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미래 하드SF 재난극 44화

라그랑주 5의 유언

벽이 먼저 대답했다

아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 전에 금속 맛을 느꼈다. 혀를 깨문 줄 알고 입술을 닦았지만 피는 없었다. 천장 환기구에서 낮은 울림이 났다. 한 번 길어졌다가 끊기는 소리였다. 숙소의 조명이 흔들리고 컵 안의 물이 둥근 가장자리로 기어올랐다. 회전 제어가 미세하게 보정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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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기 전에 금속 맛을 느꼈다. 혀를 깨문 줄 알고 입술을 닦았지만 피는 없었다. 천장 환기구에서 낮은 울림이 났다. 한 번 길어졌다가 끊기는 소리였다. 숙소의 조명이 흔들리고 컵 안의 물이 둥근 가장자리로 기어올랐다. 회전 제어가 미세하게 보정되고 있었다.

가온이 단말을 울렸다. 셋째 관측소 제외 요청서가 열린다는 연락이었다. 아리는 양말도 신지 않은 채 화면을 켰다. 전날의 창에서 하루가 줄었다. 남은 도달 범위는 일곱 날에서 열 날. 아직 폭풍이 닿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C구역 압력경보가 그 말보다 먼저 울렸다.

“아리, 환기댐퍼가 걸렸어.” 리오의 목소리에 숨이 섞였다. “열둘 앞쪽 복도야. 중앙에서는 녹색인데 바람이 안 나와.”

그녀는 현장 계측기와 작은 공구함을 집었다. C-12라는 표지를 지나칠 때 무릎 안쪽이 먼저 굳었다. 오래전 사십사 초 동안 빠져나간 공기. 숫자로는 외웠지만 몸은 매번 새로 기억했다. 복도 바닥에 앉은 소년이 귀를 막고 있었다. 리오는 환기구 덮개를 들어 놓고 손전등을 비췄다. 환기팬은 돌아가고 있었으나 공기가 사람 쪽으로 오지 않았다.

“문은 열지 마. 반대편 압력부터.”

아리는 스스로도 듣도록 크게 말했다. 주민 두 사람이 외부 통로문 손잡이를 붙잡고 있었다. 한 사람은 바람을 들여오면 된다며 반박했다. 아리는 계측기 호스를 문 아래 시험구에 물렸다. 현재 구역과 반대편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 문을 열면 호흡곤란을 겪는 소년 앞으로 돌풍이 들어올 수 있었다.

“팬이 아니라 판이 움직이지 않아요. 안쪽에서 고치겠습니다.”

리오가 손을 넣었다가 빼냈다. 손등에 붉은 줄이 생겼다. 통풍판의 축 끝이 뜨거웠다. 그는 다시 손을 뻗었고 아리가 공구함을 밀어 넣었다. 둘이 함께 댐퍼 손잡이에 연장대를 걸었다. 그러나 판을 잡아당길수록 축이 울었다. 부러지면 통로 전체를 닫아야 했다.

사나가 통신으로 호흡을 맞췄다. “당기는 게 아냐. 아래 핀을 먼저 빼. 그 판은 닫힌 힘을 풀어야 돌아.”

아리는 장갑을 낀 손가락 두 개로 잠금핀을 더듬었다. 불빛 밖에서 작은 모서리가 걸렸다. 공구 끝이 미끄러져 팔이 덮개에 부딪혔다. 리오가 그녀의 팔을 받치자 환기구 쪽으로 고인 땀이 흘렀다. 금속 맛은 이번에는 진짜 피였다. 입술 안쪽이 갈라졌다.

핀이 빠지는 순간 판이 반 바퀴 돌았다. 리오가 연장대를 놓치지 않고 버텼다. 차가운 바람이 바닥을 쓸었다. 소년은 귀에서 손을 떼고 깊게 들이쉬었다가 기침했다. 의료팀이 그를 벽에서 떨어진 자리로 옮겼다. 아리는 판을 열린 위치에 고정하고 중앙화면을 불렀다. 화면은 여전히 녹색이었다.

“팬 회전만 봤네요.” 기사가 말했다.

