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지난 복숭아밭
쓴맛 난 열두 병
류미정은 숟가락 끝에 묻은 콩포트를 혀에 대자마자 뱉었다. 향은 좋았다. 문제는 뒤에 남는 얇은 쓴맛이었다.
류미정은 숟가락 끝에 묻은 콩포트를 혀에 대자마자 뱉었다. 향은 좋았다. 문제는 뒤에 남는 얇은 쓴맛이었다.
“이 배치만 멈춰요.”
포장대에서는 윤보리가 라벨 뒷면의 우유 표시를 확인하고 있었다. 지난번 표시 오류 뒤로 검수표에는 두 사람 이름이 들어가야 병이 나갔다. 오늘은 새로 만든 예순 병 중 열두 병의 최종 확인칸이 아직 비어 있었다. 미정은 그 칸 위에 손을 얹었다.
“무슨 맛인데요?” 보리가 물었다.
“정확히 모르겠어요. 그래서 먼저 격리합니다.”
최옥순은 벌써 택배 상자를 접고 있었다. “한 병만 그럴 수도 있잖아.”
“한 병일 수도 있어요. 그럼 열두 병을 확인하면 되죠.” 보리는 파란 격리띠를 가져왔다. “지금 아까워 보인다고 범위를 한 병으로 줄일 수는 없어요.”
다른 마흔여덟 병은 앞선 배치에서 나온 것이었다. 투입한 원물 포장번호와 가열시각, 포장 로트가 열두 병과 달랐다. 보리는 그것까지 냉장고 문에 붙인 표에서 확인하고 별도 선반에 두었다. ‘안전’이라고 단정해 출고시킨 것이 아니라, 문제 배치와 섞이지 않게 유지한 것이다.
미정은 씨 제거기 앞에서 멈췄다. 며칠 전 해진이 손으로 씨를 빼다 과육을 절반 남겼다고 놀린 기계였다. 커진 배치를 감당하려고 빌려 온 장비의 칼날 한쪽이 미세하게 마모돼 있었다. 금속 조각이 떨어졌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씨가 잘게 깨질 수 있는 틈이 있었다.
“멈춘 시각부터 적죠.” 보리가 말했다.
“이걸로 장터 물량 다시 모자라겠네.” 옥순이 숨을 내쉬었다.
“맞아요. 그런데 보낸 뒤에 알면 더 큰 물량이 문제돼요.”
해진은 퇴근길에 들어오다 파란 띠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오늘은 시식권도, 설거지도 없겠군요.”
“네. 주방 밖에 있어 주세요.” 미정이 답했다.
보리는 그를 보고 웃을 여유가 없었다. 기계가 바뀐 날부터 작업표를 다시 펴야 했다. 씨 제거기에 들어간 총 중량과 칼날을 점검한 시각, 열두 병 원물 포장번호를 찾았다. 장비가 언제부터 나빴는지 모른다면 이전 배치도 마냥 괜찮다고 말할 수 없었다. 미정은 전날 교대의 칼날 확인란을 가져왔다. 그때는 마모가 보이지 않았고 도구 세척 사진도 있었다. 하지만 사진으로 보이지 않은 결함이 없었다고 증명할 수는 없었다.
보리는 열두 병의 출고선에 큰 글씨로 ‘판매금지·확인중’이라고 적었다. 그 아래 마흔여덟 병은 다른 작업대에 남겨 뒀다. 이미 포장을 마쳤으니 매대에 싣자는 옥순의 손을 잠깐 막았다. “확인 범위를 좁히기 전까지 마흔여덟도 출고 대기입니다. 문제 배치와 다르다는 기록부터 다시 맞춰요.” 옥순은 불만스러워도 장부를 가져왔다.
미정은 열두 병에서 보관용 표본을 꺼내고, 같은 시간 손질한 원물 표본과 함께 비교했다. 병을 무작정 열어 모두 맛보는 것은 하지 않았다. 이상을 느낀 시식자와 표본번호를 적고 외부 정밀검사에 맡길 분량은 밀봉했다. 현장에서 살필 보관표본은 따로 남겼다. 장비의 칼날도 곧장 버리지 않고 사용을 중지해 상태를 남겼다. 새 칼날을 끼우는 일은 별도 점검 뒤로 미뤘다.
