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지난 복숭아밭
하루치 현금의 소리
포장재 상자가 왔을 때 최옥순은 빚쟁이가 먼저 온 줄 알고 문을 열었다. 상자에는 첫 생산분만 들어 있었다. 어제 공급업체와 나눈 납품 날짜대로였다. 택배기사가 내려놓는 소리를 듣고도 옥순은 안심하지 못했다. 전기료와 포장대금의 납부일이 서로 다른 칸에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포장재 상자가 왔을 때 최옥순은 빚쟁이가 먼저 온 줄 알고 문을 열었다. 상자에는 첫 생산분만 들어 있었다. 어제 공급업체와 나눈 납품 날짜대로였다. 택배기사가 내려놓는 소리를 듣고도 옥순은 안심하지 못했다. 전기료와 포장대금의 납부일이 서로 다른 칸에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윤보리는 주방에 들어오자마자 냉장고보다 현금통을 먼저 보려는 자신을 발견했다. 류미정이 그 손을 막았다. “오늘은 원물 상태 먼저요. 돈이 병을 깨끗하게 해 주진 않으니까.” 보리는 손을 씻고 지난해 냉동해 둔 과육이 냉장 해동된 상자를 열었다. 냉동 전에 충분히 익었던 과육은 향이 좋았고, 덜 익었던 조각은 단단했다. 해동 후 다시 익는 과일처럼 기다릴 수는 없었다. 오늘 확인한 상태로 배합과 사용 순서를 정해야 했다.
미정은 아침 배치에 큰 조각을 적게 넣었다. 박 여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 과육을 아껴 두는 거야?”
“오늘은 이씨 향이 잘 살아 있어요. 큰 조각은 오후 병에 넣으면 식감이 더 좋아요.”
박 여사는 냄비를 들여다보다 젓는 방향을 바꾸었다. 보리는 둘의 말다툼이 이제는 어느 집 방식이 틀렸느냐보다 어느 병에 쓰느냐로 바뀐 게 좋았다. 한 숟가락을 맛보니 단맛 뒤에 산미가 따라왔다. 오늘 팔릴 병이 완성되면 현금통에도 소리가 날 것이다.
은행에서는 전날 확인한 작은 단기차입의 조건과 상환 일정이 나왔다. 옥순이 종이를 펴자 박 여사가 먼저 이자 칸을 봤다. “열흘 뒤 갚으면 이만큼. 늦어지면?”
“그래서 보험금 날짜만 보고 약속하지 않기로 했어요.” 보리가 말했다. “우리 판매금이 들어오는 날과 나가는 날을 매일 확인하고, 부족하면 미리 상환일을 조정해야 해요.”
이씨는 조합 명의의 단기차입을 승인하되 상한을 어제 계산한 부족액으로 묶자고 했다. 다섯 사람이 동의했다. 조합장의 개인 보증이나 각 농가의 보험금을 자동 담보로 적는 문장은 없었다. 서류에 없는 약속을 구두로 더하지도 않았다. 돈이 계좌에 들어와야 전기료를 낼 수 있으니, 옥순은 은행의 실행 확인 시각까지 다시 물었다. 예정과 입금은 다르다는 말을 이제는 먼저 했다.
그날 오후 가족 작업장에 납품하던 오래된 자재상 사람이 왔다. 옥순이 밀린 대금의 연장을 부탁해 둔 상대였다. 그는 공동주방의 새 병을 보자 곧장 “장사 잘되네”라고 말했다. 옥순의 얼굴이 굳었다. 병이 놓인 이곳은 다섯 농가가 함께 운영하는 부엌이고, 그의 외상은 가족 작업장 장부에 있었다.
“이 병 매출을 그대로 그 빚에 넣을 수는 없어요.” 옥순이 말했다.
자재상은 웃음을 거뒀다. “그럼 언제 받을 수 있습니까? 한 달 넘게 날짜만 바뀌었어요.”
