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료·완화의료 휴먼극 41화

열세 번째 야간 왕진

서랍 속 휴직원

채영의 책상 서랍에는 무급휴직원이 접혀 있었다. 정전 다음 날 어머니 집에서 돌아와 넣은 종이였다. 작성란은 거의 비어 있었는데도 꺼내 볼 때마다 이미 제출한 문서처럼 무거웠다. 사무실 동료는 지난번 채영이 넘긴 의뢰인 자료를 돌려주며 새 회의의 담당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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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영의 책상 서랍에는 무급휴직원이 접혀 있었다. 정전 다음 날 어머니 집에서 돌아와 넣은 종이였다. 작성란은 거의 비어 있었는데도 꺼내 볼 때마다 이미 제출한 문서처럼 무거웠다. 사무실 동료는 지난번 채영이 넘긴 의뢰인 자료를 돌려주며 새 회의의 담당을 물었다.

“이번에는 제가 맡을 수 있어요.” 채영이 말했다.

“그럼 월요일 오전에 오시겠다고 말할까요?”

채영은 달력을 폈다. 그 시간에 어머니의 낮 방문이 잡혀 있었다. 하진에게 시간을 옮겨 달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정례가 조금 더 일찍 와 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각각 다른 사람의 시간을 쓰는 일인데, 종이 위에서는 연필 한 번으로 옮길 수 있었다.

“아직 답하지 마세요. 오늘 저녁까지 확인할게요.”

동료는 알겠다고 했지만 회의실은 오래 비워 둘 수 없었다. 채영은 그 손실도 자기 몫이라고 생각했다. 기다려 주는 사람이 무한히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다.

점심 전에 인사담당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급휴직을 신청하면 어느 날짜부터 적용되는지, 복귀 시 사건 배정은 어떻게 되는지 안내해 주겠다는 전화였다. 채영이 지난주 질문만 남겼는데 담당자는 신청을 마음먹은 줄 알았다.

“아직 내지 않았습니다.” 채영이 말했다.

“네. 그러면 예상 시작일을 알려 주시면 계산표만 보내겠습니다.”

예상 시작일도 적기 어려웠다. 어머니는 오늘 숨을 고르고 국을 먹었다. 그렇다고 내일의 밤을 보장받은 것은 아니었다. 채영은 계산표만 받아 보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자 서랍의 종이를 꺼내 책상 위에 놓았다. 무급이라는 단어 아래에는 월세와 카드값, 어머니 집 장비 배송비가 일렬로 떠올랐다.

옆자리 동료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쉬시는 게 맞을 수도 있어요.”

채영은 그 말을 나쁘게 듣지 않으려 했다. 동료는 지난번 의뢰인의 급한 준비를 대신 맡았다. 자신이 집에서 어머니의 숨소리를 듣고 있을 때 동료는 밤늦게 서면을 고쳤다. 하지만 ‘쉬라’는 말은 누군가가 그 시간을 대신 맡을 수 있다는 설명 없이 들리면 텅 비었다.

“나도 모르겠어요. 어떤 시간을 쉬어야 하는지부터요.”

그때 의뢰인에게서 직접 전화가 왔다. 다음 회의에서 자신의 사건을 채영이 계속 설명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채영은 어머니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지금 맡을 수 있는 시간과 못 맡을 시간을 정확히 말해야 했다. 의뢰인은 지난번 채영이 빠진 자리에 동료가 왔을 때, 처음부터 자기 사정을 다시 말해야 하는 줄 알고 밤새 메모를 썼다고 했다. 동료가 이미 기록을 읽고 왔다는 말을 듣고서야 종이를 접었다고.

“제가 다시 오면 더 편하실까요?” 채영이 물었다.

“편하다는 것보다, 누가 끝까지 읽을지 알고 싶어요.”

