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료·완화의료 휴먼극 50화

열세 번째 야간 왕진

제출하지 않은 종이

회사 인사 담당자는 무급휴직원의 빈 서명칸을 보았다. 채영은 원본을 가져가지 않았다. 적어 둔 근무 조정표를 펴고 월요일과 목요일의 퇴근 시각을 먼저 설명했다. 담당자는 그녀가 더 오래 집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휴직 안내를 꺼냈다가 손을 멈췄다. 채영은 일을 그만두러 온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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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인사 담당자는 무급휴직원의 빈 서명칸을 보았다. 채영은 원본을 가져가지 않았다. 적어 둔 근무 조정표를 펴고 월요일과 목요일의 퇴근 시각을 먼저 설명했다. 담당자는 그녀가 더 오래 집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휴직 안내를 꺼냈다가 손을 멈췄다. 채영은 일을 그만두러 온 것이 아니었다.

“이 표대로 한 달 해 보고 싶습니다. 제 업무를 누구에게 넘기는지도 같이 정할게요.”

월요일 마지막 전화회의는 동료와 바꾸고, 채영은 다음 날 그 동료의 회의를 맡았다. 목요일은 외부 미팅 시간을 낮 앞쪽으로 당겼다. 상대 회사가 맞출 수 없는 날에는 사전에 다른 변호사를 배정해야 했다. 채영은 자기 대신 온 사람이 계속 일을 떠안는 구조를 원하지 않았다.

팀장이 들어왔다. 그는 처음에 재택으로 모두 하면 되지 않냐고 물었다. 채영은 어머니 소파 옆에서 통화하던 날을 말했다. 어머니는 질문하다 말을 멈췄고 상대 고객은 채영이 답을 기다리는 줄 알았다. 한 집에서 두 사람을 동시에 기다리게 만들었다. 그날 밤 채영은 자기 업무도 돌봄도 제대로 끝내지 못했다.

팀장은 표의 네 줄을 지웠다가 다시 그었다. 매주 교대할 업무, 긴급 연락이 필요한 사건, 채영에게 바로 연결하지 않을 시간, 한 달 뒤 확인할 일정이었다. 채영이 먼저 맡을 회의를 적었다. 수진에게 일방적으로 시간을 주는 대신 수진이 외근해야 하는 금요일 오전을 그녀가 맡기로 했다.

확정된 표를 받은 채영은 서명칸에 이름을 썼다. 무급휴직원과 다른 종이였다. 근무시간과 일의 책임을 바꾸는 데는 팀의 사람이 함께 서야 했다. 사무실로 돌아온 채영은 수진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수진은 금요일 사건 파일을 그녀에게 넘겼다. 감사의 뒤에 실제 일이 왔다.

집에서는 영숙이 노란 담요를 받았다. 택배기사는 상자를 문 안쪽에 놓고 갔다. 영숙은 혼자 바닥의 상자를 들지 않았다. 열어 볼 수 있는 자리에 놓아 달라고 부탁했을 때 기사가 식탁까지 옮겼다. 외출하던 이웃이 문 앞에서 그 모습을 보고 상자를 뜯어 줄까 물었다.

영숙은 저녁에 딸과 열겠다고 했다. 물건 하나를 혼자 열지 못한다는 것보다 같이 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웃은 오늘 구청 담당자가 보고 간 골목 사진을 보여 주었다. 모래주머니를 놓지 않을 통행선과 배송차가 잠시 설 수 있는 위치를 주민들이 확인했다. 고정 주차칸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구청은 제설 때 그 선을 다시 막지 않도록 담당 작업조에 현장 사진을 넘겼다. 이웃은 마루에 들어오지 않고 문 밖에서 그 얘기를 마쳤다. 영숙은 고맙다고 했다. 자기 집의 기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골목 아래 어린아이 유모차가 돌아갈 길도 함께 생겼다고 이웃이 말했다.

하진은 오후 예정 방문에서 영숙이 새로 고른 일정부터 들었다. 손녀는 주말에 잠깐 오기로 했고, 오래 머물지는 않기로 했다. 영숙은 아이 앞에서 계속 누워 있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하진은 꼭 앉아 있어야 손녀를 만나는 건 아니라고 답했다. 영숙은 알지만 자신이 원하는 모습도 있다고 했다.

