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지난 복숭아밭
상표보다 먼저 붙인 표
해명 자료를 서둘러 공개하려던 보리는 농가의 개인 연락처와 창고 위치까지 함께 드러난다는 것을 발견한다. 공개 범위를 농가의 선택에 맞춰 고친 뒤, 해진에게 답을 대신 내달라는 말이 아니라 퇴근까지 곁에 있어 달라는 부탁을 한다.
윤보리는 웃는 복숭아 스티커를 떼어 냈다. 잘못 붙인 것도 아닌데 접착면이 병에 길게 남았다. 손톱으로 긁을수록 끈적한 자국만 커졌다.
“상품은 무사한데 네가 괴롭히고 있네.”
류미정이 빈 견본병을 빼앗아 따뜻한 물에 담갔다. 판매용은 냉장고 안에 있었다. 포장대에서 하루 종일 주무를 병까지 먹는 것으로 쓸 수는 없었다.
보리는 컴퓨터 화면을 돌렸다. 밤새 만든 원재료 이력 페이지였다. 어느 농가에서 어떤 원물을 냈는지, 지난해 언제 냉동 보관에 들어갔는지, 이번에 얼마나 썼는지 빼곡했다. 맨 위에 자기 이름을 넣었다가 지운 흔적도 있었다.
“여기까지 보여 주면 적어도 지금 만드는 건 알겠죠.”
미정은 화면보다 보리의 눈을 봤다. “몇 시에 잤어?”
“표시해야 하는 것부터 봐 주세요.”
“그러니까 몇 시에 잤냐고.”
보리는 대답 대신 시험 인쇄한 QR을 내밀었다. 어제 취소된 주문 세 건은 휴대전화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유지된 열두 건을 보고 안도했다가도, 누가 다시 취소할지 생각하면 자꾸 화면을 새로 고치게 됐다. 아무것도 숨기지 않으면 조금은 덜 의심받을 것 같았다.
미정이 QR을 읽었다. 페이지를 아래로 내리던 엄지가 멎었다.
“조합장님 휴대전화가 여기 있네.”
“원물 인수표에서 가져왔어요.”
“전화할 사람을 복숭아 옆에 묶어 팔게?”
보리가 몸을 숙였다. 이름 아래 번호가 있었다. 그 아래에는 외부 보관처 주소와 창고 안 상자 위치까지 붙어 있었다. 내부에서 재료를 찾아 쓰려고 만든 표를 통째로 옮긴 탓이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질문을 막으려다 다른 사람의 문까지 열어 놓고 있었다.
“아직 공개 안 했어요.”
“그래서 지금 발견한 게 다행이지.”
보리는 게시 버튼에서 손을 뗐다. 잠시 뒤 최옥순이 앞치마를 벗으며 들어왔다. 두 사람 표정이 굳어 있자 또 주문이 취소됐느냐고 물었다. 미정이 휴대전화를 보여 주자 옥순은 돋보기를 꺼냈다.
“내 이름은 잘 나왔네. 전화번호 글씨는 좀 작은데.”
“빼려고요.”
“왜? 내 농산물인데 이름 못 걸 이유 있나.”
옥순은 화면을 확대했다. 밭 사진을 같이 올리자고도 했다. 햇볕 아래 줄지어 선 나무와 농민 얼굴이 있으면 낯선 사람이 만든 물건 같지 않을 거라고 했다. 보리는 대꾸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밤새 이 표를 만든 이유와 너무 닮아 있었다.
“제가 잘못 옮겼어요. 확인할 정보랑 찾아올 정보를 섞었어요.”
“찾아오면 팔면 되지.”
미정이 옥순의 앞치마를 받아 벽에 걸었다. “새벽에 원물 어디 뒀냐고 찾아와도요? 제빵 끝나고 자는데 우리 집으로 반품 들고 오면요?”
옥순이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그건 조합으로 해야지.”
“그럼 조합 연락처를 씁시다.”
보리는 개인번호를 지웠다. 농가 주소도, 창고 안쪽 위치도 지웠다. 상품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표시는 남겨 두고, 추가로 보여 줄 이력에는 농가 코드와 품종, 확인한 당도범위와 가공일을 넣었다. 내부 원장은 화면 뒤로 닫혔다. 페이지에 빈자리가 생기자 오히려 어느 배치의 이야기인지 눈에 들어왔다.