그 말이 채영의 귀에 남았다. 어머니도 매번 새로운 사람이 자기 선택을 처음부터 묻는 일을 피하고 싶어 했다. 그렇다고 의뢰인에게 어머니의 빈 시간을 설명하며 이해를 구할 권리는 없었다. 채영은 오늘 저녁까지 담당을 확정하고, 자신이 못 맡으면 동료와 함께 자료를 넘기는 시간을 만들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자 동료가 파일을 내밀었다. “제가 계속 맡아도 돼요. 그런데 그분이 왜 지난번에 불안했는지 이제 알겠네요.” 채영은 고맙다고만 말하지 않았다. 자료를 두 사람이 함께 읽을 시간을 근무표에 넣었다. 동료의 수고가 자신의 결손을 보이지 않게 메우는 친절로만 남지 않도록 하려는 선택이었다. 자신이 남아 맡든 넘기든 그 시간은 필요했다.

그때 어머니가 전화를 했다. 냉장고 사본 옆에 붙여 둔 연락번호가 어제보다 잘 보인다는 말을 하려고 건 전화였다. 채영은 첫마디로 숨은 괜찮으냐고 물었다. 영숙이 “너는 전화 받을 때마다 내 숨부터 세니?”라고 했다. 채영은 미안하다고 했다. 영숙은 오늘 김정례가 제시간에 와서 방 창문을 조금 열어 줬고, 자신은 귤을 먹고 있다고 했다.

“일하고 있으면 끊어.”

“엄마가 먼저 전화했잖아.”

“내가 오늘 내 전화로 먼저 끊을 수도 있지.”

통화가 끝난 뒤 채영은 휴직원을 다시 서랍에 넣지 않았다. 하진에게 어머니 집에서 실제로 누가 몇 시에 있는지 확인하고 싶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하진은 방문간호 시간과 응급 연락의 범위는 설명할 수 있지만 가족의 돌봄 시간을 대신 약속할 수 없다고 답했다. 채영은 그 문장을 받아들여야 했다. 팀이 친절하다고 밤의 모든 빈칸을 맡길 수는 없었다.

퇴근 무렵 하진과 백지수가 사무실 근처에서 채영을 만났다. 영숙이 동의한 범위에서만 일정을 함께 볼 수 있었다. 하진은 냉장고 한 장 계획과 진료 선택표를 다시 꺼내지 않았다. 오늘은 사람의 시간표가 문제였다. 채영은 어머니 집 현관에서 자신이 머무른 시각, 정례가 실제로 일한 시각, 낮 왕진팀이 있었던 시각을 적었다.

“저녁 여덟 시부터 열한 시까지 제가 거의 매일 있습니다.” 채영이 말했다.

“거의라는 말이 어느 날 빠집니까?” 지수가 물었다.

“지난 목요일엔 의뢰인 전화 때문에 열 시에 왔고, 토요일엔 집에서 잠들었어요.”

표에 두 개의 빈칸이 생겼다. 그동안 영숙은 혼자였지만 무조건 위험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영숙이 혼자 있기를 원한 시간도 있었다. 다만 누군가 필요할 때 바로 연락할 수 있는 사람과 실제 곁에 있는 사람을 구별해야 했다.

채영은 휴대전화를 열어 자신이 받은 업무 전화를 찾아봤다. 어머니를 돌본 시간을 증명하려고 사생활을 다 내놓는 기분이 들었다. 지수는 통화목록 전체는 필요 없다고 했다. 실제 돌봄이 겹치거나 비는 구간만 서로 기억을 맞추면 됐다. 채영은 화면을 덮었다. 지난번 응급요약 한 장만 공유하자고 정했을 때와 같은 마음이 돌아왔다. 필요한 자료의 범위는 작은 질문마다 다시 정해야 했다.

하진은 채영이 어머니 집에 없는 날 저녁 세 시간의 빈칸을 가리켰다. 당장은 공식 야간 지원이 없었다. 정례에게 무급 연장을 부탁하지 않기로 이미 약속했다. 영숙이 그 시간에 혼자 있을 선택을 할 수 있어도, 채영이 몰래 전화기만 붙들고 일하지 못하는 상태를 계획이라 부를 수는 없었다.

“엄마에게 어떻게 물어야 할까요?” 채영이 말했다. “제가 밤에 못 간다고 하면 버리는 것처럼 들릴까 봐.”

