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료·완화의료 휴먼극 46화

열세 번째 야간 왕진

혼자 쓰는 답장

목요일 아침, 채영은 어머니의 컵을 세 번 옮겼다. 식탁 한가운데에서는 손이 멀었고 소파 옆에서는 팔꿈치가 닿았다. 세 번째에 영숙이 컵을 받아 자기 쪽에 놓았다. 물 한 잔을 놓는 일에도 딸의 걱정이 끼어들었다. 영숙은 컵 밑에 묻은 물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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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아침, 채영은 어머니의 컵을 세 번 옮겼다. 식탁 한가운데에서는 손이 멀었고 소파 옆에서는 팔꿈치가 닿았다. 세 번째에 영숙이 컵을 받아 자기 쪽에 놓았다. 물 한 잔을 놓는 일에도 딸의 걱정이 끼어들었다. 영숙은 컵 밑에 묻은 물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오늘 내가 혼자 있는 게 싫은 거니, 네가 없는 게 싫은 거니?”

채영은 가방의 지퍼를 닫지 못했다. 둘 중 하나를 고르면 다른 하나가 거짓말이 될 것 같았다. 하진이 초인종을 눌렀을 때에도 채영은 외투를 반쯤 입고 있었다. 예정된 낮 방문이었다. 세현은 장갑을 벗으며 손가락을 천천히 폈다. 영숙은 그 손을 보고도 먼저 컵을 건네지 않았다.

하진은 영숙의 밤과 아침을 물었다. 창가에 앉아 남편 사진을 보다가 잠든 시간, 깼을 때의 답답함, 화장실까지 가는 동안 달라진 느낌을 영숙이 자기 말로 설명했다. 채영이 중간에 숫자를 덧붙이려 하자 하진은 손을 가볍게 들었다. 영숙의 문장이 끝난 뒤 딸의 관찰을 따로 들었다.

세현은 현관 가방에서 계획 한 장을 꺼냈다. 오래된 메모는 가져오지 않았다. 영숙은 요 며칠 달라진 일이 없다고 말하다가 멈췄다. 밤에 전화기를 들었는데 손에서 미끄러졌다는 것을 떠올렸다. 바닥에 떨어진 전화기를 주우려 몸을 숙였다가 한참 소파를 잡고 있었다.

채영의 얼굴이 굳었다. “왜 말 안 했어?”

“말하면 네가 또 네 시간을 취소할 것 같아서.”

하진은 전화기를 어디에 놓았는지 물었다. 영숙이 소파 틈을 가리켰다. 세현은 기기를 꺼내 주려다 떨리는 오른손을 멈추고 왼손으로 쿠션을 받쳤다. 하진이 틈의 작은 고정대를 옮겼다. 앉은 자리에서 전화가 손에 닿았고 충전선은 발이 지나는 곳을 벗어났다.

영숙은 두 사람이 떠난 뒤의 네 시간을 골랐다. 첫 한 시간은 엽서 답장, 그다음은 점심과 낮잠이었다. 채영은 한 시간마다 전화하자고 했다. 영숙은 점심 전에 한 번, 딸이 출발할 때 한 번이면 된다고 했다. 전화가 없을 때 무엇을 할지는 두 사람이 이미 정한 연락표에서 다시 짚었다.

“잘 자고 있는데 안 받으면?”

“문자부터 보고, 정한 순서로 해. 그런데 네가 곧장 문부터 부수지는 마.”

채영이 웃었다. 웃을 때 가방이 어깨에서 미끄러졌다. 어머니가 농담할 힘이 있다는 것이 안심됐지만 그 힘을 오늘의 보증처럼 쥐고 싶지는 않았다. 하진은 방문 뒤에 새로 생긴 불편함이 있으면 팀에 알려 달라고 했다. 오늘 상태에서 낮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함께 정한 다음, 왕진 가방을 닫았다.

채영은 현관에서 마지막으로 무급휴직원을 만졌다. 서류는 가방이 아니라 부엌 서랍에 있었다. 오늘 꺼내 넣을까 고민하다 그대로 두었다. 지난번 회의를 당겨 준 동료와 약속한 전화회의 대체는 이미 약속한 다음 날에 마쳤다. 대신 맡았던 회의가 길어져 자기 검토를 밤으로 밀었지만, 동료가 어머니의 낮 네 시간까지 맡아 주는 것은 아니었다.

