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료·완화의료 휴먼극 39화

열세 번째 야간 왕진

여섯 번째 야간 왕진과 폭설

눈은 저녁부터 골목의 소리를 빼앗았다. 배달 오토바이가 언덕 아래에서 돌아섰고, 반찬가게 아줌마는 셔터를 평소보다 일찍 내렸다. 노영숙은 창가에서 흰 지붕을 보다가 “김치가 덜 익겠네”라고 말했다. 윤채영은 눈이 쌓인 계단부터 떠올렸다. 오늘 밤 병원에 가야 하면 들것은 어디로 내려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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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저녁부터 골목의 소리를 빼앗았다. 배달 오토바이가 언덕 아래에서 돌아섰고, 반찬가게 아줌마는 셔터를 평소보다 일찍 내렸다. 노영숙은 창가에서 흰 지붕을 보다가 “김치가 덜 익겠네”라고 말했다. 윤채영은 눈이 쌓인 계단부터 떠올렸다. 오늘 밤 병원에 가야 하면 들것은 어디로 내려갈까.

문하진과 오세현은 영숙의 집을 여섯 번째 야간 왕진으로 찾았다. 낮 방문을 빼고 센 횟수였다. 약속한 저녁 확인이었다. 세현은 현관 손잡이의 빨간 표식을 보고 산소줄을 살핀 뒤 들어왔다. 박건이 가져다 둔 예비 장비는 벽 옆에 있었고, 연락번호는 영숙이 앉은 자리에서 보였다. 하진은 어제의 준비가 오늘도 그대로인지 물었다. 영숙은 “물건은 그대로인데 사람들은 떨고 있어”라고 했다. 채영은 자신이 먼저 지목당한 줄 알고 입술을 깨물었다.

여덟 시 사십사 분, 거실 전등이 꺼졌다. 냉장고 소리가 멎자 눈이 내리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했다. 농축기의 표시창이 바뀌었고, 하진은 준비해 온 손전등을 켰다. 세현은 영숙 이름을 불렀다. 영숙이 “나도 어두운 건 알아”라고 답했다. 그는 웃지 못했지만 그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채영은 이미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다. “지금 나가야 해요. 길 막히면 끝이에요.”

“골목부터 확인합시다.” 하진이 말했다. “그 사이 영숙 어르신 상태는 계속 볼게요.”

세현은 전날 계획을 펴서 손전등 불빛 아래 읽었다. 정전 시 사용할 대체 수단과 기기 연락망, 영숙의 현재 의사, 악화 때 바로 다른 도움을 연결할 변화가 적혀 있었다. 박건에게 통화가 닿았다. 박건은 예비 장비가 실제로 준비돼 있는지 물었고, 현장 상태를 들은 뒤 자신이 확인할 기기 부분을 나눠 말했다. 세현은 통화를 한 사람에게만 맡기지 않고, 하진이 영숙의 호흡과 반응을 보고 자신이 연락과 판단을 함께 맡겠다고 했다.

영숙은 자신의 집인데 왜 모두가 자신을 빼고 이야기하는지 묻지 않았다. 그 대신 손전등을 낮춰 달라고 했다. 빛이 눈에 직접 닿으면 상대 얼굴을 보기 어려웠다. 하진이 빛을 벽으로 돌리자 방 안 사람들의 얼굴이 겨우 드러났다. 영숙은 채영의 빨간 손을 보고 자기가 할 말을 골랐다.

“나 지금 말할 수 있어. 먼저 이것부터 써. 무섭다. 그래도 당장 나가고 싶진 않다.”

채영이 항의하려다 멈췄다. 어머니가 무섭다고 말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집에 남겠다는 말 앞에 그것을 붙인 것은 낯설었다. 용감한 척하는 사람에게는 싸우기 쉬웠다. 두려운 사람과는 함께 선택해야 했다.

박건이 전화로 전원 복구 예상 시간을 알아보고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다. 첫 안내는 확정 시각이 아니었다. 그는 예비 공급이 지금의 사용 상태에서 어떻게 변하는지 현장 표시를 읽어 달라고 했고, 채영은 숫자를 복창했다. 세현은 그 숫자를 영숙의 몸 상태와 따로 적었다. 표시가 아직 충분하다고 영숙이 괜찮다는 뜻은 아니었다. 반대로 불이 꺼졌다는 사실만으로 영숙이 말한 계획이 지워지지도 않았다.

