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야간 왕진
영숙이 정한 경계
다음 날 아침, 노영숙의 집 냉장고는 평소보다 시끄럽게 돌았다. 어젯밤 전기가 끊기기 전에는 신경 쓰이지 않던 소리였다. 영숙은 새벽에 두 번 깼다. 한 번은 밖에서 눈 치우는 삽 소리 때문이었고, 한 번은 혹시 전등이 다시 꺼질까 봐였다. 문하진이 방문했을 때 영숙은 졸렸지만 먼저 물었다.
다음 날 아침, 노영숙의 집 냉장고는 평소보다 시끄럽게 돌았다. 어젯밤 전기가 끊기기 전에는 신경 쓰이지 않던 소리였다. 영숙은 새벽에 두 번 깼다. 한 번은 밖에서 눈 치우는 삽 소리 때문이었고, 한 번은 혹시 전등이 다시 꺼질까 봐였다. 문하진이 방문했을 때 영숙은 졸렸지만 먼저 물었다.
“어제 얼마나 무서웠는지도 종이에 적어?”
“어르신이 원하시면요.” 하진이 말했다.
“그럼 적어. 전기가 아니라 내가 깜깜한 게 싫었어.”
윤채영은 주방에서 국을 데우고 있었다. 어머니의 말에 고개를 들었지만 끼어들지 않았다. 어젯밤에는 ‘정전이면 바로 가자’고 먼저 말한 사람이 자신이었다. 그런데 이른 아침엔 어머니가 웃으며 냉장고 소리를 흉보는 모습을 보고 병원 가방을 열 마음이 사라졌다. 채영은 자기 마음이 하루에도 여러 번 바뀐다는 사실을 어머니 앞에서 인정하기 어려웠다.
오세현은 현관에 쌓인 눈을 털고 들어왔다. 박건은 예비 장비 사용기록과 업체 연락 내역을 들고 왔다. 어젯밤 전기는 오십삼 분 만에 돌아왔고, 기기는 정해 둔 방식대로 사용됐다. 그 기록이 ‘다음 폭설에도 안전하다’는 증명은 아니었다. 박건은 날이 밝은 뒤에도 업체 배송차가 언덕을 못 올라온 시간을 적었다. 채영은 그 칸을 보았다. 실제 위기라면 장비 한 개가 제자리에 있다고 끝나는 게 아니었다.
“어제 연락이 안 됐던 시간도 적어 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제 전화가 거의 꺼져서 하진 씨 번호를 다시 찾느라.”
“전화기가 꺼져도 냉장고 번호가 있잖니.” 영숙이 말했다.
“냉장고는 빛이 없으면 글씨가 안 보여.”
영숙이 웃었다. “그럼 손전등은 왜 샀어?”
“엄마 얼굴 보느라 썼지.”
하진은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연락표 위치를 바꿨다. 냉장고 한가운데 있던 종이의 사본을 현관 손전등 옆에도 놓았다. 채영은 정전 뒤 실제로 손이 간 물건의 순서를 보여 줬다. 손전등, 휴대전화, 가방, 어머니 손. 종이에 적힌 순서와 달랐다. 하진은 그 차이를 꾸짖지 않았다. 계획은 어둠 속에서 사람이 하는 일을 견뎌야 했다.
영숙은 네 사람이 모일 때까지 식탁에 앉지 않겠다고 했다. 국이 식기 전에 먼저 한 그릇씩 먹으라고 했다. 세현은 “저희는 아침 먹고 왔습니다”라고 했다가 박건의 배에서 소리가 나자 말을 고쳤다. 박건은 눈길 때문에 빵집을 지나쳤다. 영숙이 작은 그릇에 국을 퍼 주자 그는 조심스럽게 받았다. 채영은 어머니가 환자로만 식탁에 앉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 좋으면서도, 손님을 챙기느라 지칠까 봐 숟가락을 세었다.
“오늘은 먹는 사람 수를 정하는 회의 아니지?” 영숙이 물었다.
“어제 일을 다시 읽고, 부족한 걸 고치려고요.” 하진이 말했다.
“좋아. 대신 국 먹고 시작해. 난 따뜻할 때 먹을 거야.”
