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그랑주 5의 유언
가벼운 상자의 무게
진태욱의 수첩은 배에 실을 장비보다 가벼웠다. 아리는 두 손에 각각 수첩과 데이터 보관함을 들고 비교했다. 수첩은 오래된 잉크와 손때였고 보관함은 차가운 금속이었다. 무게만 보면 당연히 수첩을 가져가야 했다. 그러나 주민 원자료 이중보관 약속을 지키는 것은 작은 책 한 권을 품는 일과 같지 않았다.
진태욱의 수첩은 배에 실을 장비보다 가벼웠다. 아리는 두 손에 각각 수첩과 데이터 보관함을 들고 비교했다. 수첩은 오래된 잉크와 손때였고 보관함은 차가운 금속이었다. 무게만 보면 당연히 수첩을 가져가야 했다. 그러나 주민 원자료 이중보관 약속을 지키는 것은 작은 책 한 권을 품는 일과 같지 않았다.
가온은 원시자료 사본을 두 위치에 남길 수 있다고 했다. 배의 보관장치와 거주지 보존실. 둘 다 통신으로만 연결돼 있으면 외부 흐름이 높아질 때 같은 시간에 끊길 수 있었다. 아리는 물리 사본을 받아 배에 싣기로 했다. 아버지 수첩은 가족 물건이고 사고 자료는 주민들의 자료였다.
“같은 봉투에 넣지 마요.” 그녀가 말했다.
수첩의 마지막 장 안쪽에는 작은 얼룩이 있었다. 아리는 어릴 때 자기가 쏟은 음식 자국이라고 생각해 왔다. 정확히 무엇을 먹던 날인지는 몰랐다. 페이지를 펴니 얼룩 옆에 짧은 계산과 집에서 쓸 전구 규격이 함께 적혀 있었다. 그녀는 공적 기록을 옮기는 동안 아버지의 글씨에서 집의 물건을 처음 따로 보았다. 주민들을 구할 단서만 찾느라 그가 저녁에 전구를 바꾸려던 사람이라는 것을 놓쳤다. 리오가 그 규격의 전구를 창고에서 봤다고 했다. 아리는 가져오지 말라고 했다. 배 짐에 또 하나의 증거를 만드는 대신 수첩의 그 장을 조용히 덮었다.
그녀는 수첩을 넣기 전에 접힌 모서리를 폈다. 종이가 찢어질 듯 얇아져 손톱을 쓰지 않았다. 천천히 손가락 끝으로 누르자 글씨 일부가 다시 보였다. ‘집에 돌아가면.’ 그 뒤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아리는 그 빈칸에 자기 계획을 넣지 않았다. 아버지가 쓰려던 말은 그가 쓰지 못한 말이었다. 리오는 가방 끈을 짧게 줄여 주고 매듭이 풀리지 않는지 확인했다. 아리는 그 동작을 보며 자신이 지금 돌아갈 집과 앞으로 닿을 곳을 따로 떠올렸다. 같은 말이 두 장소를 함께 가리킬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가방을 들 수 있는 손은 남아 있었다. 그녀는 끈을 잡고 보관함을 나를 사람에게 출발하자고 말했다.
도한은 보관 담당과 함께 자료목록을 정리했다. C-12 원시 압력, 사고 지수 교체에 사용한 합성블록, 입력 제외 요청과 이반의 경고 메모, 현재 폭풍 관측이 서로 구분됐다. 오늘의 출항 자료에 과거 사고의 책임판정까지 완료된 것처럼 표시하지 않았다.
리오는 보존실 앞에서 기다리다 아리에게 작은 천 가방을 건넸다. 수첩이 들어갈 크기였다. 그는 가방을 만들었냐는 질문에 자기 옷 수선할 때 쓰던 것을 빌렸다고 했다. 아리는 수첩을 넣고 끈을 묶었다. 그 끈은 어제 격리문에 걸린 운반끈보다 가늘었고, 옷 안쪽에 짧게 고정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이 거주지에서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놓쳤는지 그녀는 여전히 전부 몰랐다. 그의 메모는 공식 기록을 대신하지 않았고 딸이라는 이유로 모든 주민의 증언을 읽을 권한도 생기지 않았다. 그래도 작은 가방 안의 글씨는 아버지의 것이었다. 아리는 그 물건을 개인 짐 칸에 넣었다.
