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주대로의 붉은 매듭
서른 개의 나무그릇
우석이 잠든 뒤 길상은 혼자 문밖으로 나갔다.
우석이 잠든 뒤 길상은 혼자 문밖으로 나갔다.
몸이 내보낸 결심은 아무 소리도 없었다. 범수가 톱을 닦고 있었고 복단은 약을 고르는 중이었다. 연화는 빚문서를 맡아 갈 사람과 봉투를 묶고 있었다. 길상은 그 셋 사이를 지나 수레 뒤에 매달아 둔 손도끼를 뺐다. 담장을 부수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는 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를 멈춘 것은 우석의 기침이었다. 헛간의 작은 창으로 그 소리가 나왔다. 길상은 도끼를 다시 걸었다. 형을 찾겠다면서 형이 살려 보낸 사람 곁을 비우는 일을 해도 되는지, 그제야 자신에게 물을 수 있었다.
“축대까지 다녀올게요.”
길상이 범수에게 말했다. 범수는 대답 대신 톱을 내려놓고 신발을 신었다. 둘이 함께 가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 다만 범수가 누구를 지키려 오는지 생각하면 목이 막혔다. 자기를 지키는 일 때문에 형에게 닿는 발이 느려진다는 억울함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축대의 농부 아들은 물골 끝을 걷고 있었다. 새로 쌓인 흙이 물에 쓸려 낮아졌고 논으로 물이 흐를 길이 좁아졌다. 그는 물골을 깊게 파려다 멈췄다. 위에서 흘러오는 물이 또 흐려지면 깊이 판 만큼 논 안으로 더 들일 터였다.
“창고 문 밖에서 버리는 게 있어요.”
아들이 말했다. 물골보다 높은 빈터에 작은 구덩이가 있었다. 부서진 그릇과 탄 숯을 쌓았다. 길상은 다섯째 배급자리라고 하는 곳을 물었으나 아들은 담장 안의 자리를 몰랐다. 대신 아침에 청소꾼이 그릇을 지고 나온다는 말을 했다.
범수는 길상을 물골 아래에 남겨 두려 했다. 길상은 반대했다. 자기 형이 남긴 물건이라며 앞서 걷기 시작했다. 범수는 손을 뻗지 않았다.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다른 사람의 발까지 가질 수는 없었다. 대신 뒤에서 물었다.
“가서 누구에게 뭐라고 할 건지 정했나?”
길상은 멈췄다. 생각한 것은 그릇을 가져오는 장면뿐이었다. 경비가 있으면 숨고 사람이 없으면 가져오겠다는 생각. 돌아오는 길과 그릇을 잃을 사람은 없었다. 그는 손수건을 만지다가 말했다.
“버리는 물건인지 묻겠습니다.”
두 사람이 빈터에 닿았을 때 청소꾼이 그릇을 던지고 있었다. 던지는 힘이 약해 몇 개는 구덩이 밖에 떨어졌다. 청소꾼은 허리 굽은 노인이었다. 그릇을 날랐다는 이유로 광산 안의 모든 일을 아는 사람으로 대할 수는 없었다. 범수가 짐을 내려놓는 일을 도왔다. 노인은 손을 털고 물을 찾았다.
길상은 물을 건넸다. 노인은 마시고 나서야 두 사람을 보았다.
“누가 보냈소?”
“아무도요. 버리는 그릇이면 하나 얻을 수 있습니까?”
“누구 밥그릇으로 쓰려고?”
길상이 말을 잃었다. 노인은 비어 있는 바가지처럼 웃었다. 그릇은 금이 가서 죽을 담아도 샌다고 했다. 하지만 금 가지 않은 것도 섞여 있었다. 바닥이 낡았다는 이유로 한꺼번에 새것으로 바꾸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노인이 입술을 다물었다. 너무 많이 말했는지 뒤돌아 담을 보았다. 길상은 다섯째 자리를 물으려던 말을 삼켰다. 형을 찾는 급한 마음이 다른 사람을 경비 앞으로 밀어낼 수 있었다. 그는 금 간 그릇을 하나 들고 어디서 샌 것이냐고 물었다.
“저건 셋째 막. 바닥이 검으니 알지.”
노인은 말하고서 혀를 찼다. 범수는 그릇을 다시 내려놓았다. 노인이 가져가도 된다고 한 것만 들기 위해 기다렸다. 길상은 바닥이 검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부엌 불 때문인지 은을 녹이던 곳 때문인지 그는 알지 못했다.
