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야간 왕진
두 시간짜리 배터리
박건은 눈을 털지 못한 채 노영숙의 집 현관에 섰다. 아직 눈이 쌓인 것은 아니었다. 새벽부터 날리던 것은 가루처럼 가벼운 눈발이고, 골목에는 흰 선 하나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영숙은 기사 신발 밑에 붙은 작은 얼음 알갱이를 보고 물었다.
박건은 눈을 털지 못한 채 노영숙의 집 현관에 섰다. 아직 눈이 쌓인 것은 아니었다. 새벽부터 날리던 것은 가루처럼 가벼운 눈발이고, 골목에는 흰 선 하나 생기지 않았다. 그러나 영숙은 기사 신발 밑에 붙은 작은 얼음 알갱이를 보고 물었다.
“밖에 많이 와?”
“이 정도는 금방 녹을 겁니다.” 박건이 말하다가 멈췄다. “예보는 더 봐야 하고요.”
“거짓말 못 하는 사람이 우리 집에 자꾸 오네.”
현관 손잡이의 빨간 산소줄 표식이 박건 손등에 닿았다. 그는 줄을 벽 고리에 올리고 들어왔다. 세현이 처음 붙였던 표식은 가장자리가 닳아 있었고, 누군가 자주 읽은 덕에 글씨 한 획이 번졌다. 영숙은 새 표식을 만들자고 하지 않았다. 오래 써서 닳은 물건은 이 집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문하진은 전날 바닥에 떨어진 대체 전원 점검표를 펼쳤다. 종이에는 영숙의 장치가 현재처럼 돌아갈 때 예비 배터리로 버틴 시험 시간이 적혀 있었다. 가족이 처음 설명받은 시간보다 짧았다. 박건은 기기를 무작정 끄지 않고, 대체 수단과 팀 연락을 확인한 다음 준비해 온 장비로 시험 값을 다시 보았다. 영숙도 침상에서 숫자를 읽었다.
“두 시간.”
“표시상 그렇습니다. 실제로는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저 숫자만 믿고 끝까지 기다리면 안 됩니다.” 박건이 말했다.
“그러니까 내 새 전기 시계가 두 시간짜리야.”
윤채영은 작년 겨울 아파트에 정전이 났을 때의 안내 문자를 찾아 보여 줬다. 그때 복구까지 세 시간 반이 걸렸다. 같은 일이 또 일어난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두 시간짜리 배터리 하나로 무조건 집에 있을 수 있다는 계획은 성립하지 않았다. 채영은 현관에 둔 여행가방을 바라봤다. 가방을 닫아 놓아도 콘센트가 끊기면 다시 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방 속 종이는 끊긴 전기를 대신하지 못했다.
“정전이면 바로 가야 해요?” 그녀가 물었다.
“정전만으로 답을 정하지는 맙시다.” 하진이 말했다. “그때 영숙 어르신 상태와 실제 예비 장비, 길의 상황을 함께 봐야 합니다. 지금은 대체 수단이 빠져 있다는 걸 알았으니 채워야 하고요.”
“채울 때마다 돈이 드는 거잖아.” 영숙이 말했다.
박건은 대여계약서를 찾았다. 채영이 이미 밑줄을 그어 둔 페이지였다. 필터 점검 알림이 가족이 아닌 닫힌 계정으로 가던 때와 같은 계약이었다. 지난번에는 기기 교체비를 가족에게 넘기지 않도록 확인했지만, 예비 전원에 관한 안내는 구두로만 남아 있었다. 박건이 회사에 전화를 걸자 상담원은 추가 배터리를 선택 서비스라고 말했다. 채영은 손을 내밀어 전화기를 받았다.
“선택이면 비용과 책임이 적힌 문서를 보내 주세요. 어머니가 재택을 선택할 때 들은 내용과 같은지 보겠습니다.”
영숙이 웃었다. “우리 딸은 계약서랑 얘기할 때 목소리가 살아나.”