“아까운 건 그 열두 병뿐이 아니에요.” 미정이 말했다. “원인 모르는 채 다시 만들면 다음 예순 병이 전부 같은 질문을 받습니다.”
보리는 해진을 작업장 밖에서 만났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따뜻한 물병을 내밀었다. 보리가 받지 않자 “안 마셔도 됩니다”라며 병을 벤치에 놓았다. 그녀는 겨우 입을 열었다. “씨를 남기는 사람은 나라고 놀렸는데, 기계가 더 위험할 줄은 몰랐어요.”
“그때 저는 판매용 작업을 안 했죠.”
“맞아요. 저도 지금 웃길 일 아닌 거 알아요.”
“농담으로 넘기려는 게 아니라, 당신이 적어 둔 작업표가 있잖아요. 그걸 보면 어디서 시작됐는지 찾을 수 있습니다.”
보리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해진이 어깨를 잡지 않은 것이 고마웠다. 도움은 물병보다도 출입문을 막지 않는 태도에 있었다.
점심이 지나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박 여사가 찾아왔다. “우리 집 과육 들어간 병이래?”
“다섯 집 혼합 배치예요. 지금은 원물 탓이라고 말할 근거가 없어요.” 보리가 답했다.
“밖에 ‘흠과 때문에 쓴맛’이라고 나가면?”
“그렇게 쓰지 않겠습니다. 오늘 확인된 건 이 배치의 맛 이상과 씨 제거기 칼날 마모 가능성입니다. 어느 포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검사 뒤에 말할게요.”
박 여사는 조금 안도했지만 완전히는 아니었다. 라벨에 다섯 코드가 있는 한, 문제가 생기면 다섯 집 모두 손님 앞에 선다. 보리는 그 책임을 공동이라는 말로 가볍게 하지 않기로 했다.
오후에 미정과 보리가 현장 보관표본을 확대경으로 다시 살피자, 열두 병 중 두 병의 표본에서 씨 조각으로 보이는 미세한 파편이 나왔다. 외부 정밀검사 결과는 아직 없었고, 파편의 성분이나 발생 지점을 확정할 수는 없었다. 다른 열 병에서 보이지 않았다고 그 열 병만 팔 수는 없었다. 모두 같은 도구와 가열 배치에 속했다. 미정은 열두 병 전량을 판매금지 폐기 목록으로 옮겼다. 보리는 하나씩 숫자를 읽고 옥순은 재료비와 병값, 라벨값, 작업시간을 적었다. 잃은 돈을 아무도 숨기지 않았다.
“그럼 마흔여덟은?” 옥순이 물었다.
보리는 다른 선반의 기록을 다시 맞춰 보았다. 그 배치는 전날 손질했고 씨 제거기 칼날도 별도로 확인한 뒤 처리했다. 투입한 원물과 도구 세척기록, 보관표본이 열두 병 로트와 분리돼 있었다. 미정은 최종 확인을 마친 뒤에야 출고선으로 옮겼다.
“이렇게 한 번에 열두 병씩 버리면 장사를 못 해.” 옥순이 말했다.
“그래서 다음부터 도구를 열두 병마다 멈추자는 게 아니에요.” 미정이 칼날을 보였다. “몇 시간을 썼느냐보다 얼마를 처리했느냐를 기록해야 해요. 과육 상태에 따라 마모가 다를 수 있으니, 정한 중량에 도달하면 상태를 확인하고 교체해야죠.”
옥순이 낮게 말했다. “내가 아까 한 병만 보자고 한 거, 장부에는 안 적어도 된다.”
보리는 펜을 내려놓았다. “그 말은 적지 않아도 돼요. 대신 지금 열두 병을 폐기하기로 다 같이 정했다는 건 적어요.”
“내가 반대한 것도?”
“결정에 동의하셨잖아요. 아깝다는 마음은 우리 모두 같고요.”
박 여사가 빈 병상자를 접었다. “오늘은 한 병도 덜 아깝게 버릴 방법은 없네.”
“다음에 같은 열두 병을 안 버리는 방법은 만들 수 있어요.” 보리가 대답했다.