“일정표를 같이 보자고 하세요.” 하진이 답했다. “영숙 어르신은 누가 혼자 모든 밤을 짊어지는 걸 원치 않았어요.”

그 말은 위로이면서도 채영의 책임을 덜어 주는 면허는 아니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밤에 혼자 있는 시간을 어떻게 느끼는지 직접 듣기로 했다.

집에 가니 영숙은 귤껍질을 접어 작은 꽃처럼 만들고 있었다. 채영은 어머니 앞에 표를 놓았다. 영숙은 ‘혼자’라고 적힌 칸을 보며 눈썹을 올렸다.

“나 혼자 있던 날에 내가 사라졌니?”

“아니. 하지만 그때 힘들면 바로 갈 사람이 없었어.”

“그건 맞지.”

영숙은 월요일 밤의 빈칸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여덟 시부터 열한 시까지 네가 사무실에 있으면, 그전에 나랑 저녁 먹을 수 있어?” 채영은 가능하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그 사이에 연락하면 누가 먼저 받을지 정하면?” 채영은 전화 당직이 곧 현장 돌봄이 아니라고 말했다. 영숙은 둘을 섞지 말자고 했다.

영숙은 첫 세 시간의 후보로 낮에 함께 김치를 나누던 이웃을 떠올렸다가 곧 취소했다. 이웃은 친구이지 계약 없이 밤마다 대기할 돌봄노동자가 아니었다. 채영은 어머니가 스스로 그 경계를 지켜 주는 것이 고마웠다. 동시에 후보가 다시 비었다.

지수에게서 보낸 지원 제도 안내가 도착했다. 자격과 승인 시각은 확인해야 했고, 당장 다음 밤에 사람이 온다는 내용은 없었다. 채영의 휴대전화에는 인사담당의 계산표도 있었다. 무급으로 한 달을 비우면 사라지는 급여와, 계속 일하면서 돌봄을 이용할 때 드는 예상비용이 다른 칸에 있었다. 어느 쪽도 무료는 아니었다. 영숙은 숫자 아래 붙은 별표를 보고 물었다. “이 비용에 네가 밤새 잠 못 잔 건 들어 있어?” 채영은 웃지도 못했다. “그건 청구할 데가 없어.” 영숙은 계산표를 밀어 두고 딸의 얼굴을 봤다. 채영은 종이를 읽다가 휴직원을 펼쳤다. ‘신청 시작일’에 날짜를 쓰려는 순간 영숙이 말했다.

“나 때문에 네 일을 접을지 결정하는 종이라면, 나도 읽고 싶어.”

채영은 종이를 건넸다. 영숙은 무급이라는 글자에서 오래 멈췄다. “그럼 네가 내 옆에 있는 동안 돈은 누가 벌어?”

“아직 몰라.”

“모른다고 적어. 결정한 척하지 말고.”

채영은 펜을 내려놓았다. 오늘 사무실에서 회의 담당을 확답하지 못했고 휴직도 신청하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으로 그 두 가지의 비용이 같은 표에 올랐다. 밤 세 시간의 빈칸이 뚜렷하게 보였다. 영숙은 귤껍질 꽃을 그 빈칸 위에 놓았다.

“꽃으로 사람을 대신하자는 뜻 아니야. 내일 이야기할 자리를 잊지 말자는 거지.”

채영은 웃었다. 서랍에서 나온 휴직원은 아직 백지였고, 책상에는 누가 실제로 비는지 알 수 있는 첫 시간표가 생겼다. 그녀는 내일 동료에게 회의 가능 여부를 답해야 했다. 영숙은 그 시각에 자신이 어떤 저녁을 보낼지도 함께 고르기로 했다. 귤껍질 꽃은 밤새 빈칸 위에 있었다. 어머니가 잠든 뒤 채영은 그 칸에 자기 이름을 몰래 적지 않고, 지수에게 내일 가능한 지원 상담 시각을 물었다. 답장이 오기 전에도 서랍을 닫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