리오는 욕을 내뱉었다. 그다음에는 주민들에게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팬이 돌고 있다는 사실과 사람이 숨 쉬고 있다는 사실 사이의 빈 공간이 오늘은 사람 얼굴로 보였다. 중앙 담당자는 현재 댐퍼 위치를 직접 보겠다고 했다. 아리는 그가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덮개를 닫지 않았다.

소년의 어머니가 아리 손목을 붙잡았다. “폭풍이 벌써 왔어요?”

“지금은 환기축 고장이에요. 외부값은 계속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때에만 고장 나죠?”

아리는 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지난 며칠의 단축교대 때문에 늦춘 정비 항목에 그 축의 세척이 있었다. 정비를 미룬 것은 사람을 쉬게 하기 위해서였다. 두 선택 중 하나를 옳다고 만들면 나머지가 사라지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녀는 작업표를 가져오라고 했다. 소년이 있는 앞에서 책임을 다투지는 않았지만 무엇을 늦췄는지는 숨기지 않았다.

도한은 식당에서 대체 인력을 찾던 중 호출을 받았다. 현장을 보고 나서 보존실로 가자던 약속을 뒤로 미뤘다. 운영팀 한 사람이 오늘의 중앙 화면을 종이로 남겼다. 고쳐진 판을 다시 닫아 고장을 재현하자는 기사가 있었지만, 주민들은 이미 그 복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아리는 철거한 잠금핀과 축 온도 기록으로 시험실에서 재현하자고 했다. 사람의 호흡을 증거로 붙들 수는 없었다.

점심 뒤 제외 요청서가 열렸다. 아리는 공구를 내려놓은 손으로 종이 모서리를 눌렀다. 검토자 이름 일부는 가려져 있었지만 직위와 요청 내용은 남았다. 셋째 관측소의 높은 방향값을 ‘다른 두 방향과 합치되지 않는 이상치’라며 빼 달라는 요구였다. 그 아래에는 재검토를 기다릴 경우 전망 공개 일정이 늦어진다는 문장이 있었다.

“틀린 값을 고치자는 요청입니까?” 도한이 물었다.

가온은 두 방향만 쓴 계산을 펼쳤다. 그 경우에는 게시판의 낮은 상한이 재현됐다. 세 번째 방향을 넣으면 상한이 높아졌다. 이반이 읽었다는 경고는 바로 그 차이를 가리켰다. 재단의 위원회는 보정 근거를 완성한 것이 아니라 공개 일정에 맞춰 불일치를 제외한 것이었다.

이반은 종이를 오래 보았다. “합치되지 않는 것을 빼고 나면, 남은 것들은 언제나 합치되겠죠.”

리오는 그를 보았다. 그 말을 뒤늦게 할 수 있다는 것이 화가 났다. 이반은 자신의 최종 승인 아래 아직 비어 있는 재검토 확인란을 가리켰다. 자료를 받아 보지 않았다는 방어는 남았으나, 비어 있는 칸을 두고 승인한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늘 철회할 수 있는 게 뭡니까?” 리오가 물었다.

도한은 재단 전망을 거주지 작업 제한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던 운용 지시를 중단할 수 있다고 했다. 책임 최종판정이 나야만 현재의 잘못된 판단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반은 자신이 승인한 지시의 효력 중단에 서명했다. 원래 서명은 지우지 않았다. 가온은 새로운 계산을 외부 두 관측소에 보내 검증을 요청했다.

그때 시험실에서 연락이 왔다. 새 흡착통 지속시험의 열 연결부가 안정됐다. 정비기사가 축하하듯 손을 들었지만 아리는 끝나는 시각을 물었다. 아직 두 시간이 남았다. 리오는 두 시간 정도가 오늘의 기분을 망치게 하지 말자고 하려다 C구역 소년의 눈을 떠올렸다. 눈앞에 있는 호흡을 기대값으로 세지 않기로 했다.

니마는 아리가 찢어진 장갑을 벗는 것을 보고 새 장갑을 꺼냈다. 그녀는 외벽에 나가지 않는 대신 시험실의 운반을 맡았다. 접촉이 불안정했던 부품을 상자에 담다가 손을 멈췄다. “우리가 이걸 고칠 동안 외벽은 또 늦겠죠?”

