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오후 두 시 사십 분이었다.
서하는 점심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상태로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분명히 뭔가를 입에 넣었다. 편의점 삼각김밥이었거나 자판기 커피였거나. 책상 위에 캔 하나가 굴러다니고 있었으니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 그런데 머리는 울렸다. 2026-LT-0391. 소송 번호가 자꾸 눈에 걸렸다. 화면을 스크롤해도, 다른 탭을 열어도, 결국 그 번호로 돌아왔다.
도윤이 자리를 비운 게 열두 시 이십 분이었다. 서하는 그걸 일부러 확인한 게 아니었는데, 기억하고 있었다. 도윤은 파일 하나를 겨드랑이에 끼고 아무 말 없이 일어섰다. 화장실 가는 각도가 아니었다. 복도 쪽이 아니라 계단 쪽이었다. 서하는 그 뒷모습을 삼 초쯤 쳐다보다가 눈을 돌렸다. 괜한 짓이었다. 그런데 눈이 돌아가지 않았다. 계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겨우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야, 어디 갔는지 알아?"
지우가 옆에서 낮게 말했다. 키보드 치는 척하면서.
"모르는 척하는 거야, 진짜 모르는 거야?"
서하는 대답 대신 캔을 집어 들어 마지막 남은 커피를 마셨다. 텁텁했다. 식은 지 오래된 맛이었다.
"저도 모르는 거예요."
"박 상무님 쪽."
지우가 짧게 말하고 다시 화면을 봤다.
"차진혁 수석한테는 안 갔어."
그 말이 공기 속에서 잠깐 떠 있었다. 서하는 캔을 내려놓았다. 찰그랑,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났다. 옆 자리 수진이 눈을 들었다가 다시 내렸다. 못 들은 척이었다.
도윤이 보고서를 박 상무 쪽에 먼저 가져갔다는 건, 차진혁 수석의 선언을 모른 척했다는 뜻이었다. 아니면 알면서 건넜다는 뜻이거나. 그 어느 쪽이든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서하는 어제 차진혁이 팀장 회의 후 복도에서 한 말을 다시 떠올렸다.
'박 상무 쪽엔 내가 따로 설명할 것.'
그 문장이 지시였다는 걸, 도윤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복도에 서 있던 사람이 서하만이 아니었으니까.
"이거 괜찮은 거예요?"
서하가 물었다.
지우는 잠깐 뜸을 들였다.
"글쎄. 도윤이 형이 괜찮다고 판단했으면 괜찮은 거겠지."
그러더니 마우스를 딸깍 눌렀다.
"근데 괜찮지 않을 수도 있어."
서하는 그 말을 머릿속에서 한 번 더 굴렸다. 지우가 농담처럼 말할 때, 진심이 담겨 있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이 그쪽이었다. 지우는 이미 딴 데를 보고 있었고, 서하는 그냥 캔을 쓰레기통 쪽으로 밀어 두었다.
그때 수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서하 쪽을 봤다.
"윤서하 씨, 잠깐."
손에는 서류 두 장이 들려 있었다. 프린트가 아직 따끈따끈한 것 같았다.
"복사실 쪽으로."
복사실은 팀 구역 끝에 있었다. 사람이 드문 시간대에 가끔 비공식 대화가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형광등 하나가 미세하게 깜빡이고, 복사기 옆 선풍기가 느리고 균일하게 돌고 있었다. 서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따라갔다.
복사기 옆에 서자 수진이 서류를 펼쳐 보였다. 숫자들이 빼곡한 표였다.
"이거 봐요. 접수 이력."
손가락으로 날짜 두 개를 짚었다.
"두 번째 기각 통보, 여기. 그리고 세 번째 민원 접수, 여기. 그 사이가 얼마예요?"
서하가 두 날짜를 눈으로 따라갔다. 계산하는 데 이 초도 안 걸렸다.
"육 개월 열이틀."
"맞아요."
수진이 서류를 살짝 접었다.
"근데 이 기간에 시스템상 기록이 없어요. 민원 접수도, 내부 검토 메모도, 담당자 배정 이력도. 그냥 비어 있어요."
"시스템 오류 아닐까요?"
"그럼 오류 처리 로그가 남아야 해요."
수진의 말투는 단호했다. 단정적이지 않았지만 흔들리지 않는 종류였다.