담장 쪽에서 문이 열렸다. 경비가 빈터로 다가왔다. 노인은 즉시 물바가지를 발 뒤에 숨겼다. 길상은 그 모습을 보며 몸이 뜨거워졌다. 자기가 건넨 물까지 죄가 된 듯했다.
“왜 이걸 뒤집고 있소?”
경비가 길상 손을 가리켰다.
“그릇 좀 얻으려 했습니다.”
“저 노인은 남의 것을 줄 권한이 없소.”
“버리라고 내보낸 게 아니오?”
범수가 물었다. 경비는 그릇을 발로 찼다. 구덩이에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길상은 그릇 하나가 깨지는 것을 보고 무심결에 주먹을 쥐었다. 형이 쓰던 것일 수도 있었다. 범수가 그 주먹을 보고도 손대지 않았다.
경비는 손을 내밀었다. 길상은 자기 손의 그릇을 돌려줬다. 경비가 웃으며 돌아서려는 순간 노인이 말했다.
“그 하나는 내 그릇이오. 내가 밥 먹던 거.”
경비가 고개를 돌렸다. 노인의 눈이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한 개라면 자신의 품삯에서 물겠다고 했다. 경비는 그릇을 길상 앞으로 던졌다. 땅에 떨어지기 전에 범수가 받았다. 노인은 담장 안으로 들어갔다. 걸음이 처음보다 더 굽어 있었다.
길상은 받자마자 바닥을 보려 했다. 범수가 그릇을 바로 세워 내밀었다.
“너 때문에 준 물건이지, 네 형이 보낸 물건이라는 말은 없었다.”
길상은 그 말을 듣고 움찔했다. 노인의 손에서 떨리던 바가지가 떠올랐다. 그릇을 자기 가슴 쪽으로 가져왔다. 밥을 먹던 사람의 주름진 손이 먼저 있는 물건이었다.
헛간으로 돌아온 우석은 그릇을 보고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인의 얼굴을 설명하자 눈을 감았다.
“여전히 밖으로 그릇을 내는구나.”
그는 길상이 들고 온 그릇이 다섯째 배급자리의 물건은 아니라고 했다. 바닥에는 줄 셋이 파였고 몸통에는 불에 그을린 자국이 있었다. 우석은 그것이 노인 개인 그릇인지도 알 수 없었다. 대신 같은 그릇을 뒤집어 밥을 나누던 밤을 기억했다.
“서른 개를 놓았소. 처음엔 안에 든 쌀이 얼마나 되는지만 봤지.”
그 서른이 지금 살아 있는 서른을 뜻하느냐고 길상이 묻지 않았다. 우석은 먼저 저녁 배급 때 자신이 놓은 그릇 수라고 말했다. 사람 없는 자리에도 그릇을 두라는 명이 있었다. 빠진 사람의 몫은 관리인이 가져갔다. 연화는 숫자 하나를 얻으면서도 그 숫자 아래 빈 몫이 있는 것을 보았다.
“상인 그릇은 앞에 놓고 짐꾼 것은 뒤에 놓았소. 열여덟과 열둘. 칠복은 뒤에서 죽을 퍼 날랐지.”
우석은 그릇 바닥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자신도 짐꾼 열둘 중 하나라고 말했다. 이름만 들으면 같은 이름을 다르게 적은 이도 있었다. 연화가 벽에서 가져온 짐꾼 명단의 이름들을 읽자 우석은 둘의 별명을 고쳤다. 마지막에는 칠복의 이름을 짚었다. 성은 끝내 모르겠다고 했다.
그릇 서른이 수레에서 함께 떠난 서른인지, 먼저 들어와 있던 사람을 섞어 부른 서른인지도 물어야 했다. 우석은 자기가 한양 객주에서 뒤따라 나갔던 날을 말했다. 소금 짐을 다른 문으로 내보냈고 길에서 행렬을 따라잡았다. 연화는 늦은 수레꾼 둘의 이름을 물었다. 우석은 그 둘을 다른 나루에서 본 적은 있으나 광산 안에서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객주 출발장과 광산 배급은 같은 장이 아니었다.
복단은 길상 손에 있던 그릇을 씻어 약받침으로 썼다. 씻을 때 검은 재가 떨어졌지만 줄 셋은 남았다. 우석은 바닥을 쓰다듬으려다 손을 뗐다. 길상은 그릇을 뒤집어 보는 대신 노인에게 줄 쌀을 작은 자루에 담았다. 약이 들어간 수레에서 밥값까지 빠지니 자기 몫의 보리떡을 줄여야 했다.
