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미식 로맨틱 코미디 43화

서리 지난 복숭아밭

열흘을 빌리는 부엌

냉장고 문을 열면 첫 냄새는 과일이 아니었다. 고무 패킹의 찬 냄새가 먼저 오고, 조금 뒤 지난해 수확해 냉동 보관한 복숭아 과육의 향이 따라왔다. 류미정은 해동 예정 상자에 붙인 날짜를 확인한 뒤 문을 닫았다. 오늘의 원물은 이미 작업 계획 안에 있었다. 내일 것까지 꺼내 놓으면 빨리 만들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보관과 작업시간은 빨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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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문을 열면 첫 냄새는 과일이 아니었다. 고무 패킹의 찬 냄새가 먼저 오고, 조금 뒤 지난해 수확해 냉동 보관한 복숭아 과육의 향이 따라왔다. 류미정은 해동 예정 상자에 붙인 날짜를 확인한 뒤 문을 닫았다. 오늘의 원물은 이미 작업 계획 안에 있었다. 내일 것까지 꺼내 놓으면 빨리 만들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보관과 작업시간은 빨라지지 않는다.

윤보리는 작업대 옆에서 예약금 봉투를 세고 있었다. 그 돈은 이미 약속한 물건을 만들어 줄 책임과 함께 들어왔다. 최옥순이 물었다. “이걸로 전기 내면 되지?”

“낼 수는 있어요. 그러면 예약 제품 원물대와 포장재를 살 돈이 다시 비어요.”

옥순은 봉투를 내려놨다. 열흘 뒤 보험금 지급예정일까지 부엌을 쉬게 할 수도 없었다. 다섯 농가의 생산교대가 이미 맞춰졌고, 남은 예약 고객에게도 날짜를 알렸다. 주방을 계속 켜는 동안 전기료와 포장재 값을 먼저 내야 했다.

미정은 오늘 만들 수 있는 수량부터 말했다. 지난번 한정 시험판매 예순 묶음에서 취소 두 건을 환불하고 쉰여덟 묶음만 내보냈다. 다른 배치에서는 열두 병을 폐기했고, 구분된 마흔여덟 병만 출고했다. 숫자가 아프지만 그 덕분에 이번에는 ‘대충 예순’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해동 과육의 상태, 세척 대기, 사람 손을 놓고 실제 만들 수 있는 수량을 셌다.

“예약을 더 받으면 현금은 들어와.” 옥순이 말했다.

“만들 수 있는 날보다 빠른 예약이면 나중에 환불이 나가요.” 미정이 대답했다.

보리는 칠판에 이미 받은 예약, 판매 완료 현금, 지금 쓸 수 있는 재고를 서로 다른 색으로 적었다. 열흘 뒤 들어올 예정인 각 농가의 보험금은 칠판 바깥에 썼다. 주방의 빚을 각 농가 보상금으로 몰래 메울 수는 없었다. 다섯 집의 계좌에 같은 날 같은 액수가 들어오지도 않는다.

부족액은 생각보다 작았다. 옥순이 처음 말한 전체 고지서와 포장재 선구매액을 다 빌릴 필요가 없었다. 다음 생산분 포장재만 주문하고, 판매 현금을 쓸 날짜를 맞추자 열흘 동안 비는 돈만 남았다. 그래도 부엌의 현금으로는 못 채우는 숫자였다.

“내가 빌려줄게.” 박 여사가 말했다.

“그 돈도 아직 안 들어왔잖아요.” 보리가 답했다.

박 여사는 보험금 이야기가 아니라고 했다. 집에 남겨 둔 비상금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비상금을 조합 운영에 넣으면 어느 날 돌려받을지, 다른 농가보다 말이 커지는지 정해야 했다. 박 여사는 “빌려준다고 표 하나 더 받겠다는 건 아니야”라고 먼저 말했다. 그 말이 고마웠지만 보리는 그 자리에 바로 쓰지 않았다.