식탁에는 한 장 계획, 어젯밤의 정전 기록, 영숙이 보건소에서 표시한 두 장의 처치 선택표가 놓였다. 서류는 생각보다 적었지만 채영에게는 아직 무거웠다. 종이마다 어머니가 고른 말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잘 보관하는 것과 실제 위기에서 그 말을 전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하진은 먼저 어젯밤 사실을 짧게 읽었다. 몇 시에 전기가 꺼졌고, 어떤 연락이 닿았고, 골목이 언제 열렸고, 영숙이 무엇을 말했는지. 박건은 예비 장비와 회사 지원에서 아직 확인할 부분을 말했다. 세현은 현장에서 직접 살핀 영숙의 호흡과 말의 변화, 하진이 곁에서 관찰해 전한 부분을 구분해 설명했다. 채영은 그 사이를 기다리다 한마디 했다.
“엄마는 무섭다고 했는데, 저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나가자는 생각밖에 안 했어요.”
영숙은 숟가락을 내려놨다. “나가자는 생각이 틀렸다고 말한 적 없어. 나도 무서웠으니까.”
“그런데 내가 엄마 말을 못 들으면 이 문서가 무슨 소용이야.”
“어젯밤엔 들었어. 내가 남겠다고 할 때 네가 골목의 차를 빼 줬잖니.”
채영은 그제야 기억했다. 자신은 거실에서 어머니와 맞섰지만 동시에 이송 길도 열어 뒀다. 한 가지 선택만 붙잡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영숙이 직접 남겠다고 말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역할이었다. 다음에는 그 목소리가 없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여전했다.
“내가 나중에 못 말하면, 내가 적은 이유를 먼저 읽어.” 영숙이 말했다. “그런데 지금 말할 수 있을 땐 이 종이로 나를 누르지 마.”
세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숙은 정해 둔 조건을 넘는 변화가 있으면 이송을 받아들이겠다고 다시 말했다. 자신이 그때 직접 원하면 이동할 수 있고, 다른 뜻을 말할 힘이 있다면 다시 들으라고 했다. 원치 않는 처치 두 줄도 아직 그대로였다. 그렇지만 산소와 불편함을 덜어 주는 도움, 가족에게 연락해 주는 일은 계속 원했다. 세현은 각각의 말을 하나로 합치지 않았다.
채영은 어머니 앞에 놓인 펜을 봤다. “서명하면 끝난 것처럼 보일까 봐 싫어.”
“안 끝나.” 영숙이 말했다. “내가 내일 또 성질낼 텐데.”
“그건 확실해.”
영숙이 웃었다가 기침을 했다. 하진은 물컵을 가까이 놓고 영숙이 숨을 고를 때까지 말을 멈췄다. 채영은 그 멈춤에서 문서를 빨리 끝내려는 사람이 없다는 걸 봤다. 어머니의 선택은 또박또박 말할 수 있을 때만 값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피곤할 때는 쉬고, 달라진 것이 있으면 다시 묻고, 급한 위험은 숨기지 않는 일이 계속 필요했다.
네 사람은 역할을 확인했다. 박건은 기기의 상태와 공급 연락, 하진은 집에서 본 변화와 연락 연결, 세현은 당시 상태에 대한 의학적 설명, 채영은 가족과 영숙이 이미 말한 뜻을 전하기로 했다. 그러나 영숙은 목록을 읽다 멈췄다.
“나는 어디 있어?”
세현이 바로 첫 줄에 영숙 이름을 썼다. ‘현재 말할 수 있을 때 직접 선택하는 사람.’ 영숙은 그 뒤에 연필로 짧게 덧붙였다. ‘내 집 주인.’
박건은 웃음을 참다가 “그건 제 계약서에도 넣어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영숙은 그러라고 했다. 자신의 집을 기기 설치도면처럼 다루는 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한 문장 같았다.
서명이 끝나자 채영은 종이를 곱게 접었다. 영숙이 손을 뻗었다.
“접으면 내가 못 읽어. 냉장고에 붙여.”
“색이 너무 많아. 손님이 와도 보이잖아.”