밖으로 나가자 배송 때 비워 놓은 정차 지점에 우유 상자가 놓여 있었다. 골목 이웃이 구청에 문의한 종이를 들고 나왔다. 아직 차를 세울 구획은 없었다. 보행길을 막지 않는 표시 방법을 담당자와 현장에서 보자는 답을 받았다고 했다. 채영은 오늘 퇴근 뒤 가능 시간을 적어 주고 버스로 뛰었다.

영숙은 문이 닫힌 뒤 한동안 현관만 보았다. 혼자 있고 싶다고 큰소리를 친 사람이 막상 조용해진 집에 앉으니, 냉장고 소리도 사람의 숨 같았다.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려다 편지지를 자기 쪽으로 끌었다. 엽서의 강아지는 여섯 팔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영숙은 답장 첫 줄을 세 번 지웠다.

‘할머니는 아프지만’이라고 썼다가 종이를 뒤집었다. 손녀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기 병을 먼저 앉히고 싶지 않았다. ‘네 강아지가 할머니 집에 오면 신발을 여섯 개 사야겠구나.’ 그 문장을 쓰고 웃었다. 배 모양 귤껍질 옆에 연필을 놓았다. 말라 가는 껍질의 한쪽이 부서졌지만 배는 쓰러지지 않았다.

열한 시 반, 채영의 전화가 왔다. 영숙은 엽서 문장을 읽어 주었다. 채영은 숨소리부터 들으려 했으나 어머니는 강아지 신발 가격을 물었다. 채영은 회의실 문 앞에서 검색하는 척했다. 문 안쪽에서는 동료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영숙은 그 소리를 듣고 먼저 통화를 끝냈다.

점심을 데우러 일어났을 때 부엌 문턱이 멀어 보였다. 영숙은 서두르지 않았다. 식탁 의자를 당겨 앉아 쉬었다가 미리 둔 음식을 꺼냈다. 그동안 전화 화면이 꺼졌다. 혼자 있는 시간이 자신에게 언제나 쉬운 것은 아니었다. 영숙은 남은 시간을 낮잠으로 바꾸겠다고 딸에게 문자를 보냈다.

채영은 문자를 읽고도 몇 분 동안 회의 자료를 넘기지 못했다. 상대 회사 담당자가 그녀의 질문을 기다렸다. 채영은 어머니의 문자를 다시 보고 파일을 열었다. 전화기 옆 작은 메모에 ‘답장 쓰고 잠’이라고 적었다. 사무실 책상에서도 어머니의 시간을 자기 걱정만으로 지우지 않으려 했다.

집에서는 봉투 문제가 생겼다. 영숙이 새 봉투를 찾던 손을 멈췄다. 장식장 밑칸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의 오래된 영수증 봉투뿐이었다. 그는 바닥 가까이 내려가는 대신 정례에게 저녁에 가져다 달라고 문자했다. 답장이 곧 왔다. ‘근무 때 같이 찾아 드릴게요. 오늘은 서점에 안 들릅니다.’

영숙은 그 문장을 두 번 읽고 ‘그래요’라고 보냈다. 정례의 퇴근 밖 시간을 당연한 심부름처럼 불렀다는 걸 알았다. 봉투 없이도 답장은 쓸 수 있었다. 영숙은 종이 모서리에 손녀가 그린 것보다 작은 강아지를 그렸다. 다리는 넷이었다. 앞의 두 팔을 추가하자 개가 식탁을 밀고 있는 모양이 됐다.

채영이 출발 전 두 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 영숙은 잠에서 막 깼다. 답은 늦었지만 목소리는 분명했다. 채영은 택시를 잡아 놓았다고 고백했다. 영숙은 버스가 언제 오는지 물었다. 채영은 택시 앱을 닫았다. 어머니가 버스를 권했다고 몸의 변화를 놓쳐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으나, 지금 집에서 들려오는 말은 기다려도 된다는 말이었다.

