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지난 복숭아밭
검은 꽃술을 세는 법
강해진이 꽃눈을 세로로 가르자 흰 조직 가운데 검은 점이 드러났다. 윤보리는 표본봉투를 벌린 채 손을 멈췄다. 바깥 꽃잎은 분홍색이었다. 오전 햇빛을 받으며 흔들리던 것과 다름없는 모양이었다. 해진은 잘린 면을 확대경 아래 놓고 보리에게 번호를 읽어 달라고 했다.
강해진이 꽃눈을 세로로 가르자 흰 조직 가운데 검은 점이 드러났다. 윤보리는 표본봉투를 벌린 채 손을 멈췄다. 바깥 꽃잎은 분홍색이었다. 오전 햇빛을 받으며 흔들리던 것과 다름없는 모양이었다. 해진은 잘린 면을 확대경 아래 놓고 보리에게 번호를 읽어 달라고 했다.
“윤씨 밭, 이 줄, 이 방향.”
그녀는 표찰을 다시 보고 번호를 끝까지 불렀다. 손에 든 꽃눈만 보고 나무 하나를 죽었다고 표시하지는 않았다. 해진이 위치와 방향, 갈변 정도를 적는 동안 보리는 칼날을 닦았다. 마을회관에서 따로 소독해 가져온 절단용 칼이었다. 가방에 든 이름 새긴 오래된 칼은 꺼내지 않았다. 어제는 추억이 쓰기 좋은 물건을 대신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오늘은 예쁜 꽃이 살아 있는 속을 대신하지 못했다.
“겉은 멀쩡하잖아.”
뒤에서 함께 보던 농가 사람이 말했다. 보리는 대답을 해진에게 넘기려고 돌아봤다. 그가 확대경을 옆으로 내밀었다. 그 사람도 검은 가운데를 봤다. 바닥에는 떨어진 꽃이 많지 않았다. 낙화한 수를 세는 것만으로는 안쪽의 죽은 조직이 드러나지 않을 터였다. 그 사람은 꽃잎을 손톱으로 만지려다가 손을 뺐다.
“그럼 덜 떨어졌다고 덜 상한 게 아니네.”
해진은 그렇다고 답하고 다음 번호를 불렀다. 보리는 손목을 낮췄다. 칼끝이 먼저 닿고 꽃눈의 가운데가 천천히 벌어졌다. 케이크 단면을 자를 때는 무너진 면을 뒤로 돌려 손님에게 안 보이게 했다. 여기서는 칼을 그 방향으로 돌리려는 습관이 나오면 손을 멈춰야 했다. 흰 쪽이 남았다는 이유로 검은 가장자리를 손가락 아래 감출 수 없었다.
최옥순이 표본봉투를 들고 아래줄에서 올라왔다. 다른 농가 사람들은 뒤에서 꽃이 특히 검게 변한 나무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옥순에게 그 나무부터 보자고 손짓했다. 계속 살아 있는 꽃을 자르면 결과가 낮게 나올 거라고 했다.
옥순은 보리의 칼과 나무 사이로 들어오지 않고, 줄 밖에서 그 사람을 불렀다.
“많이 다친 나무만 세면 오늘은 유리해도 재조사 전체가 무너져요. 열 걸음마다 자릅시다.”
“지난번에도 그렇게 해서 높은 밭 사진을 넣었지. 높은 데 멀쩡한 걸 보고 우리 아래밭까지 멀쩡하다 하면?”
옥순은 봉투를 펼쳐 밭과 위치를 쓰는 칸을 보여 주었다. 피해가 덜한 곳을 숨기지 않는 대신 서로 다른 곳을 한 봉투에 넣지 않겠다고 했다. 상대는 그래도 아래의 심한 나무를 먼저 넣어 달라고 했다. 해진이 이미 표시한 채취줄을 가리켰다. 순서대로 가면 그 근처도 보고 위쪽도 볼 수 있었다. 다만 심하다는 이유로 간격을 바꿀 수는 없었다.
보리는 옥순이 쉽게 말할 줄 알았다. 조합장이니 누가 불평하면 웃으며 넘길 것 같았다. 그러나 옥순은 불평하던 사람의 봉투를 받아 대신 적지 않았다. 자기 이름이 있는 칸을 손으로 누르고 서 있었다. 보상금이 줄어들 수 있다는 말을 눈앞 사람에게 해야 하는 자리였다. 그 사람이 화를 내면 오늘 저녁에도 마을에서 다시 만나야 했다.