“엄마가 병원 가방만 보면 살아나는 목소리와 같은 거야.”
“그 목소리는 별로 예쁘지 않지.”
박건은 두 사람을 말리지 않았다. 본인도 회사가 보내 줄 문서를 확인해야 했다. 그는 예비 산소를 별도로 가져오는 방법, 장치 교체 시 연락 순서를 설명했지만 확정되지 않은 제공 시각은 약속하지 않았다. 영숙은 “언제 올 수 있는지 모르면 없는 것처럼 생각해야 해”라고 했다. 그 말에 박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때 강태오가 왔다. 손실평가 일을 하는 그는 영숙 가족에게 앞서 기기 비용 영수증을 나눠 보자고 연락받은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계약과 청구서를 함께 읽어 달라는 채영의 부탁을 받고 왔다. 태오는 먼저 자신이 의료적 이송을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영숙은 그의 명함을 한 번 읽고 “그럼 돈 때문에 집을 나가게 되는지는 물어도 되겠네”라고 했다.
“물어 보셔야 합니다. 제가 확인할 수 있는 건 계약에 적힌 비용 부담입니다.”
태오는 업체가 보낸 안내서와 대여계약의 비상 공급 조항을 나란히 놓았다. 문구는 같아 보였지만, 실제로 어느 물건을 누가 언제 가져오는지가 빠져 있었다. 박건은 회사 담당자에게 다시 연결했다. 통화는 길었다. 상담원에서 관리자로, 관리자에서 배송 담당으로 세 번 넘어갔다. 영숙은 그 사이 작은 접시에 귤을 두 개 깠다. 태오 앞의 귤은 끝내 마르기 시작했다.
“돈 얘기가 이렇게 길면, 숨도 오래 참아야 하나?” 영숙이 말했다.
채영이 웃지 못했다. 태오가 통화를 마치고 대답했다. “오늘 안에 비상 공급 방식과 비용을 적어 보내겠다고 합니다. 확인 전엔 무료라고 단정하지 않겠습니다.”
영숙은 다행이라는 말 대신 손에 든 귤 한 쪽을 먹었다. 딸은 업체에게 당장 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서류 없는 약속을 붙잡으면 다음 고지서에서 같은 싸움을 하게 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박건이 가르쳐 준 연락번호를 냉장고에 붙이되, 실제 물건이 오기 전까지는 계획에 완료 표시를 하지 않기로 했다.
오후 네 시쯤 배송차가 왔다. 기사가 예비 장비를 차에서 내렸고, 사용 안내는 봉투에 들어 있었다. 박건은 물건의 모델과 상태를 확인하고 영숙과 채영 앞에서 누가 연락하고 누가 회수하는지 읽었다. 채영은 추가 비용란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다시 물었다. 업체는 기존 대여의 비상 지원 범위에 포함된다고 적은 확인서를 내밀었다. 태오는 서류 사진과 날짜를 남겼다. 오늘 집에 놓인 장비와 오늘 받은 확인서의 범위에서만 말할 수 있었다.
영숙은 새 물건이 도착해도 웃지 않았다. “저걸 써야 하는 밤이 오면 무섭겠지.”
“그렇죠.” 하진이 말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 나아. 어디 둘지는 내가 정할래.”
그때 배송기사가 장식장 옆 좁은 틈을 가리켰다. 거기에 놓으면 선이 짧고 동선도 편하다는 말이었다. 채영은 장식장 안의 제기와 남편 사진을 떠올리고도 잠깐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영숙은 물건보다 먼저 사진을 꺼내 들었다. 남편이 마지막으로 고른 재킷을 입고 웃고 있었다. “이 사람이 나보다 먼저 갔어도, 우리 집 물건을 전부 병원 물건에게 내줄 필요는 없어.” 배송기사는 “그렇다면 다른 자리를 보겠습니다”라고 했다. 자리가 바뀌는 동안 채영은 엄마가 완강해서 일이 늦어진다고 생각했다가, 자기였어도 아버지 사진 뒤에 경고등을 달고 싶지 않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갔다.