채영은 계단 창으로 나갔다가 돌아왔다. 눈은 무릎까지가 아니라 발목 위였다. 그러나 경사로에 차가 멈춰 서 있었다. 배달 기사가 미끄러져 차를 세운 모양이었다. 채영은 차량 번호를 볼 정도로 오래 밖에 있지 않았다. 손이 얼어 돌아온 그녀에게 영숙이 수건을 내밀었다.

“내가 지금 가자고 하면, 저 차부터 빼야 해.”

“그렇지. 그래서 지금 빼 달라고 말하자는 거야.” 채영이 답했다.

하진은 이송을 준비할 연락과 실제 이동 결정을 구분하자고 했다. 채영은 아랫집에 차가 길을 막는다고 연락했다. 반찬가게 아줌마는 차량 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숙의 선택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채영이 할 일은 있었다.

그러나 전화 한 통으로 차가 움직인 건 아니었다. 운전자가 시동을 걸자 바퀴가 눈 속에서 헛돌았다. 채영은 방한화를 신고 내려가도 되느냐고 어머니에게 물었다. 영숙은 “나 때문에 방에 묶여 있지 마. 대신 넘어지지 마라”라고 했다. 하진이 곁에 있는 동안 채영은 반찬가게 아줌마와 함께 가게 앞 모래주머니를 가져왔다. 운전자는 창문을 내리고 미안하다고 했다. 채영은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다. 자기 어머니가 당장 나가야 할 수도 있는데 길이 막혔다고, 지금은 앞바퀴가 놓일 자리만 치워 달라고 했다. 세 사람이 삽과 발로 눈을 걷어 내는 동안, 윗집 청년이 손전등을 비췄다. 차가 천천히 언덕 아래로 내려갔을 때 채영의 장갑은 젖어 있었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집으로 돌아와 영숙의 얼굴부터 봤다. 어머니는 “네가 나보다 더 숨차 보여”라고 했다. 채영은 웃지 못하다가, 미끄러진 바지 무릎을 보고서야 웃었다.

아줌마는 뒤따라 올라와 “무슨 일 나면 내가 차 몰아 줄게”라고 했다. 고마운 말이었지만, 눈길에서 자기 승합차가 올라올지는 아줌마도 장담하지 못했다. 영숙은 “오늘은 길 치워 준 게 제일 큰일이야”라고 말했다. 아줌마가 내려간 뒤 채영은 누군가의 선의를 예비 장비처럼 확실한 물건으로 적어 둘 수는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길은 실제로 열렸고, 그 수고는 계획서 바깥의 사람들에게서 왔다.

집 안에서는 냉장고 문을 열지 않았다. 어두운 부엌에 김치통이 있다는 사실이 채영에게 이상하게 거슬렸다. 평소엔 전기료 걱정하며 오래된 냉장고를 바꾸자고 했는데, 지금은 그 낮은 모터 소리가 집의 숨처럼 그리웠다. 영숙은 “김치는 전기가 안 먹어도 버틴다”고 농담했다. 채영은 웃다가 울 뻔했다.

세현은 눈 쌓인 창에 비친 자신의 손을 봤다. 경보음이 나면 굳던 손이 오늘은 손전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성장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누구에게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 미리 정해 둔 덕이었다. 옛 수술실에는 울리지 않은 경보와 비어 있던 간호석이 있었다. 이 방에는 눈 오는 골목과 두 시간짜리 배터리가 있었다. 둘을 같은 사건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는 지금 보이는 것만 말해야 했다.

“어르신, 한 시간 정도는 현재 조건에서 여기 머물며 살펴보길 원하십니까?” 그가 물었다. “그보다 앞서 상태가 달라지면 바로 계획을 바꾸겠습니다.”

“한 시간은 길어.” 영숙이 말했다. “스무 분마다 나한테 묻지 말고, 네가 본 걸 말해. 내가 대답할게. 한 시간 뒤에도 불이 안 오면 길과 기계를 다시 보고 결정하자.”

