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야간 왕진
달력의 일곱 칸
부엌 달력은 원래 약 먹는 날과 손녀가 오는 날만 표시했다. 채영이 그 위에 빨간 선으로 일주일을 그리자 영숙은 달력을 한 번 돌려 보았다. 딸의 출근, 정례의 근무, 지원 담당 후보의 두 시간, 배송 예정일이 자기 이름 주위에 빽빽했다. 정작 자신이 혼자 책을 읽고 싶은 시간은 없었다.
부엌 달력은 원래 약 먹는 날과 손녀가 오는 날만 표시했다. 채영이 그 위에 빨간 선으로 일주일을 그리자 영숙은 달력을 한 번 돌려 보았다. 딸의 출근, 정례의 근무, 지원 담당 후보의 두 시간, 배송 예정일이 자기 이름 주위에 빽빽했다. 정작 자신이 혼자 책을 읽고 싶은 시간은 없었다.
“이건 내가 사는 달력이야, 네가 나를 보관하는 달력이야?” 영숙이 물었다.
채영은 펜을 놓았다. 승인 전 일주일을 버틸 표를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어머니에게는 모든 시간을 감시받는 표처럼 보일 수 있었다. 그녀는 빈칸에도 ‘혼자 있기 원함’과 ‘도움 필요하면 연락’이라는 서로 다른 표시를 쓰자고 했다. 영숙은 일요일 오후에 먼저 작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여기는 내가 혼자 있을래. 네가 와서 잔소리하면 쫓아낼 거야.”
“일요일에 내가 쉬는데도?”
“그러니까 너도 쉬어.”
정례는 식탁에서 다음 주 근무표를 꺼냈다. 채영이 정례의 이름을 월요일 밤 빈칸에 연필로 적었다가 지우는 것을 봤다. 정례는 그날 이미 다른 집의 아침 방문이 있다고 했다. 밤을 연장하면 잠을 네 시간밖에 못 잔다.
“한 번은 할 수 있어도 그걸 달력에 적으면 계속해야 해요.” 정례가 말했다.
영숙은 정례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정례는 “미안하다고 하실 일 아니에요. 오늘 제 퇴근시간만 지켜 주시면 돼요”라고 답했다. 채영은 자신이 쓰려던 연필 자국을 지웠다. 빈칸을 감추지 않고 보는 일이 새삼 힘들었다.
지수가 기관에서 가져온 임시 지원표에는 다음 주 월요일부터 ‘예정’이라는 도장이 있었다. 공식 승인 전이라 확정이 아니었다. 후보도 영숙과 짧게 만났지만, 두 시간 근무가 실제로 배정될지는 계약서가 와야 했다. 채영은 그 칸을 연한 색으로 표시했다. 영숙은 “예정이란 말을 사람처럼 앉혀 놓지 마”라고 했다.
그날 낮 세현이 예정된 방문을 했다. 그는 영숙이 피곤해 보이는 이유를 임의로 돌봄 공백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밤잠을 설친 일, 호흡 상태, 기기 사용을 각각 물었다. 하진은 필요한 관찰을 맡고 세현은 의학적 판단을 확인했다. 영숙은 지난 정전이 생각나서 잠이 깼다고 말했다. 이송을 새로 권할 상태인지는 그날의 관찰과 본인 뜻으로 살폈다. ‘집에 남는다’는 기존 선택을 대화 끝의 자동 답으로 만들지 않았다.
채영은 세현이 어머니에게 직접 묻는 동안 달력을 접어 두었다. 영숙의 숨보다 돌봄표가 먼저 설명이 되면 세현마저 자신이 만든 표를 통해 어머니를 보게 될 것 같았다. 방문 뒤 영숙이 먼저 달력을 다시 펴자 세현은 연락이 꼭 필요한 변화와 기다려도 되는 불편을 구분해 말했다. 밤에 혼자 있는 시간을 금지하는 법처럼 적지 않았다. 하진은 당직 연락 범위가 실제로 가능한 시간만 확인했다.
