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 범죄 케이퍼 44화

활주로 아래 19번 벨트

상자를 따라간 주황색

재혁은 주황 분필을 자기 사물함에서 꺼냈다. 분류팀에서 상자가 급하게 옮겨질 때 바닥에 작은 표시를 남기는 습관이 있었다. 공식 분류표에는 없는 방식이었다. 그는 지후 앞에서 분필을 들고도 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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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혁은 주황 분필을 자기 사물함에서 꺼냈다. 분류팀에서 상자가 급하게 옮겨질 때 바닥에 작은 표시를 남기는 습관이 있었다. 공식 분류표에는 없는 방식이었다. 그는 지후 앞에서 분필을 들고도 쓰지 못했다.

“규정 위반이라고 하겠죠.”

“어떤 일을 했는지 먼저 듣겠습니다.” 지후가 말했다.

재혁은 네 손실 상자 가운데 하나가 3번 적재대를 지나던 날을 기억했다. 그 상자의 송장번호를 읽은 게 아니라 모서리에 주황색 짧은 선을 그었다. 벨트가 자주 막혀 같은 무게의 상자가 다른 줄로 넘어가면, 동료에게 ‘그거 아까 본 것’이라고 알려 주려는 표시였다. 상자에 직접 적은 일은 규정 밖이었다. 그러나 금속블록으로 바뀐 그 상자와 표시가 다시 만났다는 말은 아직 없었다.

나경은 보험사가 보관한 포장 사진을 열었다. 주황 선은 접착제 가장자리에서 끊겨 있었다. 재혁은 사진을 보는 순간 고개를 저었다.

“이건 내가 그린 선 끝이 아닌데요.”

“왜요?”

“제 분필은 굵어서 옆으로 번집니다. 여기는 끝이 너무 깨끗해요.”

지후는 재혁에게 새 선을 그리게 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재현한 선이 과거의 선과 똑같지 않다고 해서 거짓말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원본 사진의 해상도와 촬영 각도를 먼저 확인했다. 사진을 돌리자 끊긴 선 아래로 포장테이프가 한 겹 더 붙은 부분이 보였다. 재혁이 그렸던 상자 표면이 나중에 바뀌었을 가능성은 생겼지만, 그가 찍었다는 선인지 아직 몰랐다.

로사는 분필 이야기를 듣고 자기 팀의 청소표를 찾아왔다. 그날 새벽 3번 적재대 문턱의 주황 가루를 닦았다는 기록이 있었다. 담당은 파리다가 아니었다. 로사가 전날 밤 직접 확인해 둔 작업 범위와 겹쳤다. 그러나 청소표에는 ‘주황 분필’이라고 쓰지 않았다. 단지 바닥의 건조 분말이라고 했다.

“제가 봤으면 기억했을까요?” 로사가 물었다.

“억지로 기억하지 마세요.” 나경이 말했다. “그때 적은 말이 지금 떠올린 색보다 정확할 수 있어요.”

재혁은 로사를 보자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의 임의 표시 때문에 미화반이 일을 더 했던 것이다. “몰랐어요. 발에 밟히면 없어질 줄 알았죠.”

“바닥은 누가 닦았겠어요.” 로사가 말했다.

그 말에는 화가 있었지만 곧바로 고발이 되지는 않았다. 로사는 재혁에게 앞으로 공식 분류표로 넘기라고 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지금 조사에서 그 규정위반을 숨기면 더 큰 거짓이 될 것 같아 사물함의 분필까지 가져왔다고 했다.

안전팀은 전날 유압계 작동유와 비슷한 시료가 발견된 벽을 아직 열지 않았다. 현재 공조와 방화 구획을 확인 중이었다. 지후는 재혁의 표시와 벽의 빈 공간을 한 줄로 연결하려는 수사판의 화살표를 지웠다. 대신 문턱 바닥의 사진을 원본으로 요청했다. 미화반이 닦기 전 현장 카메라에 남은 한 프레임이 있었다.

화면에는 상자 모서리보다 낮은 위치에 주황 가루가 끌린 자국이 보였다. 재혁은 숨을 들이켰다. 자기 표시는 상자 위에 했는데 바닥에는 누가 문지른 듯 길게 남았다. 상자를 들어 옮기다가 모서리가 문턱에 스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분필이 다른 물건에 먼저 묻었을 수도 있었다. 지후는 프레임의 앞뒤를 이어서 봤다.

바닥을 지나간 것은 상자 하나가 아니라 덮개가 있는 운반대였다. 덮개 아래의 무엇이 문턱에 닿았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재혁은 자신의 표시를 다시 보려 몸을 화면 가까이 들이밀었다. 지후가 확대하자 영상의 네모난 픽셀이 커졌다. 보이지 않던 글자가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때 화물팀에서 전화가 왔다. 비 때문에 전날 바뀐 우회 동선이 아직 복구되지 않아 낮 출고가 밀리고 있었다. 로사는 수사실을 나가려 했다. 지후가 한 가지만 더 묻겠다고 했다. “주황색 표시가 붙은 상자를 다른 줄에서 다시 봤습니까?”

로사는 재혁에게 답하라고 고개를 돌렸다. 재혁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예전 같으면 빨리 끝내기 위해 봤다고 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오늘은 자기 분필 때문에 미화반의 일이 늘어난 것까지 들었다. 거짓 기억 하나를 더 만들고 싶지 않았다.