세현은 방문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를 조금 뒤로 뺐다. 오른손의 떨림이 오늘도 있었다. 영숙은 손녀에게 손을 흔들다가 떨릴까 봐 걱정된다고 말했다. 세현은 자기 손을 보고 웃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도 인사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무엇을 보는지는 우리가 다 정할 수 없어요.”

영숙은 그 말을 오래 듣고 있었다. 하진은 주말 만남이 힘들어지면 중간에 쉬거나 시간을 바꿔도 된다고 영숙에게 알렸다. 손녀가 온다는 기쁨이 몸의 변화를 숨겨야 하는 약속이 되지 않도록, 아이에게 직접 설명할 말은 엄마인 채영과 영숙이 정하기로 했다. 채영은 사무실에서 그 연락을 받았다.

퇴근 뒤 채영은 무급휴직원을 서랍에서 꺼냈다. 영숙은 상자 앞에서 가위를 기다리고 있었다. 채영은 서류를 먼저 펼쳤다. 제출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 달 동안 확정된 근무표로 일해 본다고 말했다. 영숙은 잘됐다고 말하기 전에 딸이 언제 잘 수 있는지 물었다.

“월요일은 엄마 지원 때 밀린 일을 끝내고, 목요일은 쉬는 날도 만들려고.”

영숙은 딸의 조정표에서 금요일 오전을 찾았다. 수진이 맡아 주는 칸만 있는 줄 알았는데 딸이 맡는 새 사건도 있었다. 채영이 파일의 두께를 손으로 보여 주자 영숙은 집에서 그걸 펴면 천장이 내려앉겠다고 농담했다. 채영은 거실 바닥에서 사건자료를 정리하던 밤을 떠올렸다.

그날 어머니는 물을 마시려다 종이를 밟을까 봐 기다렸다. 딸은 어머니가 잠든 줄 알았다. 둘이 같은 집에 있었는데 서로의 자리를 모르고 있었다. 채영은 금요일 자료를 사무실에 두고 오겠다고 했다. 영숙은 그 말을 듣고 저녁 소파 옆의 낮은 탁자를 자기 쪽으로 당겼다.

“여긴 내 편지 쓰는 자리야.”

채영은 탁자 위의 강변 돌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집을 병원과 사무실의 대기실로만 쓰지 않아도 되는 날이 한 달은 이어지길 바랐다. 한 달이 끝나기 전에 다시 묻고 바꾸면 됐다. 지금은 어머니의 탁자에 새 담요 상자가 있었고, 자기 일은 내일 아침 사무실에 있었다.

“월요일과 목요일만 자는 건 아니잖아.”

채영은 웃다가 자기 야간 업무 시간을 지웠다. 인사 상담에서 미처 말하지 않은 일이었다. 일과 돌봄의 틈마다 밤을 끼워 넣는 습관이 여전히 표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다음 주 업무량을 팀장에게 다시 확인하겠다고 했다. 영숙은 그 연락을 지금 하라고 하지 않았다. 담요부터 열자고 했다.

상자에서 노란 천이 나왔다. 영숙은 손녀가 바닥에 앉으면 무릎에 덮어 줄 생각이었다. 채영은 담요를 펼쳤다가 자기 무릎에도 덮었다. 두 사람의 다리가 잠깐 같은 천 아래 들어갔다. 영숙은 새 천 냄새를 맡고 빨아서 쓸지 물었다. 채영은 내일 자신이 세탁하겠다고 답했다.

그때 세현에게 전화가 왔다. 조정원에서 피해 가족의 직접 면담 날짜를 잡았고, 가족 쪽에서 세현에게 먼저 질문을 전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채영은 어머니의 돌봄 서류를 닫은 뒤 별도 업무 가방을 열었다. 영숙은 딸의 목소리가 바뀌는 것을 듣고 텔레비전 소리를 줄였다.

