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료·완화의료 휴먼극 4화

열세 번째 야간 왕진

숫자보다 긴 숨

창문 아래부터 성에가 올라왔다. 노영숙은 손끝으로 흰 가장자리를 문질렀다가 물기를 무릎 담요에 닦았다. 문하진이 마른 수건을 건네자 그녀는 이번에는 수건으로 닦았다. 저녁빛이 지워진 자리에 작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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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아래부터 성에가 올라왔다. 노영숙은 손끝으로 흰 가장자리를 문질렀다가 물기를 무릎 담요에 닦았다. 문하진이 마른 수건을 건네자 그녀는 이번에는 수건으로 닦았다. 저녁빛이 지워진 자리에 작게 남았다.

“이쪽에서 보면 해가 오래 남아.”

영숙의 문장은 해에서 한 번 끊겼다. 오세현은 그 틈에 다음 질문을 넣으려다가 기다렸다. 영숙은 숨을 고르고 오래 남는다고 끝까지 말했다. 손가락의 포화도계 숫자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윤채영은 문장의 뒷부분보다 화면을 보고 있었다.

“아까보다 낮아요.”

하진은 손의 위치와 화면이 안정되는 모습을 살폈다. 세현은 첫날 방문 기록을 폈다. 차가웠던 손과 반복 측정, 눌린 튜브를 고쳤던 일, 어머니가 어느 정도 길게 대답했는지가 각각 적혀 있었다. 오늘의 창가 자세와 말 길이를 그 옆에 놓았다.

숫자를 읽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읽은 다음 무엇을 말할 것인지가 어려웠다. 세현은 화면이 바뀔 때마다 말문을 열었다 닫았다. 채영이 그를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느끼자 과거 수술실에서 숫자를 다시 보며 기다렸던 시간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지체하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서둘러 병원이라고 말해 버리면, 자신의 기억을 피하기 위해 영숙을 밖으로 보내는 것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영숙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하진이 손잡이 방향을 돌려 줘도 되는지 물었다. 영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모금을 삼킨 뒤 잔을 받침에 놓는 소리가 났다. 세현은 그 움직임을 보는 동안 숨의 간격을 셌다. 스스로도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말해야 할 때였다.

“첫날보다는 문장을 길게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쉬었다가 이어 말씀하시고요.”

“그러니까 괜찮다는 건가요?” 채영이 물었다.

“그 말은 아닙니다.”

그의 답은 너무 짧았다. 채영은 다시 화면을 봤고, 영숙은 차를 더 마시지 않았다. 방 안이 세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진이 기록지의 오늘 칸을 가리켰다.

“측정값도 읽어 주세요. 어르신 말씀하고 따로 적겠습니다.”

세현은 값을 소리 내 읽었다. 하진이 측정 시각과 손의 상태를 적었다. 그다음 영숙에게 지금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을 물었다. 영숙은 숫자를 보려다가 자기 가슴에 손을 올렸다.

“가슴에 문짝이 하나 있는 것 같아. 열려고 해도 덜 열리고. 그런데 지금은 그것보다 눈 셋이 나를 보는 게 더 무섭네.”

채영이 미안한 듯 시선을 내렸다. 세현도 포화도계에서 눈을 뗐다. 영숙은 그의 표정을 살피고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그렇다고 셋 다 다른 데 보라는 뜻은 아니고. 내가 숫자보다 먼저 여기 있다고.”

하진이 낮은 의자를 가져와도 되는지 물었다. 영숙의 고개가 끄덕여지자 그녀는 환자 얼굴과 높이를 맞춰 앉았다. 세현도 의자 하나를 골랐다. 채영은 탁자 옆에 선 채 숫자가 보이는 자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저는 저게 내려가면 아무 말도 못 하겠어요. 엄마가 차 마시는 걸 보고 있으면 제가 느슨해진 것 같고요.”

영숙은 찻잔을 받침 안으로 밀었다. “차 안 마시면 병이 없어지니?”

“그 얘기가 아니잖아.”

“그러니까 하고 싶은 얘기를 해.”