미정은 새 칼날을 끼운 뒤 시험 원물만 소량 처리했다. 기계가 멈췄을 때마다 칼날 상태와 처리중량을 기록했다. 검사를 통과하지 않은 시험분은 판매분에 합치지 않았다. 보리는 기존 마흔여덟 병의 배송표를 다시 썼다. 예순 병을 기대한 거래처에는 부족한 열두 병과 실제 보낼 수 있는 양을 알렸다. 일부는 기다리겠다고 했고, 한 곳은 진열칸을 줄였다. 그 빈칸은 장부에 남았다.
저녁에는 해진이 물병을 찾으러 왔다. 보리는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빈 병을 건넸다. “오늘 관측은요?”
“비가 안 왔습니다. 하지만 제가 오는 길에 비가 안 왔다고 내일도 안 온다고 쓸 수는 없죠.”
“씨도 그렇게 쓰겠습니다. 두 병에서 발견됐고, 열두 병은 같은 배치라 버렸다고. 다른 마흔여덟은 기록으로 분리했다고.”
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할 일이 없네요.”
“있어요. 저녁 먹고 가세요. 미정 씨가 씨 없는 빵을 구웠대요.”
미정이 문 안에서 소리쳤다. “그 빵도 제가 먼저 확인했습니다!”
보리는 웃었다. 쓴맛 난 열두 병을 버린 날에도 웃을 수 있다는 게 이상했지만, 웃음이 폐기기록을 지우지는 않았다.
조합 휴대전화가 그때 울렸다. 한 거래처가 예순 병 납품 확인서를 먼저 써 놓았다고 했다. 열두 병을 빼면 자기 매대 사진을 다시 찍어야 한다며, 농가 과육에 문제가 생긴 것이냐고 물었다. 보리는 통화 내용을 스피커로 돌리지 않고 조용한 곳으로 갔다. “현재 확인된 건 씨 제거 도구를 쓴 한 배치의 품질 문제입니다. 원물 불량으로 확인한 적은 없습니다. 열두 병은 출고 전 폐기하고, 다른 로트 마흔여덟 병은 기록을 확인해 보내겠습니다.” 상대는 이미 만든 홍보 문구를 고쳐야 한다며 불평했다. 보리는 추가 발송일을 지어내서 달래지 않았다. 대신 오늘 보낼 수 있는 수량과 다음 생산 검수 뒤 다시 제안할 날짜를 따로 적어 보냈다.
전화를 끊자 박 여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집 과일 잘못이라고 한 거 아니지?”
“아니에요. 확인한 그대로 말했어요.”
“그럼 장부에 버린 값은 누구 집에서 빼?”
보리는 잠깐 망설였다. 그 질문은 씨 조각보다 오래 남을 수 있었다. 원물 매입 뒤 공동주방 장비에서 생긴 문제를 다섯 농가의 원물대에서 자동으로 빼면, 다음에는 누구도 흠과를 내놓지 않을 것이다. 보리는 미정과 옥순을 불러 폐기 비용을 원물대와 분리해 적었다. 장비 점검을 소홀히 한 책임이 구체적으로 확인되면 그때 다시 볼 수 있지만, 지금 농가 대금부터 깎을 근거는 없었다. 옥순은 처음에는 통장 잔액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박 여사가 조용히 “내 몫을 먼저 깎으면 다음번엔 포장 전 원물을 그냥 내가 버릴 거야”라고 하자 펜을 들었다.
“그럼 폐기비는 주방 시험손실로 적자. 내가 싫다고 했다는 말도 남겨.”
“싫었던 건 모두 같아요.” 미정이 말했다. “그래도 원인과 다른 사람한테 청구하지 않기로 한 거죠.”
박 여사는 자기가 가져온 병상자를 다시 펴 마흔여덟 병용 칸막이를 만들었다. 손해를 분담하기로 결정한 뒤에야 손이 움직인 것이다. 보리는 그 모습을 보며 내일 가격표 회의가 더 어려워질 것을 알았다. 노동시간, 원물량, 장비손실이 각자 다른 이름을 가졌기 때문이다.
작업대에는 새 칼날의 처리중량 칸이 생겼다. 다음 병에서 확인할 것은 단순히 맛이 아니라, 그 맛을 만들던 도구가 어디까지 일했는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