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그랑주 5의 유언
종이보다 무거운 문
다음 날 아침 담보권자가 요구한 것은 돈이 아니라 순서였다. 금융봉인 백팔십팔 석 가운데 계약상 우선권이 있는 기관 몫을 먼저 배정하라는 조건. 도한은 화면을 읽으며 턱을 괴었다. 남은 폭풍 도달 창은 여섯 날에서 아홉 날이었다. 한 날을 더 얻는 협상이 아니라 한 날을 이미 쓴 뒤의 협상이었다.
다음 날 아침 담보권자가 요구한 것은 돈이 아니라 순서였다. 금융봉인 백팔십팔 석 가운데 계약상 우선권이 있는 기관 몫을 먼저 배정하라는 조건. 도한은 화면을 읽으며 턱을 괴었다. 남은 폭풍 도달 창은 여섯 날에서 아홉 날이었다. 한 날을 더 얻는 협상이 아니라 한 날을 이미 쓴 뒤의 협상이었다.
리오는 조건서의 맨 아래 서명란을 보았다. 그가 서명하면 잠금이 풀릴 듯했다. 종이에는 ‘거주지 대표 수락 시’라는 말이 있었으나 실제 잠금 명령의 발송시각은 없었다. 그는 펜을 집었다가 다시 놓았다.
“누가 먼저 타는지는 주민이 정합니다.”
“계약을 지켜야 해제하겠다는 거군요.” 아리가 말했다.
통신실 옆 창에는 아직 어제 옮긴 고정구가 걸려 있었다. 뜯어진 절연재를 보며 리오는 어느 계약서에도 저 금속이 아파하는 소리는 적히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잠금 담당자를 불러 승인 직후 실제 문을 여는 데 걸릴 시간을 물었다. 담당자는 원격신호 뒤 두 잠금핀이 순서대로 물러나야 한다고 했다. 한쪽만 물러나면 수동 점검으로 넘어가며, 그때 사람들은 문 앞에서 물러나 있어야 했다. 리오는 빈 문을 향해 걸어가 대기선을 붙였다. 줄을 붙이는 것이 사람을 기다리게 만들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종이가 승인돼도 몸을 다치지 않고 들어갈 마지막 걸음을 남겨야 했다. 그는 자기 신발을 선 안과 밖에 번갈아 놓으며 안내자가 보일 위치를 골랐다. 첫 번째 위치에서는 문에 가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안내대 하나를 옮기자 손과 얼굴이 함께 보였다. 작은 자리 하나를 바꾸고 돌아오니 연결 대기 표시가 꺼져 있었다.
도한은 상대에게 즉시 음성 연결을 요청했다. 화면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여자 대신 그녀의 직함과 연결 대기 표시만 떴다. 그들은 사람 얼굴을 보고 분노를 다스릴 기회도 없었다. 도한은 요청한 독립 자료와 장착 시험 결과가 충족됐다는 점부터 말했다. 상대는 손실을 최소화할 합리적 조건이라고 답했다.
리오는 자기 가족 이야기로 시작하려다가 멈췄다. 모든 가족을 앞세워 합리성을 증명할 수는 없었다. 그는 대피 우선순위가 위험과 돌봄 필요로 결정된다는 현재 규칙을 읽었다. 기관 소속이라는 이유만으로 앞으로 보낼 경우 누가 뒤로 밀리는지 개인 이름 없이 설명했다. 상대는 잠깐 조용해졌다가 권한 밖이라고 했다.
“그럼 권한 있는 사람을 오늘 연결하십시오.” 도한이 말했다. “그 조건을 거절한 사실과 이유를 같이 보냅니다.”
대답이 나오기 전에 배 연결통로 쪽에서 소음이 났다. 금융봉인 문 앞에 주민 열 명가량이 모였다. 누군가 해제 조건서의 일부를 보고 모든 좌석이 풀렸다고 전했다. 통로 안내자는 입구를 지키고 있었으나 뒤에서 밀려오는 사람들 때문에 발이 문턱에 걸렸다.