질문은 짧았다. ‘그날 환자의 변화를 알고도 왜 기다렸습니까.’ 채영은 질문을 자기 말로 순하게 바꾸지 않고 읽었다. 세현은 한동안 답하지 않았다. 그가 경보를 껐다는 잘못된 기억을 정정한 뒤에도 이 질문은 남아 있었다. 환자 앞에 가지 않은 몇 분을 기록의 잘못 뒤로 보낼 수 없었다.

“저 질문에 제가 답을 만들어 드릴 수는 없습니다.” 채영이 말했다.

세현은 알고 있다고 했다. 조정원에는 직접 답하겠다고 전해 달라고 했다. 채영은 의료기록의 확인이 필요한 문장과 세현 자신의 설명을 나눠 준비하자고 했다. 어머니가 소파에서 보는 상황에서 과거 환자의 자세한 정보를 꺼내지 않았다. 통화를 마친 뒤 자료를 닫았다.

영숙은 무슨 일인지 묻지 않았다. 대신 새 담요를 자기 쪽으로 조금 끌었다. 채영은 어머니가 배려하느라 입을 닫았다는 것을 알았다. 영숙은 딸이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은 일이 집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환자의 집에서 받은 말이 변호사의 가방을 잠깐 가볍게 만들었다.

다음 날 세현은 병원 근처 찻집에서 문장을 쓰다가 모두 지웠다. ‘당시에는’으로 시작한 첫 줄 뒤에는 이유가 붙었고 이유 뒤에는 다른 사람 이름이 왔다. 이미란, 서정오, 빠진 인력, 닿지 않은 경보. 그는 그 이름들을 별도 종이에 옮겼다. 자기 질문에 먼저 답하려는 종이에는 환자와 자기만 남겼다.

하진이 맞은편에 앉았다. 세현은 자신이 환자 상태를 다시 보러 갔어야 했던 순간을 말했다. 하진은 말을 중간에 고치지 않았다. 설명이 끝나자 한 가지만 물었다. 가족에게 그날 자신이 실제로 본 것과 나중에 알게 된 것을 구분해서 말할 수 있는지. 세현은 종이를 두 장으로 나누었다.

오른손이 떨려 펜 끝이 번졌다. 세현은 왼손으로 종이를 누르고 잠시 기다렸다. 하진이 대신 써 주겠다고 하지 않았다. 세현은 짧은 문장 세 개를 끝냈다. 오늘 몸이 예전처럼 완벽하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날의 행동을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그는 마지막 마침표를 찍고 펜을 내려놓았다.

집에서는 채영이 근무 조정표 사본을 냉장고 옆에 붙였다. 영숙은 자기 계획 한 장과 겹치지 않게 오른쪽을 가리켰다. 딸이 일하는 날과 어머니가 도움받는 날은 서로 맞닿았지만 같은 종이는 아니었다. 무급휴직원은 미제출이라고 적은 봉투 안에 넣어 서랍 뒤로 옮겼다.

손녀에게서 음성메시지가 왔다. 강아지가 신발 여섯 개를 신으면 걷다가 넘어질 거라고 했다. 영숙은 담요를 보고 웃었다. 아이가 오면 그 얘기를 직접 듣겠다고 답했다. 채영은 메시지를 대신 쓰려다 휴대전화를 어머니에게 건넸다. 영숙의 느린 손가락이 자기 문장을 만들었다.

채영이 그날 밤 누웠을 때 회사 메일은 닫혀 있었다. 어머니가 잠들기 전에 고른 불 하나만 거실에 켜져 있었다. 채영은 무급휴직을 하지 않은 자신을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침대 위에서 팀의 금요일 사건을 떠올리다가, 알람을 맞추고 눈을 감았다. 아침에 해야 할 일을 밤으로 당겨 오지 않았다.

세현은 같은 시각 빈 종이 두 장을 가방에 넣었다. 피해 가족 앞에서 준비한 문장이 전부 남지 않을 수도 있었다. 누군가 질문하면 모른다고 말할 줄도 알아야 했다. 그는 침대 옆 전화기의 소리를 켜 두고 잤다. 다음 날 예정된 낮 방문과 과거의 직접 질문이 같은 가방 안에서 서로 다른 자리를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