“손님은 내가 부른 사람만 안으로 들어와. 그리고 읽고 싶은 사람에겐 내가 먼저 설명해.”
채영은 냉장고 중앙에 계획을 붙였다. 자세한 과거 상담과 가족 메모는 여전히 덮개 아래 있었다. 영숙이 보여 주기로 한 말과 감추기로 한 말이 한집에 같이 있었다. 채영은 손님이 오면 필요한 부분만 가리킬 수 있게 작은 가림 종이를 옆에 걸었다. 영숙은 그걸 보더니 “이제야 우리 집 냉장고가 냉장고답다”고 했다. 계란말이 재료보다 종이가 더 많던 날이었으니까.
현관 가방을 정리하다 채영은 낡은 선택표를 한 장 더 찾아냈다. 지난번 보건소에서 초안을 적기 전, 어머니가 첫 상담 뒤 집에서 혼자 쓴 메모였다. 오늘의 문장과 달리 ‘위급하면 바로 병원’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채영은 어젯밤 어두운 곳에서 그 종이를 먼저 집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했다. 영숙은 낡은 메모를 빼앗지 않았다. 글씨를 읽고는 “그날은 내가 그렇게 생각했지. 오늘도 같은 사람이지만, 더 알고 더 무서워해 본 사람이야”라고 했다. 채영은 낡은 종이에 큰 글씨로 날짜를 적고, 현재의 뜻이 아니라고 표시해 다른 가족 기록 사이에 보관했다. 없던 일로 만들지는 않았다. 영숙이 며칠 사이 왜 달라졌는지 모르는 가족에게도 그 흔적이 필요할 수 있었다. 가방에는 영숙이 방금 확인한 사본 한 장만 남았다.
그 작업을 하던 중 사무실 동료가 사진을 보내 왔다. 며칠 전 채영이 놓친 의뢰인과 함께 검토한 서류의 첫 장이었다. 동료 이름이 담당란에 들어가 있었다. 채영은 동료가 일을 빼앗았다고 원망할 수 없었다. 그날 자리를 비운 건 자신이었다. 그렇다고 서운함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영숙은 화면을 보지 않고 딸이 종이를 접는 소리만 들었다. “너도 네 일의 주인이어야 해.” 채영은 “지금은 엄마 서류부터 끝내자”고 말했다. 영숙은 그 말이 배려인지 회피인지 묻지 않았다. 딸이 자신의 이름 옆에 날짜를 쓰는 동안 기다렸다.
점심 뒤 채영의 사무실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앞서 의뢰인을 넘겨받은 동료가 다음 주 출근 가능 날짜를 묻는 것이었다. 채영은 달력을 폈다. 어머니의 방문, 정례의 근무, 배송일, 자신이 맡은 새 사건 기일이 겹쳤다. 어젯밤에는 모두가 집에 남는 선택을 지켰지만, 한 사람의 시간표가 그 선택의 비용을 계속 감당할 수 있는지는 아무도 계산하지 않았다.
“월요일은 가능해요.” 채영이 말했다가 멈췄다. 어머니의 오후 방문과 겹쳤다. “아니, 확인하고 다시 전화드릴게요.”
전화를 끊자 영숙은 정례가 오는 시간을 물었다. 채영은 적힌 시간을 알려 주면서도 정례가 그날 더 머물 수 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영숙은 “모른다고 말한 게 잘한 거야”라고 했다. 며칠 전 같았으면 딸은 빈칸을 혼자 채우려 했을 것이다. 채영은 다음 방문 시간 조정을 문의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답이 오기 전까지 출근 약속도, 휴직원도 내지 않기로 했다. 미루는 선택에도 하루치 대가가 붙는다는 걸 알면서였다.
영숙은 딸의 달력을 보며 “내 이름 때문에 네 이름을 다 지우지 마”라고 했다. 채영은 한동안 답하지 않았다. 사무실 서랍에는 아직 내지 않은 휴직원이 있었다. 오늘 냉장고에는 어머니가 고른 경계가 붙었고, 책상 위에는 그 경계를 오래 지키기 위해 누가 얼마의 시간을 낼지 적어야 할 빈 달력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