“결과 낮아졌다고 나한테 말해도 돼요.” 옥순이 말했다. “표본을 우리 마음대로 골랐다고 해서 다시 못 보는 것보다 낫지.”
잠시 바람만 났다. 보리는 그동안 칼을 쥔 손을 주머니에 넣을 수 없어 손가락을 폈다. 꽃눈을 몇 번 자르고 나니 엄지 아래가 저렸다. 서울에서는 똑같은 크기의 과일 조각을 곱게 놓는 일이 자기 기술이었다. 이 밭에서는 똑같이 열 번째까지 세는 일이 먼저였다. 조금 더 멀쩡한 것을 고르면 자르기도 쉬웠지만 바로 옆의 그 꽃눈을 건너뛸 수 없었다.
불평하던 사람이 원래 줄로 돌아왔다. 옥순은 고맙다고 크게 말하지 않았다. 그가 순서를 지킨 것을 양보한 일처럼 만들면 남은 밭에서 다시 흥정이 시작될 것 같았다. 그녀는 다음 봉투를 꺼내 보리에게 주었다. 보리는 깨끗한 칼끝을 맞추고 열 번째 꽃눈을 잘랐다.
그 안에는 흰 조직이 남아 있었다. 조금 전 검은 꽃술을 봤던 사람이 이번에도 들여다봤다. 그는 이것도 살아 있다고 넣느냐고 물었다. 해진은 지금 관찰한 생존눈으로 적되 나중의 결실은 더 봐야 한다고 했다. 보리는 생존 칸에 표시하고 봉투 번호를 맞췄다. 옥순이 그 표시를 보는 동안 웃지 않은 것이 보리에게는 이상하게 고마웠다. 좋은 결과 하나를 두고도 다른 사람 눈치를 보는 밭이었다.
“케이크 단면은 예쁘게 잘랐는데 꽃눈 단면은 사실대로 잘라야 하네요.”
보리가 말했다. 옥순은 그러면 케이크는 사실대로 안 잘랐느냐고 물었다. 보리는 예쁘게 잘라 놓은 단면을 떠올리고 웃었다.
“못생긴 면을 뒤로 돌렸죠.”
“오늘은 뒤도 표찰에 넣어.”
해진이 가지 방향을 읽는 소리 사이로 웃음이 작게 났다. 보리는 칼을 놓고 싶었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래도 다음 꽃눈을 잡은 손은 떨렸다. 이 잘린 면 뒤에는 올해 그 사람이 팔 수 있을 열매가 걸려 있었다. 테이블 위 장식이 무너지면 새 크림을 바르면 됐지만, 잘못 세었다고 눈앞의 가지에 꽃을 다시 달 수는 없었다.
해진이 그녀의 손을 봤다. “쉬었다가 할까?”
“네가 잘라. 내가 읽을게.”
그녀는 칼을 깨끗이 닦아 건넸다. 손을 숨기면서 괜찮다고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해진은 칼을 받았지만 웃지 않았다. 장갑 낀 엄지가 꽃눈을 받치는 위치를 보리에게 보여 주었다. 보리는 한동안 번호와 위치를 읽으며 손가락을 풀었다. 해진이 두 역할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녀가 읽지 않으면 표를 쓰기 전에 기다렸다.
“관측기사님은 꽃도 잘 자르네.”
“방금 네가 칼이 아니라 방향부터 잡으라고 했잖아.”
“듣고 있었어?”
해진은 확대경을 보리 쪽으로 돌렸다. “다른 방향으로 자르면 혼나니까.”
보리는 웃다가 조금 늦게 번호를 읽었다. 옥순이 뒤에서 두 사람 이름을 번갈아 불렀다. 둘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옥순을 봤다. 그녀는 아직 아무 농담도 하지 않았는데 보리가 먼저 “지금 기록하고 있어요”라고 답했다. 해진이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낮췄다. 보리는 그 웃음을 보고 다음 번호를 또박또박 불렀다.
다른 밭으로 옮길 때도 간격은 바꾸지 않았다. 부풀어 오른 봉투 옆에 빈 봉투가 줄어 갔다. 어떤 나무는 겉으로 상한 꽃이 많았는데 잘라 보면 가운데가 희었고, 다른 나무는 가지에 잘 붙어 있는데 속이 갈변했다. 보리는 밭을 바꿀 때마다 위치 표찰을 먼저 읽었다. 칼을 다시 맡고 나서는 꽃눈을 고르는 손보다 세는 입에 신경을 썼다. 자기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한 걸음 옮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마을회관에 돌아왔을 때 옥순은 의자를 먼저 밀어 주었다. 보리는 앉는 대신 봉투를 식탁 위에 놓으려 했다. 해진이 식탁 끝을 잡으며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바로 밑에 낮은 표본쟁반이 숨어 있었다. 그는 쟁반을 앞으로 당겨 번호 순으로 놓을 자리를 만들었다.
