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야간 왕진
정상이었던 스피커
퇴역한 마취기는 작업대 한쪽에서 전원선이 빠진 채 서 있었다. 노란 경보 스피커 아래에 자가검사 인쇄물이 놓였다. 사고 세 시간 전에 정상으로 나온 결과였다. 오세현은 인쇄물보다 버튼의 위치를 먼저 봤다. 손끝에서 아주 작은 동작이 되살아났다.
퇴역한 마취기는 작업대 한쪽에서 전원선이 빠진 채 서 있었다. 노란 경보 스피커 아래에 자가검사 인쇄물이 놓였다. 사고 세 시간 전에 정상으로 나온 결과였다. 오세현은 인쇄물보다 버튼의 위치를 먼저 봤다. 손끝에서 아주 작은 동작이 되살아났다.
박건이 두 장비 사이에 종이를 세웠다. 한쪽은 봉인된 사고 장비, 다른 쪽은 같은 기종의 시연 장비였다. 시연 쪽 전원선만 연결돼 있었다. 윤채영은 장비 식별 표시와 작업대의 위치를 확인하고 자기 기록을 폈다. 세현은 박건이 사고 장비의 봉인 나사를 건드리지 않는 것을 봤다.
“저쪽을 켜서 확인하면 빨리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자신이 그 말을 했다는 것이 뜻밖이었다. 앞서 고미라가 쓰기방지 장치로 복제하는 동안에는 원본을 보존해야 한다고 이해했다. 그런데 기억 속 버튼이 눈앞에 있으니 한번 눌러 보고 싶었다. 그때의 손동작을 정확하게 만들어 놓으면 빈칸도 채워질 것 같았다.
박건은 전원선이 빠진 장비를 가리켰다.
“오늘 켜면 오늘의 기록이 붙습니다. 저 봉인 장비는 그대로 두겠습니다. 동작 순서는 옆 장비에서 보고, 보존된 파일은 문서하고 대조합니다.”
세현은 손을 주머니에 넣지 않고 책상 위에 뒀다. 채영은 박건의 말을 기록했다. 사고 장비를 재작동했다고 읽힐 만한 줄은 없었다. 그녀는 시연이 과거의 상황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인지 물었다. 박건은 아니라고 했다. 같은 기종의 기본 순서를 보는 것이었다.
그가 시연 장비에서 경보를 발생시켰다. 소리가 울렸다. 세현의 어깨가 먼저 굳었다. 창가 냉장고 옆에서 들었던 농축기 경보와는 다른 소리였는데 몸은 두 소리를 구분할 겨를 없이 먼저 반응했다. 그는 화면의 글자를 읽으려 했지만 첫 줄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박건이 기다렸다. 채영도 말을 넣지 않았다. 세현은 소리가 들린다는 것부터 말했다. 박건이 화면의 경보 상태를 짚었다. 세현은 그 글자를 읽었다. 시연 장비의 사건 목록에 새 줄이 생겼다.
“지금은 발생입니다.”
박건이 음소거를 누르자 소리가 멎었다. 세현은 숨을 내쉬었다. 귀가 갑자기 비어 버린 느낌이었다. 그는 이 침묵을 오래 기억해 왔다. 자신이 누른 버튼 뒤에서 소리가 사라졌고, 그래서 모두가 경보를 놓쳤다는 그림이었다.
박건은 사건 목록을 다시 열었다. 발생 줄은 없어지지 않았다. 음소거 동작도 기록 안에 남았다. 세현은 서로 붙은 두 줄을 봤다. 화면을 바꾸어도 목록을 다시 열면 두 줄이 있었다.
“잘못 눌러도 남습니까?”
“지금 보여 드린 음소거 동작이라면 남습니다. 소리가 멎는 것과 사건이 지워지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세현은 버튼의 모서리를 봤다. 손으로 만질 수 있을 만큼 가까웠지만 자기 기억을 증명하려고 장비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 사고 장비는 반대편에서 계속 조용했다. 조용한 장비 둘이 서로 다른 이유로 조용하다는 것을 그는 이제 구별해야 했다.