옥순은 여전히 자기 이름 옆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내가 얼굴 걸겠다는 것도 안 되나?”
“그건 조합장님이 정하세요. 다른 집도 각자 정하게 하고요.”
“이름 거는 집은 팔리는 데 보탠 건데?”
보리는 화면을 보던 자세를 바로 했다. 그 말 뒤에는 원물값이 있었다. 얼굴을 내놓는 농가와 그렇지 않은 농가가 다른 값을 받아야 한다면, 싫다는 사람도 끝내 사진 앞에 서야 할 터였다.
“같은 등급 원물값을 이름으로 바꾸지는 말아요.”
옥순의 눈썹이 올라갔다. “내가 더 달랬니?”
“아직 안 그러셨어요. 그래서 지금 정하고 싶어요.”
미정이 식탁에 의자를 하나 더 놓았다. 서서 다투던 두 사람은 얼떨결에 마주 앉았다. 옥순은 물컵을 돌리다가 보리가 떼어 낸 복숭아 스티커를 봤다.
“내가 네 편 들겠다고 이름 더 크게 걸면, 다른 집은 네 편 안 드는 것처럼 되겠구나.”
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먼저 나와 주어서 목에 걸려 있던 힘이 조금 풀렸다.
“저 때문에 얼굴을 내놓지는 않으셨으면 해요.”
“너 때문만은 아니야. 내 것도 팔아야 하니까 조급하지.”
옥순은 종이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실명 공개와 사진 공개를 따로 묻자는 말을 먼저 했다. 보리는 체크칸을 그리다 멈췄다. 종이를 내미는 것으로 다 끝났다고 생각하면 또 어제와 같아질 것 같았다.
“휴대전화에서 실제로 어떻게 보이는지도 보여 드릴게요.”
다섯 농가에 확인을 받는 동안 포장은 늦어졌다. 한 사람은 작은 화면에서 이름이 너무 커 보인다며 코드로 바꿨다. 다른 사람은 자기 이름은 괜찮지만 밭에 가족이 함께 찍힌 사진은 싫다고 했다. 옥순은 처음에 권하던 말투를 접고 화면을 돌려 주었다. 다시 묻는 대신 기다렸다.
끝내 세 농가가 실명을, 두 농가가 코드만 남기기로 했다. 보리는 두 종류의 견본을 나란히 세웠다. 병 안에 든 것은 없는데도 이름 없는 병이 덜 좋은 것처럼 보일까 봐 걱정됐다. 미정이 같은 크기와 같은 줄 간격으로 맞추라며 자를 내밀었다.
“여기도 차별하면 안 되지. 이름 있는 쪽만 금테 두르지 말고.”
“금테 넣을 예산 없습니다.”
“밤샘해서 금테 그릴 체력은 있었겠지.”
보리는 웃었다. 미정은 그제야 자기 사진이 들어간 작은 칸을 찾아냈다. 밀가루가 뺨에 묻고 입이 반쯤 벌어져 있었다.
“이건 삭제해.”
“동의받으려고 후보에만 넣었어요.”
“반죽 묻은 얼굴로 판매가 늘면 그건 맛이 아니라 공포야. 아는 사람도 환불하겠다.”
옥순이 사진을 확대하더니 입을 가렸다. 미정은 두 사람의 휴대전화를 하나씩 뒤집어 놓았다. 웃다가 캡처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보리는 후보 사진을 내려놓고 미정의 말대로 제품 사진만 남겼다. 농민도 제빵사도 자기 얼굴을 스스로 정할 수 있게 하니 페이지가 훨씬 조용해졌다.
해진이 도착했을 때 보리는 시험 QR을 새로 자르고 있었다. 그는 관측소에서 오는 길이라며 주방 밖에서 이름을 불렀다. 보리는 가위를 내려놓고 나갔다. 어제 그의 휴대전화에서 들킨, 보내지 않은 위로 문장이 자꾸 생각났다.
“기사님도 하나 봐 주세요. 손님처럼.”
해진은 QR을 읽고 제조일과 문의처부터 찾았다. 보리는 그가 좋은 말을 고르는 동안 먼저 물었다.