리오는 통신을 놓고 밖으로 뛰었다. 문 앞의 사람들은 싸우려는 얼굴이 아니었다. 각자 누구보다 빨리 와야 한다는 얼굴이었다. 할머니를 밀던 여자가 휠체어 손잡이에 팔을 걸고 있었다. 그녀 앞의 남자는 손에 접은 침구를 들었다. 장기간 항해에 필요할지 몰라 챙긴 침구였다.
“아직 열리지 않았습니다.” 리오가 말했다.
“당신들은 우리한테만 기다리라고 하죠.” 남자가 대답했다.
리오는 문 옆의 수동 해제 덮개를 보았다. 기술적으로 열 수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하지만 한쪽 잠금만 억지로 풀면 통로의 격리 기능과 별개인 계약 봉인이 아니라 승강판까지 풀릴 수 있었다. 아리는 뒤따라와 주민을 문에서 물리고 고정핀을 확인했다.
어떤 여자가 아리의 소매를 붙잡았다. “그냥 고장 내면 안 돼요? 우리가 손해 물게요.”
아리는 대답 대신 문 아래를 손전등으로 비췄다. 수동 해제 손잡이와 승강판의 연결축이 가까이 있었다. 잘못 건드리면 판이 아래로 돌아가 사람 다리가 끼일 수 있었다. 여자는 바닥을 내려다보고 휠체어를 뒤로 당겼다. 위험을 설명하는 말보다 실제 경첩을 보는 데 시간이 덜 걸렸다.
리오는 통로 가운데 앉았다. 사람들을 막는 벽이 아니라 그들이 같은 높이에서 질문할 수 있는 자리였다. 안내자가 그의 옆에 조건서 전부를 띄웠다. 남자는 침구를 내려놓았고 여자는 휠체어를 벽 쪽으로 돌렸다. 할머니는 손잡이를 꼭 쥔 채 리오에게 물었다.
“오늘 내가 못 타면 내일은 물어봐도 돼?”
“네.”
“그럼 내일 대답할 사람 이름을 적어 줘.”
리오는 자기 이름과 다음 설명시각을 적었다. 할머니는 글자를 읽기 어렵다며 종이를 손녀에게 주었다. 어린아이가 질문을 대신하지는 않았다. 그 곁에는 안내 담당자가 남아 있었다. 리오는 문을 고장 내 달라는 요구가 사라졌다고 문제도 끝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통신실에 돌아오니 이반이 새로운 문서를 들고 있었다. 담보권자와 재단 사이의 비상 사용 조항이었다. 재단의 관측 인정과 운영자의 위험 판단, 별도 손실보전 계좌 지정이 맞으면 소속 기관 우선배정을 조건으로 붙이지 않고 잠금 해제를 요청할 수 있었다. 이반은 이 조항이 자동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도한은 그가 왜 이제 가져왔느냐고 물었다. 이반은 계약 체결 때 사용한 기억이 없었고 현재 권한을 넘기려고 문서목록을 다시 보다가 찾았다고 했다. 리오는 그 이유가 화가 났다. 그럼에도 조항은 지금 작동시켜 볼 수 있었다. 그는 이반을 몰아붙이는 대신 도한 옆에 앉아 요구사항을 나눴다.
“위험 판단은 지금 할 수 있습니다.” 아리가 말했다. “독립 관측의 현재 도달창과 차폐 한계를 붙입니다. 폭풍이 도착해야 위험이 생긴다는 뜻은 아니니까요.”
손실보전 계좌를 위해 준비금 일부를 묶으면 현재 치료비와 휴업 보전이 줄어들 수 있었다. 도한은 그쪽을 빼앗지 않기로 했다. 그는 재단이 사고 예방에 쓰려고 세운 미집행 운용자금의 제한 목적을 확인했다. 이반은 그 자금의 동결권한을 자신이 쥐고 있었다. 해제는 재단 공동서명이 필요했다.
그들은 서명을 한 장 더 구하러 갔다. 재단 현지 회계책임자는 의무실에 누워 있었다. 편두통 때문이었다. 리오는 서류를 들고 침대 옆으로 들어가려다가 간호사의 손에 막혔다. 통화 가능한 시간과 방문 의사를 먼저 물어야 했다. 서명이 급하다고 잠든 사람에게 문서를 들이밀 권리는 생기지 않았다.