채영이 어제 복제본에서 본 시간축을 펼쳤다. 두 시 십일 분부터 십칠 분까지 활력값은 이어졌고 경보 이벤트 번호만 비어 있었다. 박건은 인쇄물을 시연 장비 쪽으로 옮겼다. 발생과 음소거 뒤에도 남은 줄을 그 옆에 뒀다.
“제가 잘못 눌렀으면 저 여섯 분이 없을 수도 있다는 건요?”
세현이 다시 물었다. 박건은 잠깐 그를 봤다.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사람이 기억을 찾는 중인지 용서를 거부하는 중인지 구별할 수는 없었다. 그는 대신 문서의 해당 순서를 펴 놓았다.
“음소거만으로 저 이벤트 부재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있어야 할 흔적이 없으니까요.”
채영은 음소거가 아니었다고 확정한 것이냐고 물었다. 박건은 과거에 어떤 손이 어느 버튼을 눌렀는지를 오늘 시연만으로 확정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다만 단순 음소거 때문에 사건 자체가 여섯 분 사라졌다는 설명은 자료와 맞지 않았다.
세현은 두 문장을 따로 받아들여야 했다. 자신이 눌렀다는 기억이 틀릴 수 있다. 그렇다고 무엇이 있었는지 다 안 것은 아니다. 그 사이 빈자리가 어제의 공백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오래 붙들고 있던 죄책감에는 적어도 모양이 있었다. 이제 그 모양 한쪽이 떨어졌다.
박건은 시연을 끝내고 제조사 기술문서를 꺼냈다. 정상 병원에서 확보한 백업본도 열었다. 채영이 자료의 출처를 읽었고 박건은 해당 기종의 저장 순서와 대조할 줄을 짚었다. 사고 장비의 전원선은 계속 뽑혀 있었다. 오늘의 재현은 그 장비에 새로 경보를 쌓는 일이 아니라 문서와 정상 기록을 맞추는 일이었다.
정상 백업에는 음소거한 뒤에도 사건 번호가 이어지는 구간이 있었다. 세현은 한 줄에서 다음 줄로 펜을 옮겼다. 자신의 환자 활력값은 이어졌는데 경보 열이 비었던 복제본이 다시 떠올랐다. 숫자를 계속 쓴 장비가 소리를 위한 사건만 비워 둔 이유를 이제 물어야 했다.
“스피커가 고장 났다면요?”
“사고 세 시간 전 자가검사는 정상입니다. 그 후 모든 시각까지 정상이라고 보증하는 기록은 아닙니다.”
박건은 자가검사 인쇄물의 날짜와 시각을 읽었다. 세현이 기대할 수 있는 면죄부를 주지도, 오래 믿은 죄를 다시 붙여 주지도 않았다. 스피커가 정상으로 시험됐다는 사실, 음소거해도 사건은 남는 저장 규칙, 지금 남아 있는 여섯 분의 부재가 각각 놓였다.
채영이 문서 위에 새 선을 그었다. 세현은 자기 판단이 늦은 시각을 그 옆에 적을 준비를 했다가, 오늘 감정 대상이 무엇인지 먼저 물었다. 박건은 경보 기능과 저장 과정이라고 답했다. 그의 판단 지연을 이 시연의 결과로 지우는 칸은 없었다.
“그날 제가 더 빨리 알아봤어야 하는 사실은 남습니다.”
세현이 말했다. 채영은 그 말을 오늘 자료와 겹치지 않는 줄에 옮겼다. 박건은 화면의 사건 목록을 닫았다. 방 안에는 기계 팬 소리와 종이 넘기는 소리만 남았다.
“남기는 건 좋습니다. 하지만 이 빈칸을 그 말로 대신 채우진 마십시오.”
박건의 손이 여섯 분의 공백 위에 섰다. 세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모든 잘못의 이름이 되면 더는 모르는 질문이 없어진다. 그 상태는 고통스러웠지만 편한 부분도 있었다. 피해가족이 알고 싶었을 질문들이 거기서 멎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뒤늦게 왔다.