“가방하고도 싸우더니 오늘은 탁자랑도 싸우네.”
“내가 지는 상대는 전부 말이 없다는 공통점이 있지.”
“그럼 나한테는 안 지겠네.”
보리는 대꾸를 찾다가 꽃눈을 먼저 놓았다. 해진도 더 말하지 않고 봉투 번호를 읽었다. 둘의 말이 가벼워져도 쟁반 위 검은 점은 그대로였다. 보리는 그것을 오래 봤다. 자신이 웃으면 오늘 손실을 겪은 사람이 기분 나쁠까 싶었지만 웃음을 모두 막는다고 꽃눈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다.
다섯 농가의 기록을 나눠 계산하니 예비 갈변률은 서른여덟 퍼센트에서 일흔한 퍼센트까지 갈렸다. 옥순은 가장 낮은 칸과 높은 칸을 번갈아 봤다. 보리는 숫자를 평균 하나로 만들려는 듯 계산기에 손을 뻗었다가 해진에게 어떻게 적어야 하는지 물었다.
“밭마다 놓자. 지금 전체를 하나로 쓰면 아까 위치 나눈 게 없어져.”
옥순도 필지별로 조사받아야 한다고 했다. 높은 피해율의 농가 사람은 자기 숫자를 보고 안도하는 듯했다가 다른 사람의 표를 보았다. 낮은 쪽 사람은 웃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보리는 표 위에 보상금 칸을 만들지 않았다. 오늘 본 것은 꽃눈이었다. 올해 팔 과실의 수를 지금 숫자로 가져올 수는 없었다.
“열매는 아직 없잖아요.” 그녀가 말했다.
옥순은 그렇다고 답하고 빈 보상금 칸 대신 필지 이름을 크게 써 달라고 했다. 해진은 위치와 방향이 빠지지 않았는지 원래 메모를 맞췄다. 보리는 다시 쓴 표를 각 봉투와 나란히 놓았다. 자기 밭을 찾는 사람들이 다른 밭 숫자부터 읽지 않도록 손가락으로 이름을 먼저 짚어 주었다.
농가 사람이 자기 표를 챙긴 뒤 나가면서 보리에게 수고했다고 했다. 보리는 그 말에 어디까지 답할지 몰라 잠시 고개만 끄덕였다. 회사에서는 시제품을 잘랐다고 따로 자기 이름이 남지 않았다. 오늘 봉투에는 그녀가 읽고 자른 순서가 남았지만 그 이름으로 누구 몫의 결과를 약속할 수는 없었다. 그는 나가다가 “그래도 꽃 덜 떨어져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라고 중얼거렸다. 보리는 그 뒷말까지 들었다.
칼을 닦아 케이스에 넣자 손끝에 꽃 향이 아주 옅게 남아 있었다. 미식 개발실에서 맡던 익은 복숭아 향과 달랐다. 그녀는 다음번에는 이 나무에서 무슨 맛이 날지 생각하려다가 그만뒀다. 지금은 빈 쟁반을 옮겨야 했다. 해진이 한쪽을 잡자 두 사람은 서로 손이 닿지 않을 자리를 찾아 같이 들었다. 그것이 더 어색해서 보리는 먼저 웃었다.
“손 안 닿게 들면 표본이 기울어요.”
“그럼 표본 편으로 들겠습니다.”
옥순은 돌아가는 척하다가 다시 탁자로 왔다. 가장 피해가 적은 최씨 밭의 위치별 기록을 손에 들고 있었다. 전체 숫자만 낮았지 아래쪽 두 줄은 갈변률이 갑자기 높아졌다. 해진이 지형선을 함께 놓았다. 보리는 그 두 줄의 봉투를 다시 찾아 방향을 읽었다. 위에서 내려온 경사와 아래에서 멎는 줄이 같은 곳을 가리켰다.
옥순이 의자에 다시 앉았다. 해진은 자기 기록 위로 그 두 줄을 표시했고, 보리는 넣어 둔 칼 케이스를 가방 밖으로 꺼내 놓았다. 오늘의 숫자가 낮은 밭에서도 아직 볼 곳이 남아 있었다. 일요일 표는 휴대전화 안에 그대로였다. 그녀는 표를 열지 않고 최씨 밭의 아래 두 줄 사진을 먼저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