정례가 먼저 도착했다. 그녀는 물컵과 전화기 위치를 확인하고 영숙에게 낮 이야기를 물었다. 영숙은 딸에게 하지 않은 말을 했다. 점심 앞에서 조금 겁이 났고, 쓸쓸해서 텔레비전을 켰지만 시끄러워 다시 껐다고. 정례는 혼자 잘 견뎠다는 칭찬 대신 다음 목요일에는 무엇을 바꾸고 싶은지 물었다.

“점심은 여기까지 가져다 놓으면 좋겠어요. 혼자 먹는 건 할 만했는데 가지고 오는 게 힘들었어요.”

정례는 저녁 계약에 없는 낮 심부름을 약속하지 않았다. 준비할 사람이 전날 어디에 놓을지 영숙과 채영이 함께 고를 수 있도록 식탁 옆 선반을 비워 주었다. 영숙은 선반에서 남편의 약봉투가 들어 있던 빈 상자를 발견했다. 오래전에 치운 줄 알았던 상자였다.

그는 상자를 버리지 않았다. 손녀의 답장을 넣었다. 정례가 새 봉투를 찾는 동안 채영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살아 있는 사람처럼, 오늘 하루를 끝낸 사람처럼 소파에 앉아 있었다. 채영은 그 당연한 모습을 보자 눈물이 나려 했다. 영숙이 손을 내밀었다. 채영은 그 손을 잡고 입을 열지 않았다.

“네 시간을 내 시간이랑 바꿨네.” 영숙이 말했다.

“엄마 혼자 두고 편했냐고 묻는 줄 알았어.”

“편할 리가 있니. 나도 편하진 않았어. 그런데 답장은 끝났어.”

영숙은 상자에서 종이를 꺼내 딸에게 읽어 달라고 했다. 마지막 문장에는 손녀가 다음에 올 때 할머니와 함께 강아지 발을 세자고 적혀 있었다. 날짜는 쓰지 않았다. 채영은 빈 자리를 보고도 날짜를 채우지 않았다. 대신 봉투에 주소를 쓰고 우표를 붙였다.

저녁에 지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월요일 야간 두 시간의 지원이 승인됐고 기관이 첫 근무자 배정을 확정해 알려 주겠다는 연락이었다. 채영은 곧바로 달력의 두 칸을 색칠하려다가 영숙에게 전화 내용을 읽어 주었다. 영숙은 처음 면담했던 사람이 오는지 물었다. 지수는 배정 명단을 받는 즉시 이름과 시간을 알려 주겠다고 했다.

정례가 퇴근 준비를 하며 인계할 말을 골랐다. 선반의 음식보다 먼저, 영숙이 질문에 답할 동안 기다려 달라는 부탁을 적었다. 채영은 냉장고 계획에 오늘 고른 연락 시간을 넣었다. 영숙은 달력의 목요일 칸에 ‘답장 보냄’을 썼다. 그 칸은 이제 빈칸이 아니었다.

채영은 봉투를 우체통에 넣으러 내려갔다. 집에서 멀지 않은 우체통이었지만 골목 끝을 도는 순간 뒤를 돌아보았다. 창가의 작은 액자가 햇빛을 받았고 어머니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채영은 방금 함께 있었던 사람을 다시 확인하려고 휴대전화를 꺼냈다가 봉투를 쥔 손을 폈다. 답장을 어머니가 부탁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우체통 입구에 봉투가 걸렸다. 채영은 구겨지지 않게 모서리를 펴서 밀었다. 종이가 안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작게 났다. 돌봄표에서 어머니를 혼자 둔 네 시간을 지우는 것보다 이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오늘 필요한 일 같았다. 채영은 집에 돌아와 소리를 흉내 냈다. 영숙이 눈을 감고 웃었다.

“거기서 편지가 나갔구나.”

“응. 엄마가 쓴 게.”

정례는 현관에서 신발을 신다가 두 사람을 보았다. 영숙이 먼저 퇴근 인사를 했다. 채영은 정례가 떠난 뒤 컵을 다시 옮기지 않았다. 어머니가 고른 자리에는 손수건이 접혀 있었고, 전화기는 소파 옆 고정대에 있었다. 밤이 오기 전에 집 안의 몇 가지 물건이 제 주인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