채영은 포화도계를 가리켰다. 세현은 그녀에게 값을 가려 버리고 싶지 않았다. 낮은 숫자는 지켜봐야 할 정보였고, 그 숫자를 보며 두려워하는 딸도 집에 남을 사람이었다. 그는 같은 숫자였던 첫날과 오늘을 기록에서 찾았다. 자세와 튜브 상태, 대답 사이의 쉼이 달랐다. 같은 화면이 같은 밤을 뜻하지는 않았다.

“어머님이 지금 어떻게 괴로운지와 이 값 둘 다 보겠습니다. 값이 흔들린다고 듣던 말을 지우지 않고, 말을 이어 하신다고 값도 무시하지 않겠습니다.”

채영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대신 의자를 당겨 앉았다. 포화도계가 여전히 보이는 자리였다. 영숙이 몸을 조금 틀자 어깨가 굽었고 말이 다시 짧아졌다. 하진은 자세가 편한지 물었다. 영숙은 창문을 보느라 옆으로 틀었다고 했다.

베개 하나의 방향을 바꾸고 나니 영숙이 얼굴을 정면으로 돌릴 수 있었다. 창문은 여전히 시야 안에 있었다. 세현은 그전과 지금의 쉼을 적었다. 화면이 비슷한 값을 보이는 동안 영숙은 덜 조인다고 말했다. 그는 그 말을 자신의 판단 한 단어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적었다.

“그럼 자세 문제였네요.” 채영이 말했다.

세현은 펜을 멈췄다. “도움이 된 것과 원인 전부를 찾은 것은 다릅니다.”

그 문장을 말한 뒤에도 당장 무엇을 더 해 줘야 할지 망설였다. 영숙은 처방받은 산소를 쓰고 있었고 하진이 연결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더 빨리 편하게 만들어야 의사로 온 보람이 생길 것 같은 마음은 줄지 않았다. 손이 움직이지 못하면 말로라도 확실한 결론을 주고 싶었다.

영숙이 그를 불렀다. “오 선생은 생각이 많을 때 입이 없어져?”

“지금은 어떤 도움을 가장 원하시는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걸 나한테 물으면 덜 생각해도 되잖아.”

세현은 고개를 들었다. 영숙은 무릎 위 손을 펴 보였다.

“숨이 덜 차면 좋지. 내가 아픈 걸 좋아하겠어? 그래도 머리가 흐려져서 네가 누군지 모르게 되는 건 싫어.”

채영이 바로 말했다. “엄마, 누가 그렇게 한다는 것도 아니고.”

“뭘 할 건지 묻는 자리잖니. 그럼 싫은 것도 말해 둬야지.”

영숙은 손녀가 전화로 학교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그때 자신이 듣고 있는 줄 아는데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는 것이 무섭다고 했다. 세현은 손녀 이름을 묻지 않았다. 이름보다 지금 영숙이 원한 것은 맑은 정신으로 듣는 시간이었다. 그는 오늘 목표 칸에 그 말을 적었다.

“고통을 그냥 참으시라는 말로 적지 않겠습니다. 편해지는 방법을 함께 보되 의식이 맑은 시간을 우선하고 싶으시다는 말로요.”

영숙이 종이를 받아 읽었다. 채영은 어머니의 손끝이 오늘 목표 위에서 오래 멈추는 것을 봤다. 영숙은 작은 글씨 하나를 짚었다. 세현이 적은 우선이라는 말이었다.

“나중에는 순서가 바뀔 수도 있어. 지금은 이거야.”

“그때 다시 묻겠습니다.”

세현은 종이를 돌려받았다. 채영이 어머니에게 대신 병원 이야기를 물어 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는 아직 내일 결정을 오늘 써 넣지 않았다. 영숙이 말한 현재 목표를 읽어 주고 하진과 지금 상태를 다시 확인했다. 지난번 정한 악화 시 연락 기준은 냉장고에 그대로 남았다.

하진이 영숙에게 또 원하는 도움이 있는지 물었다. 영숙은 잠깐 주위를 둘러봤다. 탁자 위 물건을 찾는 눈이었다. 채영이 약상자를 가져오려 하자 그녀가 손을 들었다.

