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미식 로맨틱 코미디 47화

서리 지난 복숭아밭

전부라는 말의 맛

해진이 빈손으로 돌아왔을 때 보리는 크럼블 봉투를 들고 있었다. 남은 시험분 가운데 자기가 먹을 몫이었다. 두 사람은 주방 뒤 길로 걸었다. 밭에는 아직 작은 열매가 잎 사이에 숨어 있었다. 해진은 그 가지를 건드리지 않고 보리에게 어느 쪽 길이 편한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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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진이 빈손으로 돌아왔을 때 보리는 크럼블 봉투를 들고 있었다. 남은 시험분 가운데 자기가 먹을 몫이었다. 두 사람은 주방 뒤 길로 걸었다. 밭에는 아직 작은 열매가 잎 사이에 숨어 있었다. 해진은 그 가지를 건드리지 않고 보리에게 어느 쪽 길이 편한지 물었다.

보리는 평평한 둑길을 골랐다. 크럼블이 또 부서질까 봐 봉투를 조심히 들었다. 해진은 그런 물건이면 걷다가 먹는 것이 나을 수 있다고 했다. 보리는 그럼 앉아 먹자며 길가 벤치를 가리켰다. 멋진 산책이 되기 전에 두 사람이 가루부터 피할 자리를 찾았다.

해진은 한 조각을 받아 먹었다. 보리도 작은 조각을 먹었다. 냉장 해동한 지난해 과육의 향이 들어간 시험분은 낮보다 더 식어 있었다. 보리는 내일 도경에게 보여 줄 것은 이 판이 아니라 안정된 배치라고 말했다. 해진은 맛을 좋아하는 것과 매장에 낼 수 있는 것은 다르겠다고 했다.

“오늘은 일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보리가 말했다. 해진은 자기 장화 얘기부터 했으니 비겼다고 웃었다. 보리는 그의 신발 끝을 봤다. 장화 대신 낡은 운동화를 신었다. 도구를 놓고 옷을 갈아입고 온 것이었다. 주방에서 도움을 구하면 바로 받을 수 있는 사람과, 저녁에 자기를 만나러 온 사람의 차이가 작게 보였다.

보리는 여기 오래 있으면 좋겠느냐고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해진이 기다렸다. 보리는 결국 다른 말을 했다. 한 철 계약이 끝난 뒤 어디로 갈지 아직 모르겠다고 말했다. 해진은 그 말을 처음 듣는 표정이 아니었다. 보리는 그가 늘 자신이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 고맙고, 때로는 조금 서운했다.

“붙잡아 주는 말이 듣고 싶었던 적도 있어요.”

해진은 봉투를 접던 손을 멈췄다. 바람에 가루가 날리지 않게 두 사람이 같은 봉투를 잡았다. 해진은 보리가 떠나면 보고 싶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남을 이유를 자신이 정하면 둘 다 잘못 알게 될 것 같다고 했다. 보리는 한동안 봉투 모서리를 봤다.

“그럼 오늘은 조금 더 걸어요.”

해진은 봉투에 남은 가루를 털어 자기 손바닥에 올렸다. 보리가 그렇게 먹을 것이냐고 하자 그는 마지막 한 입이라고 했다. 그런데 바람이 먼저 가져갔다. 두 사람은 빈 손바닥을 보고 웃었다. 보리는 해진 손에 묻은 가루를 휴지로 닦아 주었다. 한동안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던 손이 작은 일을 찾자, 해진도 어깨의 힘을 풀었다. 오늘 더 걷자는 대답은 그 뒤에 가볍게 이어졌다.

보리가 말했다. 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오래 남겠다는 약속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돌아갈 시간을 조금 늦추는 선택은 자기 것이었다. 두 사람은 빈 봉투를 버리고 걸었다. 해진이 가지 사이의 작은 열매를 가리키자 보리는 그것을 사진으로 찍지 않았다. 팔 물건이 아니라 같이 본 저녁으로 두고 싶었다.