자료 보관함을 옮기는 길에 전기가 짧게 흔들렸다. 예비 조명이 켜지고 복도의 자동문이 중간에서 멈췄다. 마테오가 보관함 수레를 밀다가 손잡이를 놓지 못했다. 문 틈에 수레 앞바퀴가 끼어 있었다. 뒤쪽에서는 의료 이송카트가 같은 통로로 들어오고 있었다.
리오가 수동 개방손잡이로 갔다. 손잡이는 벽 위쪽에 있었고 밀폐구역의 문과 달리 생활 통로문이었다. 그러나 바로 힘을 주면 수레가 움직이며 마테오 손이 문에 닿을 수 있었다. 아리는 먼저 마테오에게 손을 빼라고 했다. 그는 보관함이 넘어질까 봐 버텼다.
“상자는 묶여 있어요. 손부터.”
마테오가 손을 놓자 수레는 바퀴에 걸린 채 멈췄다. 리오는 문을 조금 열었고 아리가 앞바퀴를 뒤로 당겼다. 보관함의 묶음쇠가 덜컥 울렸다. 마테오는 손가락을 폈다 접었다. 의료팀이 상태를 보러 오는 동안 이송카트의 환자는 통로 뒤에서 기다렸다.
아리는 보관함을 먼저 밀고 가면 된다는 재촉을 들었다. 그녀는 수레를 옆 대기점에 놓고 의료 카트를 통과시켰다. 자료를 보존하는 일이 그 자료 속 사람의 몸을 기다리게 만드는 이유가 돼서는 안 됐다. 환자는 카트 위에서 보관함을 보며 무엇이 들어 있냐고 물었다.
“사고 때의 원자료 사본입니다.”
“내 것도 있겠네요.”
아리는 환자의 개인기록은 필요한 접근 기준을 따로 둔다고 설명했다. 환자는 자기 몸보다 상자를 먼저 보내지 않아 고맙다고 했다. 그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아리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았다. 상자를 우선한 날들이 이 거주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배 보관실에 도착해 밀봉 번호를 확인하자 하나가 목록과 달랐다. 리오는 누군가 바꾼 것이냐고 물었다. 아리는 금속판 위의 숫자를 닦았다. 먼지가 아래쪽 획을 가려 다른 숫자로 보였다. 그래도 닦은 뒤 보는 번호만 맞추고 끝내지 않았다. 출발 때 찍은 사진과 현재 봉인의 형태를 같이 확인했다.
보관 담당은 첫 사본을 읽어 해시를 대조했고 다른 담당은 출고 목록을 읽었다. 잠시 뒤 두 사람이 같은 결과를 말했다. 아리는 사본 속 첫 시각과 마지막 시각을 봤다. 낮아진 압력의 시작부터 사람이 밖으로 나온 순간까지 그대로 있었다. 가온은 읽은 사본을 다시 보관 장치에 잠갔다.
아리는 그 과정이 끝나자 이반의 승인 관련 자료를 별도 폴더로 열었다. 운항 준비가 바빠지면서 그의 책임 검토가 흐려질 수 있었다. 이반은 배에 타지 않고 재단과 잔류 운영 권한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는 자료를 가려 달라고 하지 않았다. 다만 최종 해석 전에 자신의 당시 화면과 직접 설명을 받을 경로를 남겼다.
리오는 그 설명권이 특권처럼 보일까 걱정했다. 도한은 다른 책임 검토 대상에게도 같은 경로를 주고 판단은 분리했다. 이반의 협조가 서명을 지우지 않았듯 리오의 분노도 빈칸을 증거로 만들 수 없었다. 아리는 원자료 보관을 담당하는 역할에서 내려온 뒤에만 가족으로 가진 의견을 따로 기록했다.