“둘이 있을 땐 기사님 말고 이름으로 불러도 돼요?” 보리가 물었다.
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리는 그럼 서로 말을 놓자고 덧붙였다. 사람들 앞에서는 지금처럼 하자는 조건도 붙였다. 해진은 웃다가 다시 종이를 보았다.
“왜 이렇게 혼자 다 했어?”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나도 자를 수는 있는데.”
그가 종이 모서리에 삐뚤게 남은 흰 선을 가리켰다. 보리는 종이를 뒤집었다. 정교한 작업을 잘하는 손이 오늘은 줄 밖을 세 번이나 나갔다. 해진은 가위를 달라고 하지 않았다. 주방 안의 빈 의자를 보고 기다렸다.
“그러면 열 장만. 나머지는 내가 할게.”
“열 장 넘으면 추가요금?”
“선 넘으면 불량 처리.”
그는 웃으며 손을 씻었다. 보리는 의자를 조금 옆으로 밀었다. 누군가 곁에 앉도록 자리를 내주는 데 이렇게 의식적으로 힘을 쓴 적이 있었나 싶었다. 해진은 정말 열 장만 잘랐다. 나머지 종이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어제 쓰다 만 말은 뭐였어?”
가위 소리가 끊겼다. 미정은 멀리서 냉장고 문을 닫는 척했다. 해진은 종이 끝을 맞춘 뒤에야 보리를 봤다.
“내가 안다고 말하려다가 지웠어.”
“뭘?”
“네가 얼마나 억울한지. 내가 다 아는 건 아니니까.”
보리는 자투리 종이를 손바닥 안에서 말았다. 다 안다는 말은 여러 번 들었다. 그러고 나면 그녀가 어떤 말을 해도 이미 끝난 이야기를 또 하는 사람이 됐다. 해진은 지금도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모르는 채로 좀 있어 줘.”
“오늘은 몇 시까지?”
“나 퇴근할 때까지.”
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이니 한 철이니 하는 말 없이 오늘 몇 시까지인지 묻는 것이 좋았다. 보리는 열한 번째 종이를 그 앞으로 밀었다. 그는 추가요금이라는 말 대신 새 선을 자르기 시작했다.
공개 페이지를 연 뒤 옥순은 자기 휴대전화로 한 번 더 확인했다. 개인번호는 나오지 않았고, 코드를 선택한 농가의 원물값도 전과 같았다. 미정은 냉장고 안 판매분의 표시와 견본을 대조했다. 보리는 어젯밤 만든 긴 해명문을 붙이지 않았다. 이 병에 관해 대답할 수 있는 것만 남겨 두었다.
마감 무렵 반복 조회가 보였다. 한 유입 표시에 예전 회사 쪽 주소가 섞여 있어 보리의 시선이 멎었다. 처음에는 법무팀이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해진에게 화면을 돌리려다, 그것만으로 누가 읽었는지 알 수는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다. 그녀는 표시된 문자열과 시각만 남기고 화면을 닫았다. 찾아와 싸울 사람을 상상하며 밤을 보낼 수는 없었다.
전화가 울렸다. 장터 상인회였다. 다음 날 판매를 계속해도 되는지 회의가 열린다는 말에 옥순의 표정이 바뀌었다. 미정이 빈 견본병을 상자에 넣었다. 오늘 다 고쳤다고 생각한 표가 내일은 설명할 물건이 됐다.
보리는 코트를 들고도 움직이지 못했다. 해진이 먼저 나가 있겠다고 했다. 주방 밖 불빛 아래 그의 그림자가 길게 놓였다. 보리는 전원을 끄고 가방을 멨다. 기다리는 사람이 자기 대신 답을 해 줄 수는 없었다. 그래도 문을 열고 나갈 방향은 분명했다.
“퇴근했어.”
그가 차 열쇠를 넣고 보폭을 맞췄다. “그럼 오늘 약속은 지켰네.”
보리는 아직 따뜻한 손바닥 안에서 가위 자국을 폈다. 가방에는 새 이력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내일 그것을 펼쳐 놓고 묻는 말을 끝까지 들을 생각이었다. 숨이 막히면 물을 마시고 다시 대답하면 됐다. 내일 회의에서도 자기 자리에 앉아 있어야겠다고, 그의 곁을 걸으며 처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