다음 날 도경은 주방 문 앞에서 신발을 바꾸는 데 먼저 시간을 썼다. 그는 매장 몇 곳에 식품을 공급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옥순은 선급금 이야기를 바로 꺼내고 싶었지만 미정이 손 씻는 곳부터 안내했다. 도경은 준비한 서류를 포장 구역 바깥 탁자에 놓았다.

보리는 판매용 콩포트와 별도 시식분을 나눠 냈다. 도경은 큰 조각을 먼저 보고 박 여사 쪽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박 여사는 이씨에게 눈짓했다. 그런데 도경이 한 입 삼킨 뒤 향이 오래 남는다고 하자 이씨가 바로 어깨를 폈다. 미정이 다섯 농가 배합이라고 말하자 두 사람이 동시에 조용해졌다.

도경은 크럼블도 먹었다. 보리는 따로 낸 콩포트를 올려 먹어 보게 했다. 바로 먹는 접시와 시간을 둔 접시를 함께 보여 줬다. 도경은 시간이 지난 쪽의 밑면이 젖는 것을 보고 매장 시식은 따로 내는 편이 낫겠다고 했다. 보리는 자신들이 고른 방법과 같은 답이라 기뻤다.

그는 포장을 들고 매대에 놓는 모양을 손으로 그렸다. 앞에는 매장 행사 문구, 옆에는 다섯 농가 원물표시가 보이는 방식이었다. 보리는 상품 이름이 가려지지 않는 방향으로 돌려 놓았다. 도경은 그러면 행사용 스티커를 작게 만들겠다고 했다. 첫 몇 마디는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그 다음에 전부라는 말이 나왔다. 도경은 선급금으로 생산을 돕는 대신 일정 기간 이 상품 전량을 자신의 유통망으로 보내 달라고 했다. 장터에서 직접 팔던 병도 그 안에 들어갔다. 보리는 손에 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옥순은 계좌의 부족액을 떠올린 얼굴이었다.

도경은 매장에 남은 제품의 반품 조건도 말했다. 계획한 행사에서 다 나가지 않으면 조합이 다시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정은 냉장보관과 운송 중 온도를 누가 기록하는지 물었다. 도경은 그런 부분은 계약에 넣으면 된다고 했다. 미정은 말로 넣을 수 있는 것보다 실제 매장과 운송에서 지켜질 일을 보고 싶다고 했다.

도경은 생산량부터 알면 조건을 더 좁힐 수 있다고 했다. 옥순은 하루에 더 만들면 된다고 말하려다가 보리를 봤다. 보리는 주 세 번의 교대표를 꺼냈다. 라벨 두 사람이 확인하는 시간과 병 세척 대기도 들어 있었다. 도경은 그 표를 보며 큰 생산시설처럼 한 번에 계속 돌리는 주방이 아니냐고 물었다.

미정은 오늘도 사람들이 점심을 먹으러 나간다고 답했다. 박 여사가 웃었다. 도경도 웃었지만 표의 빈 시간에 손가락을 대려 하자 미정은 그때 냉장 원물 손질과 세척 정리가 진행된다고 말했다. 조용한 주방이 비어 있는 주방은 아니었다.

장씨는 실제 출고표를 가져왔다. 과거 예약분과 한정 시험판매분, 폐기했던 배치를 같은 달 판매량처럼 합치지 않았다. 도경은 실패한 배치도 있었다는 것을 읽고 눈을 들었다. 보리는 생산을 무조건 늘릴 수 없다고 말했다. 실패를 숨겨 큰 숫자를 제시하면 다음 병에서 자기들이 먼저 막힐 것이다.

박 여사는 옆에서 접은 상자를 들었다. 장터 단골 중에는 자기 집 원물 코드를 보고 사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에게 전부 매장으로 갔으니 거기서 사라고 할 것이냐고 물었다. 도경은 유통망이 넓으면 더 많이 팔 수 있다고 했다. 이씨는 멀리 나가는 향도 좋지만 가까운 사람이 다시 사는 향을 버릴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옥순은 숫자표를 다시 봤다. 선급금은 실제로 들어오면 급한 생산자금을 덜어 줄 돈이었다. 그러나 그 돈을 받고 만들 수 없는 병까지 약속할 수는 없었다. 옥순은 오늘 즉답하지 않겠다고 했다. 도경의 얼굴이 잠깐 굳었다. 그는 다른 주방에도 같은 제안을 한다고 말했다.