오후에 채영은 사무실 회의를 마치고 시간을 맞춰 달려왔다. 현관에는 손녀의 그림 엽서가 놓여 있었다. 영숙이 혼자 있는 동안 우편함에서 찾아온 것이다. 채영이 “밖에 나갔어?”라고 묻자 영숙이 얼굴을 찌푸렸다.
“문앞까지 갔다. 네 달력에 그건 뭐라고 쓰니?”
채영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자기 몸을 시험하는 것 같아 겁났다. 영숙은 엽서를 펼쳐 손녀가 그린 강아지를 보여 줬다. “오늘 내 일도 하나 있었어.” 채영은 강아지의 다리가 여섯 개인 걸 보고 웃었다. 웃다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틀 뒤로 예정된 예비 산소통 배송 전화가 왔다. 업체는 대체 기기 이용료와 기존 농축기 이용료를 함께 납부해야 배송일을 잡을 수 있다고 했다. 채영은 가격을 적다가 멈췄다. 어제 받은 계산표에는 같은 기간의 두 이용료가 이미 들어 있었다. 장비를 바꿔 받은 기간이 겹친 것 같았다.
“두 기기를 동시에 빌린 날이 있었나요?” 채영이 물었다.
상담원은 계약상 대체 기기가 집에 있던 날부터 청구된다고 설명했다. 기존 기기는 회수 요청일까지 청구된다고 했다. 그러나 회수 요청이 언제 접수됐는지는 바로 찾지 못했다. 채영은 지금 납부하면 실제로 사용하지 않은 며칠을 인정하는 셈이 될까 두려웠다. 배송은 더 늦출 수 없었다.
영숙은 전화 통화를 듣고 자기 때문에 돈이 새는 것 같다고 했다. 채영은 “엄마 잘못 아니야”라고 답했지만, 그 말만으로 지갑이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영숙은 업체가 가져간 기존 기기의 자리를 가리켰다. “그 사람 언제 왔는지 내가 알지.”
채영은 어머니가 보관한 작은 달력을 봤다. 기존 기기를 문밖으로 옮긴 날에 ‘박건, 계단에서 한 번 쉬고 내려감’이라고 적혀 있었다. 장비가 실제로 집을 떠난 날을 기억하는 메모였다. 접수증과 인계서의 날짜를 대조할 수 있었다. 채영은 어머니의 메모를 바로 청구 증거라고 부르지 않았다. 박건과 업체 기록을 함께 봐야 했다. 하지만 ‘모른다’고 적혀 있던 날짜 하나가 사람의 기억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 월요일 밤 한 시간의 임시 담당자가 결정됐다. 채영의 동료가 회의를 삼십 분 앞당겨 주었고 채영은 업무를 마치고 어머니 집에 올 수 있었다. 동료의 시간을 무상으로 빌리는 방식이 되지 않도록 채영은 다음 날 그가 맡은 전화회의 한 건을 대신 받기로 약속했다. 지수는 월요일 두 시간 지원이 실제 승인되기 전에는 이 조정을 확정표로 옮기지 말자고 했다.
채영은 잠깐 화가 났다. 또 ‘예정’이라니. 영숙은 딸의 표정을 보고 달력의 첫날을 가리켰다. “그날은 내가 너를 기다릴게. 그런데 사람이 안 오면 뭘 할지 따로 적자.”
그들은 승인 전 일주일을 두 줄로 만들었다. 예정대로 지원이 시작될 때와 늦어질 때. 늦어질 경우 채영이 모든 밤을 메우는 표는 아니었다. 하진의 연락 가능 시간, 지수가 확인한 임시 방문기관, 영숙이 혼자 있어도 괜찮다고 고른 짧은 시간, 그때 연락할 사람을 각각 놓았다. 어떤 기관도 승인 전 제공을 약속하지 않았다. 채영은 그 제한을 본 뒤에야 회사에 일주일 근무표를 보냈다.