그날 오후 이반이 수첩 가방을 보았다. 그는 진태욱을 기억한다고 말했다. 아리는 상대가 아버지를 좋게 말하며 사과를 대신할까 경계했다. 이반은 좋은 사람이었다는 문장을 꺼내지 않았다. 진태욱이 주민 원자료를 재단 서버 밖에도 두어야 한다고 요구한 회의 날짜를 알려 주었다.
그 날짜의 회의록은 보존실에 있었다. 요청이 부결됐다는 결과와 이반의 반대표가 함께 남았다. 아리는 숨을 들이켰다. 수첩의 이중보관 약속은 누군가의 허락을 받지 못한 약속이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작은 포트와 종이를 남겼다.
“당신은 그때도 막았군요.”
“그렇습니다.”
이반은 보안과 저장비용을 이유로 들었다고 했다. 그 이유가 오늘도 옳다는 뜻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아리는 그의 말을 들으며 자기 손에 든 가방을 더 꽉 잡았다. 그가 현재 원본 보존 명령에 서명한 것이 과거 반대표를 덮지는 않았다. 그래도 오늘 사본을 배에 보내는 길에서 그 서명은 필요했다.
리오는 아리가 울 것 같다고 생각했으나 그녀는 울지 않았다. 그녀는 그 회의록의 사본도 주민 자료 목록에 넣어 달라고 요청했다. 가족기록과 공적 결정 사이에 처음 날짜로 이어진 선이 생겼다. 아버지를 영웅으로 다시 그리지 않아도 그가 했던 요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저녁에 마테오가 손가락의 멍을 보여 주었다. 검사에서 큰 손상은 없었고 일시 작업 제한이 생겼다. 아리는 그가 공구를 잡지 못하면 배에서 불안할까 걱정했다. 그는 자기 짐에 이미 공구가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 쓰는 법을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직접 할 수 없는 날을 생각하지 않던 사람이 이제 그날의 역할을 찾고 있었다.
아리는 그에게 작은 펜던트의 새 줄을 달 수 있느냐고 물었다. 아이의 목걸이였다. 장갑을 낀 손으로 섬세한 작업을 하기는 어려웠다. 마테오는 생활 담당자를 불렀고 둘이 함께 짧은 고리줄을 만들었다. 목에 길게 거는 대신 옷 안쪽에 안전하게 붙일 수 있었다. 아이는 별이 제자리로 돌아왔다며 웃었다.
보존실에 남길 두 번째 사본은 리오가 확인했다. 배의 사본과 같은 목록이지만 주민들의 현재 요청을 받는 담당은 그쪽에 남았다. 아리는 그를 보며 자신의 원자료를 지키려면 그가 꼭 살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이 너무 무거워서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리오가 먼저 말했다. “나 하나만 열쇠로 쓰지는 않았어. 두 번째 담당도 있어.”
그녀는 가온을 보았다. 그는 보관과 접근 책임을 역할별로 나눴고, 한 사람 단말이 끊겨도 원자료가 사라지지 않도록 확인했다. 아버지가 적었던 약속은 이제 딸과 친구의 몸에만 묶인 것이 아니었다. 여러 사람이 같은 목록을 가지고 있었다.
아리는 자기 작은 가방을 배 좌석 옆 지정함에 넣었다. 주민 보관함은 따로 잠겼다. 두 개의 상자를 한꺼번에 지키겠다고 뛰다가 사람을 다치게 할 위험이 줄었다. 그녀는 가방을 만지며 아버지가 이 물건을 여기 두고 떠났던 날을 생각했다. 정확한 표정은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이 부족하다고 그날을 새로 만들어 쓰지는 않았다. 지금 손에 남은 거친 천과 잉크 냄새만 믿었다. 리오는 출입구에서 마지막 물을 나르고 있었다. 그가 가방을 잘 실었느냐고 물었고 아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자는 두 개고, 둘 다 제자리에 있어요.” 리오는 사람 자리도 세어야 한다며 단말을 열었다. 밖에서는 별이 조용했고, 안에서는 출항에 필요한 작은 소리들이 계속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