감정서 초안에 박건은 시연 장비의 범위를 적었다. 같은 기종의 정상 동작을 보여 주었고, 봉인된 사고 장비는 통전하지 않았으며, 정상 백업과 기술문서를 대조했다는 문장이었다. 시연의 결과만으로 사고 당시 모든 상태나 특정 조작자를 확정하지 않는다는 한계도 붙였다.
세현은 한계라는 단어를 읽었다. 병원을 떠날 때 그 단어는 자신의 손에만 붙어 있었다. 오늘은 장비를 분석하는 방법에도 붙었다. 손가락이 조금 떨렸지만 그는 종이를 눌러 숨기지 않았다.
채영이 초안의 마지막 줄을 다시 읽었다. “가족이 이걸 받으면, 스피커는 정상이었는데 왜 못 들었느냐고 묻겠죠.”
박건은 인쇄물을 앞으로 돌렸다. “정상 자가검사를 한 시각이 여기 있습니다. 이 줄을 사고 전부의 정상 판정으로 옮기면 답이 틀려집니다.”
세현은 그 설명을 자신이 할 수 있는 말로 되짚었다. 사고 세 시간 전 시험에서는 정상으로 나왔지만, 그 결과 하나가 이후의 전송과 저장까지 증명하지는 않는다. 음소거하면 사건이 남아야 하는 규칙과 남지 않은 구간은 따로 물어야 한다. 문장을 끝내자 박건이 그 부분을 감정서에 나란히 놓았다.
“그럼 제가 오늘부터 할 수 있는 설명도 바뀌는군요.”
채영은 펜을 뗐다. “전부 알았다는 설명으로 바뀌진 않습니다.”
세현은 알겠다고 했다. 이전에는 자신이 잘못 눌렀다는 한 문장 다음에 오래 침묵했다. 오늘은 그 한 문장을 확정할 수 없다고 말한 뒤에도 설명할 것이 남았다. 그는 세 시간 전의 시험 결과를 여섯 분의 빈칸 위에 덮지 않고 옆으로 밀었다. 두 종이의 가장자리가 작업대에서 서로 닿았다.
채영이 동의한 분석 범위를 확인하고 다음 자료 요청을 적었다. 장비에서 서버로 넘어가는 기록, 넘어간 뒤 보존하는 기록을 함께 봐야 했다. 박건은 자신이 확인할 수 있는 저장 순서와 전산감정인이 살펴야 할 전송·보존 영역을 나눠 짚었다. 두 사람의 펜이 같은 빈칸을 다른 쪽에서 가리켰다.
세현은 버튼을 기억나는 대로 손가락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네모의 오른쪽이 닫히지 않았다. 채영이 그 그림을 기록에 넣을지 묻자 그는 손을 멈췄다. 오늘 본 버튼에 따라 어제의 기억이 바뀔 수도 있었다. 그는 옛 진술과 새 자료를 섞어 다시 그리지 않았다.
“기억나는 모양은 있지만, 지금 정확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채영은 그 말을 별도로 적었다. 세현은 그림을 완성하지 않은 손을 내려놨다.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할 때마다 들었던 경보를 지운 의사라는 말은 아직 귀에 있었다. 없어진 것은 경보음이 아니라 그 말만으로 사건을 끝낼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박건이 작업대의 인쇄물을 묶었다. 봉인 장비의 나사는 그대로였다. 세현은 그 나사를 한 번 보고 돌아섰다. 오늘 열리지 않은 것이 반드시 확인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채영이 펼친 다음 종이를 봤다.
사고 병동의 간호기록이었다. 경보 이벤트가 비어 있던 같은 여섯 분 동안 중앙 경보판도 조용했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세현은 장비의 노란 스피커에서 종이의 중앙이라는 글자로 시선을 옮겼다. 소리가 한 곳에서 멎은 기억을 오래 붙들었는데, 이제 다른 자리에서 듣지 못한 사람이 기록 안에 있었다.
채영이 그 문장의 작성자를 확인할 칸을 남겼다. 박건은 기록에 없는 사람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세현은 조용했다는 글자를 읽고, 더는 자기 입을 닫는 것으로 그 침묵에 답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