표를 붙이자마자 첫 시험이 왔다. 임시 방문기관의 전화번호에 연결하니 낮 상담실로 넘어갔고 야간 연결 안내는 녹음된 다른 번호를 불렀다. 채영은 번호를 적다가 마지막 자리를 잘못 들었다. 영숙이 손전등 옆 사본과 비교해 숫자 하나를 고쳤다. “지난 정전 때 너 혼자 다 누르느라 손이 떨렸잖아.” 채영은 이번엔 어머니가 직접 확인한 번호를 다시 눌렀다. 당직자는 신청 전 긴급 상담은 가능하지만 돌봄 방문은 배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표의 ‘방문 가능’ 옆에 채영은 정확히 ‘상담만’이라고 적었다.
“그러면 밤에 사람이 꼭 필요하면?” 영숙이 물었다.
하진은 그때의 증상과 영숙의 현재 뜻에 따라 의료팀 또는 응급 연락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지수는 돌봄 담당이 현장에 없는 상황을 꾸며 채울 수 없다고 했다. 채영은 또 자신이 가야 한다고 말하려 했지만, 영숙이 먼저 손을 들었다. “내가 말할 수 있으면 내가 먼저 전화할게. 네가 못 받는 시간에는 다음 번호로.” 그건 딸을 떼어 놓으려는 선언이 아니었다. 자신의 손이 아직 전화기에 닿는다는 사실을 계획에 넣는 일이었다.
그날 밤 실제로 큰 위기는 없었다. 대신 잠들기 전 영숙이 물을 마시려다 현관 연락표가 그림 엽서에 가려진 것을 발견했다. 손녀 강아지를 떼기는 싫었다. 영숙은 엽서를 달력에 옮기고 연락표를 다시 보이는 곳에 놓았다. 채영은 그 모습을 보고 사진을 찍으려다 그만뒀다. 오늘 어머니가 해결한 일을 누군가에게 증명해야만 의미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영숙은 사진 대신 “강아지 다리가 몇 개인지 내일 손녀에게 물어볼 거야”라고 했다.
채영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동료의 업무 메시지를 확인했다. 회의시간 변경이 승인됐고 의뢰인에게도 알려졌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다음 주까지 같은 조정이 되는지는 모른다고 적혀 있었다. 채영은 ‘이번 주는 이대로’라고 답했다. 한 주를 버티는 표를 영원한 해법으로 속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숨을 쉬게 했다. 동료도 다음 주 일정은 다시 정하자고 했다.
해가 지자 영숙은 달력 가장자리에 손녀 엽서를 붙였다. 숫자 사이에 강아지 다리 여섯 개가 튀어나왔다. 정례는 퇴근 시각에 가방을 챙겼다. 영숙이 먼저 현관문을 열어 줬다. 채영은 뒤에서 어머니의 등과 정례의 시간을 함께 보았다. 이번에는 누구에게도 조금만 더 있어 달라고 하지 않았다.
밤의 마지막 칸에서 채영은 중복 청구가 의심되는 기기 이용료에 작은 물음표를 붙였다. 내일 박건과 태오, 업체 인계서를 맞춰 볼 일이었다. 일주일 표는 처음으로 쓸 수 있는 모양이 됐고, 그 표를 지키려면 돈의 날짜도 정확해야 했다. 영숙은 달력을 보며 “강아지는 지우지 마”라고 했다. 채영은 지우지 않았다. 그곳은 돌봄표이면서 여전히 영숙의 달력이었다.
채영은 연필을 달력 옆에 묶어 뒀다. 표가 바뀌어야 할 때마다 영숙이 직접 고칠 수 있도록. 영숙은 첫날의 ‘예정’ 글자를 한번 덧칠하고는 웃었다. “확정이 아니면 흐리게 써야지.”
영숙은 그 옆에 ‘목요일 무김치’도 적었다. 채영은 돌봄 사람이 없는 시간에 김치를 담그겠느냐고 물었다. 영숙은 “담근다고 안 했어. 남은 것 이웃에게 한 통 줄 거야”라고 했다. 지켜야 할 일정이 사람을 누르는 표가 되지 않도록, 영숙은 자신이 하고 싶은 아주 작은 일을 같은 크기의 글씨로 써 넣었다. 채영은 물음표와 김치 사이에 선을 긋지 않았다. 돈의 문제와 살아가는 일이 한 달력에 함께 있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