태오는 문 앞에서 통화 하나를 받았다. 오늘 확인한 범위와 다음 달 청구서가 다르면 다시 봐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가 끊자 채영이 물었다. “그때도 제가 일을 쉬고 종일 전화해야 하겠죠?” 태오는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점심때 채영이 며칠 전 의뢰인을 동료에게 넘긴 일을 짧게 털어놓았기에, 그가 왜 시간을 묻는지 알았다. 그저 회사의 서면 답변과 오늘 받은 물건의 번호를 한 곳에 모아 두자고 했다. 영숙은 딸 얼굴을 보았다. “비용 없는 물건이라도 네 하루가 들었네.” 채영은 “엄마 때문에 쓴 건 아니야. 확인 안 하고 넘긴 사람들 때문이지”라고 말했다. 둘 다 완전히 옳은 말은 아니어서 영숙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태오가 말라 버린 귤을 집어 먹는 걸 보고 새 귤을 하나 까 줬다.
박건은 집 안 동선을 보고 예비 장비를 현관 쪽 벽에 고정했다. 출입을 막지 않고, 영숙이 앉은 자리에서 위치가 보이는 곳이었다. 채영은 그 자리 옆에 추가 배터리 가격을 적어 둔 쪽지를 붙이려다 영숙 눈치를 봤다. 영숙은 “가격은 파일에 넣고 여기는 전화번호를 붙여”라고 했다. 자신이 누워 보는 벽을 청구서 게시판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저녁 무렵 눈발이 굵어졌다. 반찬가게 아줌마가 무김치 통을 돌려주러 왔다가 현관의 새 장비를 보고 멈췄다. 영숙은 먼저 말했다. “우리 집 겨울용 우산이야. 쓰지 않으면 좋겠지만 비 오면 찾으려고.” 아줌마는 더 묻지 않고 통에 빈 귤껍질 하나를 넣어 장난쳤다. 영숙이 벌레 모이겠다고 타박하자 두 사람은 잠깐 웃었다.
박건이 돌아가기 전, 영숙은 새 장비의 소리가 얼마나 큰지 물었다. 박건은 지금 자리에서 잠깐 가동해 소리를 들려줬다. 영숙은 귀를 막지 않고 침상 쪽에서 듣다가 고개를 저었다. “저게 밤새 켜 있으면 나는 잠 못 자.” 박건은 소리를 줄여 주겠다고 빈말하지 않았다. 실제로 필요해지는 상황이면 같은 방의 소리와 도움을 함께 받아들여야 할 수 있다고 했다. 채영은 장비를 반대하는 말로 들었지만 영숙은 아니라고 했다. “좋은 물건도 싫은 점이 있는 거지. 거짓말하지 말라고 부른 사람이 집에서 거짓말하면 되나.” 박건은 자신이 한 답을 웃으며 받아들였다. 영숙은 침상 옆 귀마개가 어디 있는지 확인해 두었고, 박건은 장비를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
저녁 진료를 마치고 들른 세현은 박건이 돌아간 뒤 영숙의 한 장 계획 뒤에 새 연락선과 물건 위치를 덧붙였다. 영숙은 표 맨 위의 ‘집·정신·딸의 잠’을 그대로 읽었다. 배터리가 늘었다고 세 조건이 영원히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내일 눈이 쌓여 불이 끊길 때, 가족이 처음으로 어디를 볼지 알고 있었다.
밤 기상 알림에 폭설 가능성이 떴다. 채영은 창밖을 보고 여행가방이 현관 벽에 기대 있는지 확인했다. 영숙은 김치통을 씻다가 “눈 오면 아랫집에 무김치 남았는지 먼저 물어 봐”라고 했다. 채영은 어머니에게 정전 이야기를 꺼내려다 그만두었다. 오늘은 준비한 물건의 자리를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내일 밤은 내일의 상태와 전기로 다시 판단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