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료·완화의료 휴먼극 42화

열세 번째 야간 왕진

세 시간의 주인

백지수는 영숙의 집에 와서 빈칸부터 보지 않았다. 냉장고에 붙은 한 장 계획을 영숙이 직접 읽을 수 있는지 물었다. 영숙은 안경을 쓰고 첫 줄을 읽었다. 현재 말할 수 있을 때 직접 선택하는 사람. 다음 줄에서 숨을 고르자 지수는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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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수는 영숙의 집에 와서 빈칸부터 보지 않았다. 냉장고에 붙은 한 장 계획을 영숙이 직접 읽을 수 있는지 물었다. 영숙은 안경을 쓰고 첫 줄을 읽었다. 현재 말할 수 있을 때 직접 선택하는 사람. 다음 줄에서 숨을 고르자 지수는 기다렸다.

“어제 채영이가 내 밤을 세 시간 비었다고 적었어.” 영숙이 말했다. “그 시간에는 내가 여기 있는데.”

“맞아요. 혼자 계시는 시간과, 도움이 필요할 때 올 사람이 정해지지 않은 시간을 따로 표시해 보겠습니다.”

채영은 사무실에서 곧장 와 코트도 벗지 못했다. 동료에게 오전 회의는 맡겠다고 답했다. 월요일 저녁 일정은 조정해야 했고 그 대가로 다음 날 새벽 서면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지수 앞에서 그 말을 하려니 어머니의 돌봄표가 자신의 노동표를 밀어낸 것처럼 느껴졌다. 영숙은 딸이 코트 단추를 풀 때까지 아무 질문도 하지 않았다.

지수는 지원 서비스 신청서를 펼쳤다. 정례가 유급으로 맡는 시간과 공공 지원이 가능한 시간이 겹쳐 있었다. 같은 시간에 두 사람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한 사람이 한 일을 두 번 청구할 수는 없었다. 채영은 신청서의 겹친 부분을 펜으로 그었다.

“그럼 이 세 시간은 남네요.”

“신청 가능한 시간은 있어요. 실제 배정은 승인과 인력 상황을 봐야 합니다.”

영숙이 물었다. “누가 오는데?”

“오늘 이름을 정할 수는 없어요. 담당 후보를 확인하겠습니다.”

영숙은 신청서 위의 빈 이름칸을 보았다. 낯선 사람이 밤에 집에 들어온다는 뜻이었다. 채영은 돈을 아끼려고 어머니의 두려움을 작은 글씨로 밀어 넣고 싶지 않았다. 지수는 영숙이 동의하는 지원의 범위를 따로 적었다. 늦은 저녁에 연락을 받거나 필요하면 방문을 연결하는 일, 산소기기 경보가 나면 정해진 연락 순서를 따르는 일. 의료 판단을 돌봄 담당자 혼자 하게 하지 않았다.

“내 방 서랍은 열지 말았으면 해.” 영숙이 말했다.

“필요한 물건은 따로 놓겠습니다.” 지수가 답했다.

채영은 비상 서류가 서랍에 있다고 했다. 영숙은 “그럼 필요한 것만 현관 가방에 넣자”고 했다. 지난번 두꺼운 기록을 다 보내지 않은 선택이 이번에는 낯선 사람이 집에 올 때의 경계가 됐다.

저녁에 정례가 퇴근하려 하자 채영은 자신도 모르게 “오늘만 조금 더”라고 할 뻔했다. 바로 옆에서 영숙이 “정례 씨 버스 끊기기 전에 가요”라고 했다. 정례는 이미 주방을 정리하고 연락할 번호를 확인했다. 시간을 넘기면 버스 대신 비싼 차를 타야 했다. 채영은 입을 다물고 정례의 실제 퇴근 시각을 적었다. 자신의 빈칸을 다른 사람의 무급 시간으로 메우지 않는 연습이었다.