옥순은 보험금 이야기를 꺼내려다 입을 다물었다. 예상 지급액은 개인 필지의 피해 보상이고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그 돈이 오면 모든 외상을 갚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쉽고 위험했다. 그는 가족 작업장 장부를 가져와 현재 줄 수 있는 금액과 다음 판매일 뒤 가능한 금액을 나눠 적었다. 자재상은 종이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이 정도 받고 또 기다리라고요?”
“무조건 더 나온다고 약속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다음 주에 실제 매출이 확인되면 다시 말씀드릴게요.”
자재상은 처음에는 돌아서려 했다. 그때 미정이 문을 열어 둔 채 밖에서 기다리던 납품차 기사에게 포장 상자를 인도했다. 실제로 쉰여덟 묶음 이후 다시 주문이 들어오는 부엌이라는 걸 자재상도 봤다. 하지만 그는 병에 적힌 조합 이름을 보고 더 이상 가족 빚과 공동매출을 같은 말로 묶지 않았다.
“오늘 적은 돈이라도 받겠습니다. 날짜는 이 종이대로 다시 연락해 주세요.”
옥순은 그에게 작은 금액을 이체했다. 보리는 화면을 보지 않았다. 옥순이 자기 돈을 어디서 마련했는지는 나중에 장부로 분리해야 할 문제였다. 지금은 자재상과의 약속이 실제 지급 하나로 시작됐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자재상이 나가며 병 하나를 사겠다고 하자 옥순은 공짜로 주려 했다. 그가 “내 돈을 받으러 온 사람한테 선물로 주면 더 민망하지”라며 값을 냈다. 박 여사가 뒤에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자재상은 병을 가방에 넣었다가 다시 꺼냈다. “냉장으로 얼마나 둡니까?”
미정이 라벨의 보관조건과 표시된 기한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자재상은 작은 글씨를 읽으려 안경을 꺼냈다. “아내가 이런 걸 좋아해서. 그런데 내가 들고 다니다 따뜻해지면 못 먹는 거잖아요.”
“지금 바로 집에 가시나요?”
“아니요. 두 군데 더 돌아야 합니다.”
미정은 작은 보냉 가방과 냉매를 보여 줬다. 그건 별도 포장 비용이 들었다. 자재상은 잠깐 망설이다 값을 더 냈다. 옥순은 또 공짜로 해 주겠다고 했지만 미정이 눈으로 막았다. 자재상에게는 약속한 외상 대금을 받는 일과 손님으로서 안전한 상품을 사는 일이 나란히 있었다. 하나를 다른 하나의 할인으로 계산할 이유가 없었다.
“아내가 먹고 괜찮으면 다음엔 제 돈으로 또 사겠습니다.” 그가 말했다.
“오늘도 제 돈 받으러 와서 제 돈으로 사셨잖아요.” 옥순이 답했다.
둘은 이번엔 함께 웃었다. 보리는 그 웃음이 외상 문제가 끝났다는 뜻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래도 상대가 부엌에서 나갈 때 손에 들고 간 것은 독촉장만이 아니었다.
자재상이 떠난 뒤 옥순은 보리를 불렀다. 오래된 가족 작업장의 장부를 보여 주려는 줄 알았는데, 손에는 오늘 이체한 돈의 출처가 적힌 통장 내역이 있었다. 자기 개인 예금에서 보낸 돈이었다. 공동주방 계좌와 섞이지 않았다.
“아까 네가 안 봐서 말해 주는 거야.”
“안 보려던 건 옥순 씨 돈이니까요.”
“그렇다고 네가 내 마음까지 안 봐도 된다는 건 아니지.”
옥순은 한동안 손등으로 통장을 덮었다. 평소라면 먼저 큰소리로 해결책을 말했을 사람이었다. “내가 조합장이라 무슨 일 나면 내 돈으로 막아야 할 것 같아. 그게 버릇이 됐어. 그런데 지난번에 다섯 사람이 서명한 걸 보고 겁났어. 내 돈이 들어가면 내가 다섯 사람 몫을 대신 결정하고 싶어질까 봐.”
