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는 소리 없이 왔다.
파서진 저잣거리의 처마들이 하나씩 물을 받기 시작할 무렵, 취선객잔 부뚜막에서는 국밥이 끓고 있었다. 팽노가 솥 뚜껑을 들어 올려 국물을 한 번 저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노인은 다시 뚜껑을 덮고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불길을 바라보았다. 그 옆에서 한소령은 간밤에 쌓인 그릇들을 찬물에 담가 닦고 있었다. 손이 시렸다. 개의치 않았다.
설리항이 쓰러진 것은 사흘 전이었다.
오방맹 부맹주 설리항. 철면서생. 막리연의 보고서 원본이 강호 각 문파에 전달된 날 밤, 파서진에 직접 나타났던 그 사람. 소령은 그 이름을 머릿속에서 꺼내는 데 아직도 한 박자가 걸렸다. 꺼내면 손이 조금 떨렸다. 그래서 되도록 꺼내지 않으려 했다. 대신 그릇을 닦았다. 찬물 속에서 손을 움직이면 손이 떨리지 않았다.
"짜지 않게 끓였어."
팽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소령이 손을 들어 물기를 털었다.
"예."
"먹어."
소령은 그릇을 행주로 닦아 선반에 올리고 팽노 옆에 앉았다. 국밥 한 그릇이 눈앞에 놓였다. 뜨거운 김이 올랐다. 소령은 숟가락을 들었다가 잠시 멈추었다. 국물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흔들렸다.
"할아버지."
팽노가 눈을 들었다.
"청명문이라는 이름을 다시 써도 됩니까."
노인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궁이 속 불이 낮게 타닥거렸다. 팽노는 자신의 국밥 그릇을 들어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내려놓았다.
"써라."
그것이 전부였다. 소령은 숟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짜지 않았다. 뜨거웠다. 삼켰다.
막리연이 취선객잔에 들어온 것은 아침 해가 처마 끝을 넘어설 무렵이었다. 그는 낡은 포대기 하나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는데, 안에 뭐가 들었는지 묵직해 보였다. 담여화가 약재 정리를 하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고는 입을 삐쭉였다.
"짐 싸는 거예요, 수상한 아저씨?"
"수상한 아저씨라는 호칭은 이제 졸업할 때 됐지 않냐."
"그러면 수상한 어른?"
막리연이 웃었다. 소령은 선반을 닦던 행주를 내렸다. 막리연의 눈이 소령에게 왔다. 잠깐이었다. 그 잠깐 안에 여러 말이 들어 있었다.
"어디 가십니까."
소령이 물었다. 존대였다. 막리연은 포대기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오방맹 본부. 보고서 원본이 각 문파에 전달됐으니 이제 맹 안에서도 움직임이 있을 거야. 그 안을 직접 봐야 해. 설리항이 쓰러졌다고 끝난 게 아니니까."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면서 묻냐."
"언제 돌아오십니까."
막리연이 대답하지 않았다. 소령도 다시 묻지 않았다. 담여화가 약재 다발을 묶던 손을 멈추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아무 말 없이 다시 묶기 시작했다. 취선객잔 안에 빗소리만 남았다.
"한 가지만."
막리연이 포대기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낡은 비단에 싸인 작은 묶음이었다. 소령 앞에 놓았다.
"열어봐."
소령이 비단을 풀었다. 안에는 붓으로 쓴 종이 몇 장이 있었다. 청명문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도현진의 이름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 막리연의 필체로 적힌 날짜와 증언들이.
"보고서 원본의 사본이야. 진본은 이미 갔고. 이건 네 거다."
소령은 종이를 들어 올리지 않았다. 손끝으로 글자를 한 번 짚었다. 도현진. 사부의 이름.
"고맙습니다."
"감사 인사는 내가 해야지. 네가 그 검을 닫기로 한 덕에 나도 좀 가벼워졌다."
막리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팽노가 부뚜막 쪽에서 국밥 한 그릇을 들고 나왔다. 말없이 막리연 앞에 내려놓았다. 막리연이 고개를 숙였다. 팽노는 이미 돌아서고 있었다.