정례가 나간 뒤 영숙은 혼자 귤을 깠다. 채영은 옆에서 지수와 전화했다. 지원 제도의 신청자격은 맞았지만 배정은 빨라도 다음 주였다. 지수는 기관의 서류 조정을 맡겠다고 했다. 채영에게 가족관계와 소득자료 전체를 메신저로 보내지 말고, 필요한 항목을 안전한 제출 창에 넣게 했다. 채영은 법률 서류를 다루는 사람이면서도 어머니 자료를 다급하게 한꺼번에 보내려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오늘 밤은 누가 있죠?” 지수가 물었다.

채영은 오늘은 자신이 열한 시까지 있다가 집으로 간다고 했다. 그 뒤에는 영숙이 혼자 있기를 원했고, 응급 연락은 계획대로 열려 있었다. 빈 세 시간은 주로 월요일과 목요일 저녁에 생겼다. 오늘 밤을 빈칸인 듯 말하면 영숙의 선택이 지워졌다.

통화를 끊자 영숙이 물었다. “월요일에 새 사람이 오면 내가 싫다고 말할 수 있어?”

“그럴 수 있어. 다만 그때 다른 방법도 같이 찾아야 해.”

“그건 같이 찾자.”

두 사람은 잠시 마주 앉아 귤을 나눠 먹었다. 영숙은 채영에게 사무실 회의가 어떤 일인지 처음으로 자세히 물었다. 채영은 의뢰인이 누가 자료를 끝까지 읽을지 알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영숙은 “그 사람도 네 시간을 세고 있네”라고 했다. 채영은 웃다가 눈을 감았다. 병실과 사무실 양쪽에서 자신이 필요하다는 말이 때로는 사랑보다 무거웠다.

밤 아홉 시, 현관 손전등 옆의 연락표가 떨어졌다. 테이프가 정전 뒤 습기에 젖어 약해진 것이다. 영숙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먼저 일어섰다. 채영은 반사적으로 팔을 잡았다. 영숙은 “내가 해 볼게”라고 했다. 두 사람은 현관까지 천천히 걸었다. 영숙은 숨을 고른 뒤 연락표를 주워 식탁에 올렸다. 채영은 손전등을 켜서 글씨가 보이는 높이를 확인했다. 필요하면 부를 수 있는 길을 영숙 자신의 손이 닿는 곳에 붙였다.

“새 사람이 오면 이걸 먼저 보여 주면 되겠다.” 영숙이 말했다.

“엄마가 원하면.”

영숙은 그 조건을 좋아했다. 누가 자기 집에 들어와도 환자가 아니라 집주인으로 말할 수 있는 첫 문장이었다. 채영은 현관 가방에 최신 사본 한 장만 있는지 확인했다. 낡은 메모는 다른 가족기록에 남아 있었다.

다음 날 오전 지수가 기관에서 전화를 받았다. 한 담당 후보가 월요일 저녁 두 시간은 가능하다고 했다. 세 시간 전부는 아니었다. 지수는 채영에게 먼저 ‘해결’이라고 보내지 않았다. 영숙에게 방문 인사를 받을지, 남는 한 시간을 어떻게 볼지 물어야 했다.

기관 담당자는 신청서의 시간을 보다가 정례가 일하는 마지막 반 시간과 겹친다고 말했다. 컴퓨터에서는 그 겹친 칸을 지우기만 하면 서류가 넘어갔다. 하지만 정례가 실제로 그때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면 지운 뒤의 반 시간이 빈다. 지수는 정례의 동의를 받고 근무기록에서 퇴근 시각과 인계 내용을 확인했다. 정례는 그 반 시간에 약 봉투를 정리하고 영숙이 저녁을 먹었는지 살핀다고 했다. 지원 담당이 같은 일을 다시 청구할 이유는 없지만, 인계를 하려면 둘이 잠깐 함께 있어야 했다.

“그러면 인계 십 분은 누구 시간이에요?” 채영이 물었다.

지수도 즉답하지 못했다. 기관은 신규 담당의 시작 전 교육시간으로 처리할 수 있는지 확인했고, 정례의 마지막 근무 십 분은 기존 계약대로 지급하기로 했다. 같은 일을 두 번 한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이 같은 정보 앞에 서는 시간이었다. 정례는 “말로만 인계하면 결국 제가 퇴근길에 전화받아요”라고 했다. 영숙은 현관에서 두 사람이 실제로 만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다. 지수는 그 뜻도 신청 기록에 남겼다.