이씨는 다른 생각이었다. 열흘짜리 단기차입을 조합 명의로 받고, 필요한 만큼만 쓰자는 것이다. 이자가 들었다. 박 여사의 비상금은 이자가 없지만, 그 집에 갑작스러운 일이 생기면 조합이 돌려줄 돈이 없을 수 있었다. 두 선택 모두 대가가 있었다.

옥순은 은행 창구에서 받을 수 있는 조건을 확인하러 갔다. 보리는 그녀와 함께 가지 않았다. 대신 미정과 주방에서 오늘 출고할 병을 들여다봤다. 한 병의 과육조각이 뚜껑에 닿을 만큼 컸다. 미정은 그 병을 판매분에서 빼고 중량과 밀봉을 다시 봤다. 돈이 부족하다고 눈앞의 검수를 빠뜨리면 차입이 아니라 다음 환불을 사는 셈이다.

그때 장터 주문 전화가 왔다. 전날 시식하고 돌아간 손님이 이번에는 직장 동료와 나눌 병을 묻는 전화였다. 보리는 반가워 수량부터 말하려다 미정의 눈을 봤다. 앞서 알레르기 표시를 놓쳤던 크럼블 조합을 함께 원하는지 확인했다. 손님은 동료 한 사람이 우유를 피한다고 했다. 미정은 크럼블 소포장을 묶어 보내지 않고 콩포트 단품의 표시와 보관조건을 천천히 읽어 줬다.

“그럼 그분 것은 따로 포장해 주세요.” 손님이 말했다.

“같은 주방에서 만드는 상품이라 원재료와 작업환경 표기를 확인하고 선택하셔야 합니다.”

손님은 잠시 통화를 멈춰 동료에게 물었다. 돌아온 답은 그 동료 몫은 주문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총 주문은 처음 말한 수량보다 줄었다. 보리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팔 수 있었는데.”

“모르고 먹게 할 수는 없잖아요.” 미정이 말했다.

“그건 알아요. 숫자를 줄여 적는 게 아직 아파서요.”

미정은 줄어든 주문수량을 또박또박 적었다. 지난번 취소 두 건을 환불했을 때도 똑같이 아팠다. 그러고도 이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는 사실이 보리에게는 작은 보상이었다. 손님은 자기를 속이지 않은 가게의 병을 다시 사려고 했다. 미정은 “다음에는 한 명도 빠지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걸 시험해 봅시다. 검증하고요”라고 했다. 당장 다른 상품을 약속하지는 않았다.

첫 출고 상자의 뚜껑을 닫을 때 이씨가 원물표시를 다시 읽었다. 그의 집 이름은 외부 표시에서 코드였다. 그는 코드가 자기 것을 숨기는 것처럼 느낄 때도 있었지만, 공개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스스로 했다는 것도 기억했다. 보리는 코드 옆에 배치번호를 붙였다. 손님에게 필요한 표시와 농가의 공개 선택을 동시에 지키려면 둘 다 있어야 했다.

해진이 정오에 들렀다. 그는 보리에게 과일을 사러 왔다고 했다. “보험 얘기하러 오면 입구에서 돌아갈 것 같아서요.”

“사시려면 줄 서세요.”

“오늘은 손님이 저뿐인데요.”

“그럼 첫 손님.”

미정이 진열대의 냉장 콩포트와 크럼블 소포장을 가리켰다. 우유 함유 표시는 눈에 띄는 글씨로 붙어 있었다. 해진은 둘 중 하나를 고르지 못해 보리에게 맛을 물었다. 보리는 “콩포트는 큰 조각이 먼저 오고, 크럼블 조합은 바삭한 걸 곁들일 때 향이 늦게 와요”라고 했다.

“둘 다 사면 편하겠네요.”

“비싸요.”

“그래서 한 병만.”

해진은 콩포트를 골랐다. 보리는 그가 현금을 내는 모습을 보고 순간 마음이 불편했다. 도와주려고 사는 건지, 정말 먹고 싶은 건지 묻고 싶었다. 해진이 뚜껑을 잡고 “이씨네 향이 어제보다 먼저 날까요?”라고 하자 보리는 웃었다. 그는 맛을 기억하고 있었다. 한 병의 값이 열흘을 구하지는 못해도, 오늘 팔린 한 병은 꾸며 낸 매출이 아니었다.