로사는 낮 근무자에게 우회로가 열릴 시간을 전했다. 동선 변경으로 오래 기다린 인부들은 로사보다 설비팀에 화가 나 있었다. 그녀는 안전팀 결정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하고, 당장 열 수 있는 통로를 함께 걸었다. 벽의 기름 냄새는 줄었지만 시료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출고가 늦어져도 위험구역을 지름길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때 분류대에서 경고음이 났다. 오늘 들어온 생과일 상자 하나가 임시 우회 벨트에서 옆으로 돌아가 다른 항공편 줄에 걸렸다. 재혁이 가장 먼저 뛰었다. 손에는 습관처럼 주황 분필이 들려 있었다. 로사가 그의 손목을 보고 멈춰 세웠다. “그걸로 다시 상자에 선 긋지 마.”

“그러면 저쪽으로 넘어가요.”

“벨트를 멈추라고 무전해. 네 손을 넣지 말고.”

재혁은 작업반장에게 정지 요청을 했다. 반장은 적재 마감이 가까워진다며 먼저 수동 분류를 하라고 했다. 재혁이 어제의 조사 때문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끼인 상자를 당기려면 회전 롤러 위로 팔을 뻗어야 했다. 로사는 그 위험을 보자 자신이 사건의 단서를 밝히는 데 도움을 준 분필보다 지금 재혁의 팔을 지키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반장은 직접 분류대에 와서 상자의 걸린 위치를 봤다. 그제야 벨트를 멈췄다. 재혁과 다른 분류원이 상자를 빼내고 송장번호를 확인했다. 생과일은 예정된 항공편에 다시 들어갔지만 포장 한쪽이 젖어 있어 포장 담당의 확인도 받았다. 시간을 몇 분 잃었고 손실 상자를 한 개 더 만들지는 않았다.

재혁은 분필을 주머니에 넣었다. “예전에도 이렇게 멈췄어야 했는데.”

로사가 말했다. “그땐 네가 다른 사람에게 표시를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오늘은 다른 사람이 네 말에 멈춰 줬어.”

재혁은 고개를 돌렸다. 정식 임시표지지 신청서를 쓸 거라고 했다. 그것이 자신을 징계에서 보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 야간조의 사람이 규정을 어기지 않고 상자의 이동을 설명할 방법은 생길 수 있었다.

재혁은 처음에는 상자에 선을 그린 일을 윗사람에게 알리지 말아 달라고 했다. 나경은 수사 사실과 인사 징계를 자신이 맞바꾸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조세영이 함께 와서 회사의 조사 범위와 재혁의 근무시간을 확인했다. 재혁은 자기가 한 일의 불이익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도둑과 같은 표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견딜 수 없다고 했다.

“분필로 표시하면 안 됐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 상자를 빼돌린 건 아니에요.”

지후는 그 두 문장을 따로 적었다. 위반 사실이 절도 공모를 증명하지 않는다는 문장은 재혁에게 약속이 아니라 조사 기준이었다. 향후 다른 증거가 나오면 다시 봐야 했다. 지금은 선 하나로 사람을 가둘 수 없었다.

오후에 문턱의 안료 시료와 재혁의 분필을 비교한 첫 결과가 나왔다. 같은 계열의 주황 안료였지만 공항에서 쓰는 다른 표시 도구에도 들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위치였다. 촬영 시각을 보정하면 상자가 정상 분류 줄을 떠난 뒤 폐쇄 연결로 바깥 문턱에서 바닥에 주황 흔적이 생겼다. 상자 자체가 그 문을 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운반대가 그곳을 지나간 한 순간은 확인됐다.

나경은 네 피해회사 중 그 상자의 포장 사진을 다시 꺼냈다. 지급 판단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체된 포장 면을 찾기 위해서였다. 바뀐 금속블록의 표면에는 주황 안료가 없었다. 재혁은 “그럼 제 표시가 사라진 거네요”라고 했다. 나경은 “원래 상자의 표면이 어디로 갔는지 아직 모릅니다”라고 답했다. 그의 손이 닿은 상자와 지금 남은 대체물이 다른 물건임을 말할 수 있는 지점까지 왔다.

저녁에 재혁은 분필을 사물함에 다시 넣지 않았다. 분류팀 반장에게 보관 절차에 맞춰 건넸다. 다음 교대에는 공식 임시표지지를 받았다. 로사는 그가 찍은 첫 공식 표시를 봤다. 바닥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았다. 표지지에는 담당자와 시각, 옮길 줄을 적는 세 칸이 있었다. 재혁은 마지막 칸을 쓰다가 멈췄다. 현재의 우회 줄은 임시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반장에게 확인해 정확한 줄 번호를 적었다. 한 장은 상자에, 한 장은 작업대 기록판에 붙였다. 로사는 두 장을 번갈아 봤다. 누가 상자를 다시 옮기더라도 바닥의 흔적을 추측하는 대신 이동 이유를 물을 수 있었다.

“이게 진작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로사가 말했다.

“신청서가 귀찮다고 제가 안 냈어요.” 재혁이 대답했다.

두 사람은 잠시 어색하게 웃었다. 재혁은 자신에게 돌아올 회사 면담을 두려워했고 로사는 그가 쓸데없이 도둑으로 불리지 않기를 바랐다. 밤의 바닥에는 이제 주황 가루가 남지 않았다. 대신 그날 문턱을 지나간 운반대의 한 프레임이 지후의 수사판에 남았다.

재혁은 그 프레임을 마지막으로 봤다. 덮개 아래 물건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벨트를 멈춰 실제 상자를 꺼낸 손에는, 당시 덮개 속 물건을 상상으로 채우지 않아도 되는 힘이 조금 생겼다. 그는 회사 면담에 갈 때 자기 분필과 공식 표지지 신청 내역을 둘 다 가져가기로 했다. 잘못한 일은 설명하되, 하지 않은 일까지 대신 짊어지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로사는 그가 손을 씻고 나오는 동안 복도에서 기다렸다. 면담실까지는 함께 걸어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