 범수의 손을 밀었다.
“고기 굽듯 말리면 글도 익어 없어지겠소.”
복단이 웃으며 아까 산 고기 꾸러미를 내밀었다. 그건 익혀도 된다고 했다. 월선이 받아 들고 아래로 내려가자 방 안에는 바람과 반쯤 마른 종이만 남았다.
글씨가 먼저 선명해진 것은 끝줄이었다. 돌아가겠다는 말. 연화는 종이를 돌려 빛을 비췄다. 젖어 번진 앞부분을 마음대로 잇고 싶었다. 살려 달라는 문장이라면 지금까지의 일이 한쪽으로 곧게 이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남은 글은 그렇게 쓰여 있지 않았다.
‘은값이 아니면 돌아가겠다.’
연화는 한덕수의 글씨를 비교했던 획을 떠올렸다. 남아 있는 끝획과 꺾임을 먼저 옮겼다. 이름이 뜯긴 자리를 덕수라고 채우지는 않았다. 복단이 들어와 소리 내 읽어 달라고 했다.
연화가 문장을 읽자 복단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잡혀간 말은 아니군.”
“돌아올 수 있다고 믿은 사람이 쓴 말입니다.”
연화가 답했다. 믿은 것과 정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다를 수 있었다. 그 사이에 다리가 있었고, 스물넷 삯패와 무기를 찬 여섯이 있었다.
아래층에서 석구의 목소리가 났다. 길상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아니었다. 문 좀 열어 달라는 말이었다. 복단이 다락 입구로 갔다. 연화는 종이를 바람에 날리지 않게 받침을 얹었다.
계단에서 발소리가 둘 올라왔다. 하나는 곧았고, 하나는 앞사람이 멈출 때마다 멈췄다. 석구가 먼저 모습을 보였다. 그 뒤의 사내는 방에 들어서기 전에 바닥에 놓인 종이를 봤다.
그가 눈을 돌리지 못했다.
“아직 그 말이 남았소?”
연화는 붓을 내려놓았다.
이제는 쪽지가 아니라, 돌아오는 길을 알던 사람에게 물을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