해 질 무렵 농부 아들이 빈터에 쌀을 가져다주었다. 노인을 붙잡아 말시키려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다. 돌아온 아들은 빈 자루 대신 얇은 나무조각을 들고 왔다. 노인이 썩은 그릇 바닥을 갈며 떼어 낸 조각이었다. 가져가고 싶으면 가져가라는 말만 덧붙였다고 했다.
우석이 그것을 보자 몸을 일으켰다. 나무조각에는 세모 다섯 개가 서로 다른 높이로 패여 있었다. 뒤쪽에는 짧은 칼자국들이 모였다. 글이 아니어서 길상은 알아볼 수 없었다.
“이건 자리표요.”
우석은 앞면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다섯 배급조에 놓인 그릇 묶음의 표였다. 다섯째는 물골 가까운 조였고, 그릇을 세척하려 밖으로 나르기 쉬웠다. 칼자국은 각 그릇 묶음에 들어갈 몫을 셀 때 낸 흔적이라고 했다. 누가 새겼는지는 모른다고 덧붙였다.
길상이 손수건을 펼쳤다. 나무조각과 세모의 높이가 닮았다. 그는 이제 일치를 곧장 형의 손이라 부르지 않았다. 다만 형이 나누려던 밥의 자리를 자기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밤까지 기다려야 하는지도 알았다.
밤이 왔다. 연화와 범수, 길상은 축대 위에 서고 복단은 우석 곁에 남았다. 아래에서 들리는 쇠그릇 소리는 처음보다 멀게 느껴졌다. 귀를 열수록 다른 소리도 들어왔다. 귀뚜라미, 물골의 작은 폭포, 부러진 수레바퀴를 끌고 가는 소리.
쇠그릇이 세 번 울렸다. 잠시 뒤 짧은 소리 둘, 길게 끌리는 소리 하나. 길상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나무조각 위에 그릇이 여러 개 있던 자리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밖의 소리만으로 병자 수를 세울 수는 없었다. 연화가 그의 손을 눌러 무언가를 적게 하지 않자 길상은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담장 밑 작은 구멍에서 물건 하나가 나왔다. 어둠 속에서도 밝았다. 흰 천이었다. 누군가 물골 옆에 걸린 가지에 그것을 길게 펴고 손을 놓았다. 천이 물에 닿을 듯 흔들렸다. 뒤에서 다른 손이 그 천을 잡아 끌었다.
길상이 달려 내려갔다. 범수가 뒤따랐다. 두 사람이 물골에 닿았을 때 안의 사람은 이미 사라졌다. 흰 천은 가지에서 찢겨 반쪽만 남았다. 길상은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닿기 전에 작은 돌이 물에 떨어졌다. 안에서 누군가 경고하듯 기침을 했다.
범수는 길상을 둑 뒤로 끌었다. 경비의 발소리가 물골 위를 지나갔다. 길상은 젖은 풀에 무릎을 대고 숨을 참았다. 발소리가 멀어진 뒤 가지의 천을 풀었다. 아무 글씨도 없었다. 한쪽 모서리에 검은 실 세 땀이 있었다.
“형이 묶었어요.”
길상은 말하고서 고개를 저었다.
“집에서 형 손수건을 내가 이렇게 꿰맸어요. 이건 그 손수건이 아니지만 땀의 간격은 같아요.”
혼자 만든 뜻일까 두려웠다. 범수는 천을 빼앗지 않았다. 따뜻한 손바닥으로 길상의 젖은 손을 감쌌다. 길상은 그제야 떨리는 무릎을 보았다.
헛간에서 우석이 천을 보고 입을 열었다. 길만수가 빨랫감에 집안 표시를 따라 꿰맨 적이 있다고 했다. 밖에서 자기 동생이 알아볼 만한 것이 그것뿐이라고 말했단다. 직접 본 손의 움직임과 들은 말이 길상의 오래된 기억에 닿았다.
“돌아오면 바느질을 새로 가르칠 겁니다.”
길상은 천을 말릴 자리를 찾으며 말했다.
“형은 늘 간격을 엉망으로 놓았거든요.”
그는 한 번 웃었다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기다리는 동안 처음으로 혼자 우는 것 같지 않았다. 창고에서 나온 것은 아직 사람 한 명의 몸도 아니었다. 그러나 길상은 그날 밤 손수건을 가슴에만 넣고 자지 않았다. 작은 천을 문 옆에 펴 놓았다. 누군가 그것을 보며 자신에게 돌아오는 길을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