하진은 영숙의 말과 조건을 되읽었다. 채영도 들었다. 수첩에 적힌 시각 옆에는 누가 무엇을 확인할지 이름이 붙었다. 이 집에서 한 시간을 버틴다는 말은 누구도 손을 놓고 기다린다는 뜻이 아니었다. 채영은 “내가 계속 기기 숫자만 보면 엄마 얼굴을 못 보겠다”며 표시를 볼 차례를 세현과 나눴다. 작은 양보가 필요했다.

불이 꺼진 지 삼십 분쯤 됐을 때 아랫집에서 문을 두드렸다. 반찬가게 아줌마가 손전등 두 개와 따뜻한 물을 들고 있었다. 하나는 배터리가 거의 없어 불빛이 노랬다. 영숙은 “우리 집에 귀한 건 사람이 먼저”라며 들어오게 했지만, 하진은 방문객이 늘면 방이 복잡해져 잠시 현관에서만 인사하자고 했다. 아줌마는 서운한 얼굴을 했다가 영숙이 “내일 김치통 가지러 와”라고 하자 웃었다.

그 직전 채영은 잠깐 휴대전화 화면을 켰다. 아까 길을 비춰 준 윗집 청년에게서 ‘아래 차 빠졌어요’라는 짧은 문자가 와 있었다. 화면의 남은 전력이 거의 없었다. 채영은 답장을 쓰다 말고 어머니에게 보여 줬다. 영숙은 “고맙다고는 내일 말해. 지금은 전화기 아껴”라고 했다. 며칠 전 손녀와 찍은 사진이 잠금화면에 떠 있었다. 노란 머리핀이 어두운 방에서 괜히 선명했다. 채영은 화면을 끄고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동네 사람들의 얼굴은 내일 다시 볼 수 있지만, 어머니의 오늘 말은 지금 들어야 했다.

불이 꺼진 지 오십삼 분에 전등이 켜졌다. 냉장고 모터가 다시 돌기 시작했고, 창에 붙은 눈이 환하게 보였다. 아무도 환호하지 않았다. 채영은 혹시 깜빡였다가 다시 꺼질까 전등만 봤다. 박건은 통화로 장치가 정상 상태로 돌아왔는지 확인했고, 하진은 영숙이 처음보다 더 힘들어지지 않았는지 물었다. 영숙은 “무섭긴 여전한데, 지금은 숨보다 손이 차다”고 했다. 채영이 자기 손을 문질러 줬다.

“불이 돌아왔으니 다 된 거죠?” 채영이 물었다.

“저녁의 선택은 다시 확인해야죠.” 하진이 말했다.

영숙은 창밖을 보았다. 골목은 열렸고 예비 장비는 사용한 기록이 남았다. 전기가 오기까지 무사했다는 사실이 내일 밤도 무사하다는 보증은 아니었다. 영숙은 지금은 집에 남겠다고 했다. 배터리 상태와 공급 기록은 박건이 확인하고, 눈길 때문에 다음 방문이 어려워지면 미리 연락하기로 했다. 누구도 이것을 폭설을 이긴 승리라고 부르지 않았다. 영숙은 버틴 시간보다, 자신이 무섭다고 말할 수 있었던 시간을 기억할 것 같았다.

채영은 젖은 장갑을 현관에 널었다. “엄마, 무김치 가져온 분이 오늘은 물도 주고 갔어. 이자 붙겠네.”

“이자는 귤로 갚자. 계란말이는 네가 아직 공부 중이니까.”

“또 그 얘기야?”

영숙이 웃었다. 세현은 손전등을 끄고 가방에 넣었다. 그 안에는 과거 사고 통지서도 여전히 있었지만 오늘은 그것을 꺼내지 않았다. 대신 정전 시각과 영숙이 말한 두려움, 실제로 도착한 도움을 적었다. 영숙은 ‘하지 않을 것’ 두 줄 옆에 직접 날짜를 쓰고 채영에게 사본을 건넸다. 내일 또 읽을 수 있게, 종이를 접지 말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