보리는 답을 서둘러 주지 않았다. 옥순이 개인 돈을 쓴 사실은 가족 작업장 빚에 관한 일이고, 공동주방의 새 차입과는 별개였다. 하지만 두 일을 나눠 적는 것만으로 옥순의 부담이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같이 볼 사람을 정하세요.” 보리가 말했다. “제가 몰래 장부를 고치는 사람이 되면 또 혼자 결정하는 것과 비슷해요.”
“미정한테 먼저 말해 볼까.”
“미정 씨는 주방에서 일하니까 이해관계도 있어요. 옥순 씨가 편한 사람을 고르되, 그 사람이 모든 책임을 대신 지진 않게요.”
옥순은 통장을 다시 가방에 넣었다. “그럼 오늘은 내가 내 돈으로 내 빚 일부를 갚은 날이네.”
“네.”
“너무 작은 날이다.”
보리는 자재상이 사 간 병을 떠올렸다. “작게 시작했어요.”
옥순은 한숨을 내쉬더니 포장대의 빈 상자를 접기 시작했다. 보리도 맞은편에서 손을 보탰다. 상자가 접히는 소리 사이로 서로 더 할 말이 있었지만, 둘은 잠시 그 일을 함께 했다.
상자 모서리에 작은 복숭아 그림이 인쇄되어 있었다. 옥순은 그 그림을 손가락으로 눌러 접고, 이번에는 삐뚤어진 상자를 펴서 보리에게 다시 건넸다.
주방의 매출함에 현금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자재상에게 들어간 이체 알림과는 다른 소리였다. 보리는 그 둘을 머릿속에서 상쇄하지 않았다. 병 한 개가 오래된 빚을 갚지 못한다. 그래도 병 한 개를 사고 싶을 만큼 맛이 있다는 사람이 오늘 여기 있었다.
저녁 생산을 마치자 미정은 하루 현금표를 펼쳤다. 예약금 중 이미 만들 물건에 묶인 부분, 오늘 출고로 매출이 확정된 부분, 포장재와 전기료로 나갈 부분이 보였다. 옥순은 은행 입금 확인 문자를 보여 줬다. 단기차입이 실제 계좌에 들어왔고, 옥순은 그 계좌에서 전기료를 납부했다. 보리는 상환일까지 매일 잔액을 보되, 오늘 빌린 돈을 판매이익인 것처럼 배분표에 올리지 않았다.
해진은 퇴근길에 빈 유리병을 두 개 가져왔다. 어제 산 콩포트를 집에서 먹고 씻어 온 것이었다. 미정은 병을 바로 재사용품으로 놓지 않았다. 판매용 용기와 반납병은 검사와 세척 기준이 다르다. 해진은 “저는 좋은 일을 하려고 했는데 또 한 칸이 생기네요”라고 했다.
“좋은 일은 다음번에 병 들고 오기 전에 물어보는 거죠.” 보리가 말했다.
“그럼 지금은?”
“빈 병 두 개를 들고 온 사람. 나랑 산책은 할 수 있고요.”
해진은 병을 양손에 든 채 잠깐 말이 없었다. 미정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병을 반납대에 놓고 보리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마을길에는 서리보다 따뜻한 저녁 냄새가 있었다. 보리는 오늘 자재상이 사 간 병의 맛을 물었고, 해진은 자기가 어제 먹은 병의 큰 조각을 설명했다. 보리는 그 큰 조각이 어느 농가 것인지 맞혀 보라고 했다. 해진이 틀리자 힌트를 주지 않고 한 걸음 먼저 걸었다. 그가 다시 따라와 두 번째 답을 말할 때까지 보리는 웃음을 참았다.
길 끝에서 옥순에게 전화가 왔다. 자재상이 약속한 날짜를 다시 확인하는 전화였다. 옥순은 이번에는 통지서의 큰 숫자를 앞세우지 않았다. 오늘 지급한 금액과 다음 확인일만 말했다. 통화를 마친 뒤 그는 주방 문을 한 번 더 잠갔다. 내일 또 팔아야 할 병들이 냉장고 안에 있었다. 열흘 뒤를 빌려 오늘을 넘겼지만, 오늘 내야 할 몫만큼은 실제 돈으로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