오후에 옥순이 돌아왔다. 은행의 단기차입 조건은 조합의 최근 매출과 상환일을 기준으로 다시 확인해야 했다. 그는 받을 수 있을 것처럼 말하지 않고 서류를 보여 줬다. 보리는 필요한 현금 공백과 가능한 상환일을 다시 계산했다. 보험금 지급예정일 당일에 무조건 갚겠다고 적지 않았다. 지급이 밀릴 수 있고, 보험금은 농가 개인의 돈이다. 다음 주 판매 현금 중 확정된 부분과 조합 계좌 잔액을 우선 상환 근거로 놓았다.

이씨가 차입 금액 앞에 선을 그었다. “이만큼이면 포장재를 하루만 늦게 사도 줄어들지?”

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 하루가 다음 생산 전날이에요. 포장재가 안 오면 해동한 원물을 다시 얼릴 수 없어요.”

“그럼 포장 주문을 반으로 나눌까?”

“배송비가 두 번 들죠.”

둘은 계산기를 주고받았다. 옥순은 처음에는 하루를 아끼려고 더 비싼 포장재를 사려 했다. 보리가 공급업체에 전화해 부분 납품이 가능한지 물었다. 업체는 같은 주문으로 두 번에 나눠 보낼 수 있지만 첫 배송분의 날짜는 오늘 확정해야 한다고 했다. 이씨가 생산표를 보고 필요한 날짜를 불렀다. 두 번째 배송분은 판매 속도를 보고 확정하되, 첫 번째 물량은 실제로 쓰는 수만 잡았다. 부족액은 다시 조금 줄었다.

“이렇게 자꾸 줄이면 은행에서 너무 작아서 못 빌려줄 수도 있어.” 옥순이 말했다.

“그럼 그 조건을 듣고 다른 방법을 찾죠. 우리한테 필요 없는 돈까지 빌릴 이유는 없어요.”

옥순은 속이 타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은행 문을 한 번 더 두드리는 것과 박 여사의 비상금을 즉시 받아 쓰는 것 사이에 이제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있었다. 그는 박 여사를 돌아봤다. “아까 제안한 거, 고맙소. 오늘은 아직 받지 않을게.” 박 여사는 “내가 언제 급하게 주랬어?” 하며 말끝을 올렸다.

“그러면 이자 며칠 더 내야 할 수도 있잖아.” 옥순이 말했다.

“그래도 없는 돈을 이미 들어온 것처럼 적는 것보단 적게 위험해요.”

다섯 농가는 필요한 부족액과 한도, 상환 재원을 보았다. 박 여사는 비상금 제안을 거두지 않았지만, 조합이 단기차입을 우선 알아보고 부족할 때 다시 의논하자고 했다. 보리는 이자가 붙는 선택을 무조건 더 나쁜 선택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박 여사의 집 비상금을 조합 빚과 섞지 않는 값도 있었다.

결정이 끝난 뒤 미정이 갓 데운 크럼블을 작은 접시에 나눴다. 해진은 이미 산 콩포트 뚜껑을 열었다. 보리가 한 숟가락 얻어 먹으려 하자 “손님 물건입니다”라고 했다. 오전에 해진이 샀을 때 자신이 했던 말이었다. 보리가 손을 빼자 해진이 병을 내밀었다.

“손님이 같이 먹자고 하면요?”

“그럼 냉장보관 시간을 먼저 확인해야죠.”

둘이 장난치는 사이 옥순이 창구에서 받아 온 서류를 다시 접었다. 어깨가 완전히 풀리진 않았다. 그래도 오전에 필요하다고 생각한 돈보다 적은 액수를 빌리는 방향이 보였다. 작업대에는 다음 배치의 원물만 놓였고, 냉장고에는 그다음 배치가 아직 봉인되어 있었다. 열흘을 빌린다는 말은 열흘치 미래를 전부 당겨 쓰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보리는 해진의 병에서 큰 조각을 하나 얻어 먹었다. 박 여사가 “내 방식”이라고 말하기 전에, 이씨가 “향은 우리 것”이라고 받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