회계책임자는 이십 분 뒤 작은 상담실에서 그들을 만났다. 검토 가능한 시간을 십오 분이라고 말했다. 도한은 질문을 한 장에 줄였다. 책임자는 비상 사용을 위해 자금을 지정하는 데 동의했으나, 실제 지출 승인과 혼동되지 않게 해 달라고 했다. 이반이 서명을 먼저 했다. 리오는 두 사람 손 사이에서 종이가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 돈으로 누가 살았다고 공지하지 마세요.” 책임자가 말했다. “오늘은 돈이 쓰일 수 있는 길을 열었어요.”
“그 길이 오늘 사람한테 닿게 하겠습니다.” 도한이 답했다.
그들은 오후 통신창이 닫히기 전에 재신청을 보냈다. 기관 우선배정 조건에 수락하지 않은 채 계약의 비상 사용 조항으로 해제를 요청했다. 상대 담당자의 음성이 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손실 계좌의 지정문서를 실제로 검토하겠다고 했다. 도한은 심사 종료 예정시각을 물었고, 상대는 두 시간이라고 답했다.
아리는 그 시간을 공용판에 쓰고 배로 갔다. 세 번째 고정구 교체부품은 도착했지만 설치 후 분리 시험이 남아 있었다. 실제 문이 열려도 배가 나갈 수 없다면 주민들에게 또 한 번 희망만 건넬 것이다. 운항팀은 무인 분리 시험을 위해 연결통로를 잠깐 닫았다.
리오는 문 앞에서 기다리던 할머니에게 점심 물을 건넸다. 그녀는 아직 손잡이를 놓지 않았다. “서 있으면 빨리 열리나?” 리오가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는 휠체어를 돌렸다. “그럼 내가 밥 먹으러 가는 동안 열어 봐.” 말투가 명령처럼 들려 리오는 오히려 안심했다.
무인 분리 시험은 첫 시도에서 멈췄다. 교체한 고정구 하나의 해제 신호가 늦게 돌아왔다. 운항기사는 센서 지연일 것이라고 했다. 아리는 실제 카메라로 잠금턱이 물러나는 시각을 확인했다. 센서만 늦은 것이 아니었다. 새 부품의 가이드가 힘을 받는 쪽으로 조금 비뚤어져 있었다.
정비팀은 원래 각도를 바꾸지 않고 장착면을 다시 맞췄다. 두 번째 시도에서는 세 고정구가 순서대로 풀렸고 임시 고정틀이 떨림을 받았다. 배가 조금 떨어졌다가 재도킹했다. 문밖의 아이가 박수치자 어른 몇 사람이 따라 했다. 시험은 작은 이동이었으나 배가 거주지에서 자기 몸을 분리하는 모습을 실제로 보여 줬다.
예정한 두 시간이 지나기 십 분 전 회신이 왔다. 비상 사용 조항 적용 승인. 금융봉인 해제 명령을 다음 통신창에 발송. 도한은 승인 화면을 갖고 문부터 열러 가지 않았다. 발송까지 남은 시간을 표시하고, 해제 후 실제 잠금 상태를 현장에서 검증하겠다고 말했다.
리오는 저녁을 먹던 할머니에게 가서 그 사실을 전했다. 할머니는 입 안의 음식을 삼킨 뒤 물었다. “내가 가도 되는 거랑 달라?”
“문을 열 수 있게 됐다는 뜻입니다. 누가 타는지는 정원과 심사를 맞춰서 다시 안내합니다.”
할머니는 한참 그를 보다가 남은 빵을 종이로 감쌌다. “그러면 문 열릴 때 가져가. 네 밥도 안 먹었겠네.” 리오는 받아 들었다. 그것은 고맙다는 말과 앞으로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이 함께 든 따뜻한 물건이었다. 통신실로 돌아오는 동안 빵은 손바닥에서 식었다. 실제 문까지 남은 거리를 그는 이제 정확히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