막리연이 떠난 것은 정오 무렵이었다.
빗속으로 등이 사라지는 것을 소령은 처마 아래에 서서 보았다. 담여화가 옆에 와서 섰다. 잠시 둘이 나란히 그 등을 바라보았다.
"돌아올 거야."
담여화가 말했다. 단언이었다.
"그래야지."
소령이 짧게 받았다. 담여화가 소령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쳤다.
"야, 한소령. 그래서 이제 뭐 할 거야."
소령은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보았다. 일정하게, 끊이지 않고 떨어졌다.
"청명문."
담여화가 눈을 크게 떴다.
"문파 다시 세운다는 거야?"
"문파가 아니야. 이름."
소령이 처마 기둥에 기댔다. 등에 새겨진 검결이 닿았다. 3년 동안 거기 있었다. 앞으로도 거기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완성해야 할 무기가 아니었다. 사부가 새겨준 것이 무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소령은 이제 알았다. 봉인이었다. 그리고 그 봉인을 소령이 선택으로 지킨 것이었다.
"청명이라는 이름이 원한이 되어버렸어. 내가 3년 동안 그렇게 만들었거든. 복수하면 다 되는 줄 알았으니까."
담여화는 말하지 않았다.
"근데 사부는 처음부터 그게 아니었어. 검을 세우되 사람을 세우라고 했거든. 나는 그 말을 3년 동안 복수의 방법으로 읽었는데."
소령이 기둥에서 등을 뗐다. 빗속을 바라보았다.
"사람을 세우는 게 먼저였던 거야. 검은 그 다음이고."
담여화가 조용히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건데."
"여기서부터."
소령이 취선객잔 안쪽을 돌아보았다. 팽노가 부뚜막 앞에 앉아 있었다. 오후 국밥 준비가 시작된 것이었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돼. 그릇 닦고, 물 긷고, 국밥 짜지 않게 끓이는 것부터."
담여화가 잠시 소령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야. 그거 나도 하는 건데."
"그래서 여기서 시작하는 거야."
담여화가 웃음을 참으려다 실패했다. 소령도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래간만이었다. 얼굴이 어색했다.
저녁이 되었다.
취선객잔에 손님 셋이 들어와 국밥을 시켰다. 소령이 그릇을 날랐다. 손님 중 하나가 소령의 얼굴을 보고 파서진 애냐고 물었다. 소령이 예, 했다. 손님이 이번에 오방맹이 시끄러웠던 거 들었냐고 물었다. 소령이 조금 들었습니다, 했다. 손님이 그래도 우리 같은 것들은 모르는 게 편하다고 했다. 소령이 그릇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손님."
손님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국밥을 먹기 시작했다. 소령은 빈 쟁반을 들고 돌아섰다.
밤이 되어 손님들이 다 나가고, 팽노가 불을 줄이고, 담여화가 집으로 돌아갔다. 소령은 혼자 공터에 나갔다. 검을 뽑지는 않았다. 그냥 섰다. 빗줄기가 가늘어져 있었다. 하늘이 조금 열려 있었다.
사부. 소령은 말하지 않고 생각했다. 사부가 뭘 남긴 건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아직 다 아는 건 아닌데. 그래도 조금은.
등에 새겨진 검결이 빗기운 속에서 조용했다. 완성되지 않은 채로, 그러나 이제 그것으로 충분한 채로.
소령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공터를 나왔다. 내일 아침 국밥을 짜지 않게 끓여야 했다. 그리고 팽노의 어깨 상태를 봐야 했다. 그리고 담여화 어머니의 약재를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막리연이 보낸 소식이 오면 읽어야 했다.
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청명(靑冥). 푸른 하늘. 소령은 객잔 문을 열며 그 이름을 조용히 입 안에서 굴렸다. 원한이 아니었다. 기준이었다. 다음에 이 이름을 기억할 누군가를 위한, 살아 있는 기준.
문이 닫혔다. 취선객잔 안에 팽노의 호롱불이 켜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