서류의 겹친 칸 하나를 고치는 동안 채영의 업무 전화가 두 번 울렸다. 그녀는 의뢰인에게 돌아갈 시간을 알려 주고 끊었다. 처음에는 돌봄 쪽이 중요한 일이니 사무실이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뢰인의 회의도 실제 시한이 있었다. 지수는 필요한 서명을 오늘 다 받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다. 어느 서류가 영숙의 것이고, 어느 확인을 기관이 대신 해야 하는지 나눠 보냈다. 채영은 처음으로 신청서 일부를 남의 손에 맡기고 의뢰인에게 다시 전화했다.

채영은 사무실 복도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 “한 시간은 제가 일 끝나고 갈 수 있어요”라고 했다가 달력을 보았다. 그날은 의뢰인 면담이 늦게 끝날 수 있었다. 지수는 확정된 시간과 가능성만 있는 시간을 다른 칸에 적었다. 채영은 자기 가능성을 확정 칸에 넣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오후에 영숙은 담당 후보의 이름을 듣고 첫 만남을 낮에 짧게 하고 싶다고 했다. 밤에 낯선 얼굴을 처음 보는 것보다 나았다. 기관은 조정에 동의했다. 아직 실제 배정이나 승인 확정은 아니었지만, 영숙의 뜻이 신청서보다 먼저 전달됐다.

영숙은 낮 만남에서 무엇을 묻고 싶은지 종이에 적었다. ‘집에 들어오면 먼저 신발을 어디에 둘지’, ‘내가 숨을 고를 때 말없이 기다릴 수 있는지’, ‘연락표를 어디서 보는지’. 채영은 자격과 경력을 먼저 확인해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영숙은 그것도 지수가 확인할 일이라며 자기 질문은 자기가 하겠다고 했다. 낯선 사람이 방을 둘러보고 필요한 물건을 찾는 동안 자신이 어떻게 느낄지 미리 상상하는 것은 영숙의 몫이었다.

그런데 후보가 약속한 낮 시각보다 사십 분 늦을 수 있다는 연락이 왔다. 앞선 가정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긴 탓이었다. 영숙은 기다리기로 하지 않고 시간 변경을 요청했다. “첫 만남부터 나한테 기다리라고만 하면, 밤에는 내가 뭐라고 할까?” 채영은 후보가 잘못했다고 단정하지 않았다. 다른 집의 사정도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정한 시간을 존중받아야 한다는 데는 동의했다. 지수는 그날 오후를 다시 잡고, 늦은 이유를 영숙에게 필요한 범위만 알렸다.

후보는 방문해 현관에서 이름을 말했다. 영숙은 들어오라고 한 뒤 소파가 아니라 식탁 의자를 가리켰다. 십오 분 동안 서로 좋아하는 날씨나 가족사를 묻지 않았다. 영숙이 연락표 위치를 보여 주고, 후보는 자신이 밤에 할 수 있는 일과 의료팀에 연락해야 하는 일을 구분했다. 영숙은 답을 다 듣고도 바로 ‘괜찮다’고 하지 않았다. “한 번 더 생각할게요.” 후보는 그 말이 거절로 들리지 않게 기다렸다.

채영은 후보가 나간 뒤 어머니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물었다. 영숙은 “내가 어려운 걸 묻는데 내 얼굴을 보고 대답하더라”라고 했다.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다만 시간이 두 시간뿐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좋아 보이는 사람을 만났다는 이유로 남은 한 시간을 덮을 수는 없었다.

채영은 저녁에 어머니에게 그 소식을 전했다. 영숙은 “두 시간이면 두 시간이지”라고 했다. “남은 한 시간도 누군가 억지로 채우지 말고 보자.” 채영은 첫날의 표를 다시 폈다. 밤 세 시간에 담당 후보 두 시간이 생겼고, 나머지는 여전히 빈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빈칸이 누군가 모르게 떠맡은 시간이 아니었다. 기관과 가족이 같은 시계를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