보리는 그 말에 손을 떨었다. 놓치면 안 되는 자리처럼 들렸다. 예전 회사에서도 ‘이번에 못 하면 다른 사람이 한다’는 말을 들으면 밤을 줄였다. 지금 자기 앞에는 미정의 교대와 다섯 농가의 원물대가 있었다. 보리는 도경에게 받아갈 수량과 반품 범위를 좁힌 안을 달라고 했다.

도경은 모든 것을 거절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보리는 전량 독점과 무제한 반품을 그대로 받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매장에 놓는 일 자체는 해보고 싶었다. 도경은 한참 시식컵을 보다가 오늘 맛이 좋았으니 다시 계산해 보겠다고 했다. 서류를 남기고 제품 두 개를 구매했다. 시식분을 판매품으로 가져가지는 않았다.

그가 나간 뒤 옥순은 의자에 깊이 앉았다. 방금 계좌에 들어올 수도 있던 돈이 문 밖으로 나간 기분이라고 했다. 미정은 도경이 산 두 제품의 대금을 장씨에게 넘겼다. 작은 판매는 실제였다. 큰 선급금은 아직 없었다. 박 여사가 그 두 병은 매장 상자가 아니라 제일 작은 봉투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보리는 웃음이 나오다가 멈췄다. 도경의 표정이 자꾸 생각났다. 한 번 더 말했으면 조건이 더 좋아졌을까, 아니면 그냥 돌아오지 않을까. 해진이 오후 관측 일을 마치고 들렀을 때도 보리는 탁자 앞에 있었다. 그는 먼저 오늘 어떤 맛을 보여 줬는지 물었다.

보리는 시식용으로 따로 남겨 둔 접시를 내밀었다. 해진은 콩포트를 올리는 양을 직접 골랐다. 그가 크럼블을 너무 많이 받쳐 들자 접시 위에서 또 부서졌다. 보리는 웃었다. 어제 산책 때는 가루를 피해 앉았는데 오늘은 주방에서 가루를 만들고 있었다.

“전부 내놓으라는 사람이 왔어요.”

보리가 말했다. 해진은 어느 전부인지 물었다. 보리는 병과 장터, 생산시간을 설명했다. 해진은 돈을 잘 받으라는 조언 대신, 어제 보리가 더 걷자고 말한 것을 떠올렸다. 오늘도 얼마만큼 할지는 보리가 다른 사람들과 고른 것이냐고 물었다.

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혼자 유통 권리를 정한 것은 아니었다. 옥순이 마지막 말을 했고 미정이 교대표를, 농가들이 원물과 단골을 보였다. 해진은 그럼 오늘은 어제보다 많은 사람이 자기 시간을 골랐다고 했다. 보리는 접시를 내려놓았다. 도경이 돌아올지는 모르지만, 주방에서 누가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장씨가 오늘 구매대금을 기록했다. 옥순은 내일 필요한 부족액을 다시 적고 실제 예약 이행분을 위에 놓았다. 미정은 식어 버린 시식판을 더 이상 매대에 두지 않고 정리했다. 박 여사와 이씨는 돌아가기 전에 서로의 과육이 먼저 팔렸다고 끝까지 다퉜다.

보리는 도경이 남긴 서류를 접었다. 그 옆에 자신의 교대표를 놓았다. 종이 두 장의 크기는 같았지만 들어 있는 사람의 시간은 달랐다. 해진은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보리는 오늘 산책은 짧게만 하자고 말했다. 그는 좋다고 했다. 전부라는 말을 하루 종일 들은 뒤, 보리는 오늘 남길 시간을 조금만 정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