"없어요, 그것도."
서하는 잠깐 말이 없었다. 선풍기 소리만 낮게 돌았다. 종이 냄새와 토너 냄새가 섞인 공기였다.
"그럼 누가 지운 거예요?"
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서류를 서하에게 건넸다.
"이거 혼자 갖고 있지 말고, 도윤 씨한테 전달해요. 오늘 안으로."
말끝이 약간 낮아졌다.
"차진혁 수석이 알기 전에."
서하는 서류를 받아 들었다. 종이가 생각보다 가벼웠다. 하지만 들고 있는 손이 어딘가 조금 무거웠다. 수진이 먼저 복사실을 나갔다. 서하는 잠깐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선풍기가 한 바퀴 더 돌았다.
자리로 돌아오는 길에 화장실을 들렀다. 용무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잠깐 혼자 있고 싶었다. 세면대 앞에서 물을 틀어놓고 손을 씻는 척했다. 거울 속 자기 얼굴이 낯설지는 않은데 피곤해 보였다. 뺨이 약간 당겨 있었다. 잠을 잘 못 잔 사람의 얼굴이었다. 서하는 물을 잠그지 않은 채 한 박자 더 거울을 봤다. 그냥 봤다.
핸드폰을 꺼내 봤다. 아버지 문자창이 맨 위에 있었다.
'밥은 먹고 다니냐.'
어제 오후 다섯 시 오십칠 분. 읽음 표시가 붙어 있었다. 서하가 읽었으니까. 읽고 닫고, 열고 닫고, 지하철에서 또 열었다가 닫은 것이었다. 지금도 손가락이 창 위에 올라갔다가 멈췄다. 뭐라고 써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네, 먹고 다녀요.'
그 다섯 글자면 됐다. 근데 그게 왜 이렇게 안 써졌는지. 손가락이 허공에서 잠깐 떠 있다가 내려왔다.
물을 잠그고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도윤이 자리에 와 있었다. 서하는 잠깐 망설이다가 수진에게 받은 서류를 들고 도윤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선배님, 수진 씨가 전달하라고 했어요."
도윤이 서류를 받아 들고 훑었다. 이 초, 삼 초.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눈이 아주 잠깐 멈추는 지점이 있었다. 날짜 쪽이었다. 공백 구간.
"알았어."
그게 전부였다.
서하는 돌아서려다가 한 번 더 물었다.
"선배님, 박 상무님한테 가셨어요?"
도윤이 서하를 봤다. 말을 고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잠깐 봤다.
"어."
"차진혁 수석이 먼저 가겠다고 했는데요."
"알아."
도윤이 다시 서류로 눈을 내렸다.
"그래서 내가 먼저 갔어."
서하는 그 말이 끝난 뒤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의자에 앉으면서 등받이에 잠깐 몸을 기댔다. 천장이 보였다. 형광등 불빛이 균일했다. 도윤이 먼저 갔다는 건, 차진혁의 경로를 끊었다는 뜻이었다. 그게 맞는 선택인지 틀린 선택인지 서하는 아직 판단할 수 없었다. 다만 도윤이 그 선택을 설명하지 않고 그냥 했다는 것, 그리고 서하에게 물어보지도 않았다는 것, 그게 오늘 서하가 알 수 있는 전부였다.
지우가 슬쩍 메모지를 책상 위에 밀었다. 손 글씨였다.
'6개월 공백 시작점 — 오승우 팀장 이전 배정 기록 확인 필요.'
서하는 그 메모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지우는 이미 딴 데를 보고 있었다. 서하는 메모를 서랍 안쪽으로 밀어 넣으면서 생각했다. 오승우 팀장 이전이라면, 그건 서하가 이 팀에 오기도 전이었다.
오후 네 시가 지나 사무실 조명이 조금 더 노래졌다. 창밖으로 빌딩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었다. 서하는 화면을 보다가 다시 핸드폰을 꺼냈다. 아버지 문자창을 열었다. 이번엔 손가락이 멈추지 않았다.
'네, 먹고 다녀요.'
입력창에 찍었다. 전송하지는 않았다. 그냥 그 글자들이 거기 있는 걸 잠깐 봤다. 다섯 글자. 별것 아닌 것 같은데 별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잠갔다.
오늘은 여기까지였다. 그런데 내일은 목요일이 아니었다. 보고서 기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