“오전 환기축은 끝냈어요. 늦어진 건 아직 남아 있고요.”

니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작업표가 한꺼번에 녹색이 되는 날만 성공이라고 부르면, 자신이 오늘 옮긴 상자는 평생 아무 일도 하지 못한 물건이 된다. 그녀는 고장 부품 상자를 두 손으로 들고 시험대 위에 놓았다.

리오는 오후 배식이 끝나기 전에 C구역으로 돌아갔다. 소년은 어머니 옆에서 식판의 고기를 잘게 찢고 있었다. 환기구에는 새 임시 표식이 붙었다. 중앙 담당자가 그 앞에서 직접 판 위치를 확인했다. 소년이 리오의 손등을 가리켰다. “저 때문에 긁혔어요?”

“아니. 내가 맨손으로 먼저 잡았어.”

“그럼 다음에는 장갑 끼면 되겠네요.”

리오는 웃었다. 너무 쉬운 말이었다. 그리고 다음에 실행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그는 의료팀이 준 작은 밴드를 붙였다. 소년은 자기가 남긴 고기 한 조각을 내밀었다. 어머니가 말리기 전에 리오가 식판을 보여 주었다. 그도 제 몫을 받았다. 소년은 고기를 다시 먹었다.

저녁 총회에서 도한은 전날의 제외 기록이 오늘 무엇을 바꿨는지 먼저 말했다. 재단 전망을 단독 기준으로 삼던 지시가 중단됐고, 독립 관측으로 작업 제한을 유지한다. 중앙 환기표시도 판 위치를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환기 정상으로 읽지 않는다. 마테오는 기록을 듣다가 “적어도 그 초록불 하나는 졌군요”라고 말했다.

그 말에 웃는 사람이 생겼다. 승리는 작았지만 누군가를 비웃는 웃음은 아니었다. 이반은 앞줄에서 일어나 자신이 승인한 입력 제외와 비어 있던 재검토란을 읽었다. 사과를 받아 달라고 하지 않았다. 리오는 마이크를 빼앗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자기 목소리로 그 줄을 끝까지 읽게 두었다.

총회가 끝난 뒤 아리는 복도에서 도한을 기다렸다. 환기축 세척을 미룬 작업표에 운영 승인과 자신의 검토표시가 함께 있었다. 그녀는 그 줄도 오늘 기록에 넣자고 했다. 도한은 한숨을 쉬었으나 거부하지 않았다. 잘못을 한 사람 하나 찾고 나면 끝날 거주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오전의 고장은 고쳐졌고, 내일 같은 복도에서 사람들은 식당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

통신실 불이 마지막으로 낮아질 때 시험실의 안정 그래프가 올라왔다. 종료까지 사십 분. 아리는 손목시계를 맞추고 의자에 앉았다. 기다리는 것은 여전히 어려웠다. 그러나 오늘 그녀는 고장 난 판을 열었고, 전망에서 잘려 나간 방향 하나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남은 사십 분은 그 일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지킬 수 있었다.

그녀가 의자에 기대자 갈비뼈 아래가 아팠다. 오전에는 공구함에 눌린 자리라고 생각했으나 이제는 숨을 깊게 들이쉴 때마다 같은 곳이 당겼다. 의무실을 부를지 망설이는 동안 사나가 따뜻한 물을 놓았다. 아리는 컵을 받지 않고 먼저 자기 통증을 말했다. 사나는 컵을 탁자에 두고 의료팀에 연결했다. 시험 담당 기사는 아리 앞의 기록판을 받아 들었다. 그녀가 검사실로 가는 동안에도 유량계는 움직였다. 돌아온 자리에는 종료시각을 적을 칸이 그대로 있었고, 그녀 없이 읽은 세 줄의 값이 새로 채워져 있었다. 사나가 물었다. “이제 우리한테도 혼자 버티지 말라고 말할 수 있겠어?” 아리는 컵을 두 손으로 들었다. 따뜻한 물이 입술의 갈라진 곳을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