“아직은 약 말고. 딸이 물을 좀 마셨으면 좋겠어. 아까부터 입술이 붙어 있어.”

채영은 입술을 눌렀다. 하진이 새 잔을 어디서 꺼내느냐고 물었다. 영숙이 찬장 두 번째 칸을 가리켰다. 채영은 자신이 일어나 직접 물을 따라왔다. 물이 잔에 차는 동안 세현은 영숙의 눈이 딸의 손을 따라가는 것을 봤다. 고통을 묻는 질문에 딸의 물 한 잔도 답으로 나올 수 있었다.

“선생님도 마셔요.” 채영이 말했다.

세현은 왼손으로 잔을 받았다. 오른손이 찻잔을 흔들까 봐 주머니로 가려는 것을 멈췄다. 손은 무릎 위에서 조금 떨렸다. 영숙은 그 손을 봤지만 계속 쳐다보지는 않았다. 잔 받침 두 개가 탁자 위에 나란히 놓였다.

해가 창틀에서 빠졌다. 성에의 안쪽이 어두워졌다. 세현은 조용히 기록을 정리하다가 하진에게 자신이 잠깐 판단을 멈췄던 때를 말했다. 채영이 수치를 위험으로 말한 순간, 과거의 지연과 지금의 확인이 머릿속에서 겹쳤다고 했다. 그 말을 영숙에게 기대는 고백으로 바꾸지 않고 함께 간 팀원에게 전했다.

하진은 어느 질문까지 끝내지 못했는지 물었다. 세현은 체감 고통 다음의 원하는 도움이라고 답했다. 그 질문은 영숙에게 다시 돌아갔다. 그는 이번에는 침묵으로 다음 차례를 넘기지 않았다.

“어르신, 말씀을 다 들었다고 해도 제가 모르는 부분은 남습니다.”

“남으면 말하면 되지.”

“그게 쉽지 않았습니다.”

“쉽게 아는 척하는 사람이 더 무서워.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는 의사는 한 번 더 볼 수 있어.”

영숙은 새 방문 약속을 의사에게 선물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자기 집의 다음 현관을 열지 정하는 사람이었다. 세현은 고개를 숙였다가 종이에 필요한 확인만 적었다. 약속에 응급의 안전 보증을 붙이지 않았다.

채영이 약상자를 탁자에 올렸다. 영숙은 매일 먹는 것과 숨이 더 힘들 때 쓰는 것을 보여 주려 했다. 그런데 상자 안 봉투들은 같은 색이었다. 어느 것을 집어도 겉면에서 먼저 보이는 것은 접힌 모서리였다. 채영이 한 봉투를 들었다가 다른 것을 가져왔다.

“이게 늘 먹는 거였나?”

영숙도 바로 답하지 못했다. 세현은 그 망설임을 오늘의 의식이 흐려졌다는 기록으로 쓰지 않았다. 그는 허락을 받고 봉투를 펼쳤다. 처방과 조제표를 함께 확인해야 할 자리였다. 하진이 남은 봉투를 옮기지 않고 상자 안 모습을 먼저 봤다.

채영은 모르는 봉투를 상자 한쪽에 밀어 놓으려 했다. 영숙이 어느 쪽이냐고 물었다. 채영은 모르는 쪽이라고 답했다가 웃지 못했다. 세현은 빈 종이에 봉투 겉면의 말을 하나씩 옮겼다. 알고 있는 것과 아직 확인할 것은 봉투의 색으로 나눌 수 없었다. 하진이 약 확인표를 펼치자 채영은 손에 쥔 봉투를 식탁 위에 그대로 내려놓았다.

“못 찾는다고 엄마가 까먹은 건 아닐 수도 있겠네요.”

“함께 읽어 봐야 알겠습니다.”

영숙은 그 대답을 듣고 남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세현은 잠깐 그 잔을 봤다가 새 종이로 돌아왔다.

창밖은 어두워졌지만 식탁등 아래에서 봉투의 작은 글자는 보였다. 세현은 호흡 기록지 옆에 새 종이를 놓았다. 오늘 들은 영숙의 말은 원래 칸에 남겨 두었다. 약 하나를 고르기 전에 함께 읽어야 할 것이 다시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