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미래 하드SF 재난극 37화

라그랑주 5의 유언

준비금의 문턱

준비금 관리실 바닥에는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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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금 관리실 바닥에는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사람이 넘지 말라는 선이 아니었다. 벽을 가득 채운 자금 흐름표에서 약정 하한을 바닥까지 끌어 내린 빛이었다. 진아리가 발을 옮길 때마다 붉은 선이 작업화 앞코를 잘랐다. 선 위쪽에는 대피선 수동키 제작비, 흡착통 교체 작업비, 외벽 노동자 재검진비가 흰 글씨로 떠 있었다.

세 항목 가운데 하나만 승인해도 잔액 막대가 붉은 선에 닿았다. 셋을 모두 올리면 선 아래였다.

“시험용 키는 만들었습니다.” 진아리가 말했다. “실제 이백삼십이 석 출항잠금에 맞춘 부품은 아직 안 만들었어요. 백팔십팔 석 금융봉인은 그 키로 열 수도 없고요.”

주민석 뒤에서 누군가 혀를 찼다. 전날 시험대에서 난 철컥 소리가 벌써 실제 배의 문을 연 것처럼 퍼진 모양이었다.

진아리는 시험대 사진을 지우고 실제 대피선 상태를 띄웠다.

현재 절차 가능 232. 금융봉인 188. 안전 귀환용량 370.

서로 다른 세 숫자 아래에 같은 문장이 붙었다.

`지출 승인 대기.`

이반 노는 붉은 선 건너편에 서 있었다. 감사석에서 입던 재킷 대신 구김 많은 작업복을 입었지만, 양손은 여전히 빈틈없이 맞잡혀 있었다.

“그 지출을 올리면 준비금 등급이 한 단계 더 내려갑니다.” 그가 말했다. “대피선 담보권자는 추가 담보를 요구할 수 있고, 거주지 납품업체들은 선결제를 요구할 겁니다. 열쇠 하나 만들려다 산소막 재료와 배양조 영양염이 끊길 수 있어요.”

리오 박이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이가 부딪치는 소리였다.

“열쇠 하나가 아니라 사람 이백삼십이 명의 출항 대체수단입니다.”

“그 이백삼십이 명이 떠나기 전까지 천 명 넘는 사람이 여기서 숨 쉽니다.”

“그래서 숨 쉬는 통도 같이 올렸잖습니까.”

두 사람 사이에 소피아 리의 얼굴이 켜졌다. 지구 공동조정실에서 연결된 화면이었다. 왕복 지연을 감안해 그녀의 말 끝마다 짧은 공백이 생겼다. 공백 속에서 누구도 대신 대답할 수 없었다.

“준비금을 지키자는 주장과 쓰자는 주장을 구호로 만들지 맙시다.” 소피아가 말했다. “지금부터 실제로 빠져나갈 돈을 시간순으로 보겠습니다.”

권도한이 지급 대기열을 열었다.

가장 위에는 부상자 치료비가 있었다. 그 아래에 외벽 노동자 예순세 명의 추가 검진비, 흡착통 설치와 검수 인건비, 수동키 실물 제작과 교대 교육비가 놓였다. 더 아래에는 사고 이전에 의결된 재단 배당금과 조기 투자환급금이 있었다.

그런데 전송 시각은 아래쪽이 더 빨랐다.

배당 묶음 전송까지 십칠 분.

리오가 화면 앞으로 걸어갔다. “다친 사람 돈은 심사 중이고, 배당은 자동으로 나갑니까?”

이반이 대답했다. “배당은 이미 의결됐습니다. 지급을 멈추면 계약 위반입니다.”

“감압 때 치료비를 멈춘 것도 계약이었죠.”

“그 판단이 잘못됐다고 모든 계약을 동시에 깨자는 겁니까?”

리오는 주먹을 쥐었지만 이번에는 탁자를 치지 않았다. 배당 수취인 가운데에는 전날 공개석에서 아이의 계약서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던 여자도 있었다. 이반과 같은 줄에 이름이 놓였다고 같은 책임을 지는 사람은 아니었다.

도한이 수취인 이름을 가리고 금액 구간만 남겼다. “누가 받는지를 보고 멈출지 정하지 않습니다. 어떤 성격의 지급인지 봅니다.”

“그러면 더 간단하군요.” 리오가 말했다. “사람을 살리는 지출부터.”

소피아는 고개를 젓지 않았다. 그렇다고 동의하지도 않았다.

“그 말대로라면 준비금이 바닥난 뒤 치료비를 받을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관리실이 조용해졌다.

벽 너머 냉각모선이 낮게 울었다. 진아리는 시험대에서 키를 돌릴 때보다 이 소리가 더 불편했다. 기계는 조건이 맞지 않으면 걸쇠가 움직이지 않았다. 돈은 조건을 정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같은 숫자로 사람을 살리기도, 기다리게 하기도 했다.

소피아가 준비금 약정 원문을 띄웠다. 한쪽에는 자산비율 조항, 다른 쪽에는 운영자 책임 지출순서가 있었다.

“하한을 지키라는 조항은 있습니다. 하지만 하한 아래로 내려갔다고 모든 돈이 담보권자에게 먼저 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발생한 피해 지급, 추가 피해를 막는 비용, 필수 운항비가 배당과 투자환급보다 앞섭니다.”

이반이 곧바로 말했다. “수동키는 필수 운항비가 아닙니다. 아직 출항명령도 없습니다.”

진아리는 주머니에서 시험 키의 모형 한 조각을 꺼냈다. 날이 무딘 금속은 손바닥보다 작았다.

“태양통신이 끊긴 뒤 만들면 늦습니다. 출항명령이 난 다음 교육해도 늦고요. 어제 암전 시험에서 첫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실패한 시간을 줄이는 비용입니다.”

“재단 승인체계를 우회하는 비용이기도 하죠.”

“이백삼십이 석 출항잠금의 비상 대체입니다. 금융봉인 해제가 아닙니다.”

진아리는 말을 마치고 금속 조각을 붉은 선 위에 놓았다. 작은 조각의 그림자가 선 아래까지 내려갔다.

소피아가 물었다. “흡착통은 이미 보급선에서 받지 않았습니까?”

“열네 세트는 받았습니다.” 진아리가 답했다. “계량과 단기 반응시험은 끝났지만 실제 생명유지 묶음에 넣으려면 장착 프레임을 바꾸고 지속부하를 다시 걸어야 합니다. 창고에 쌓아 두면 안전용량은 삼백칠십이 아니에요.”

벽의 숫자가 즉시 바뀌었다.

장착 전 운용용량 356.

장착·지속시험 완료 시 370.

리오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삼 톤의 비료를 내주고 얻은 열네 명분이 아직 숫자 속에만 걸려 있었다.

“검진비는요?” 이반이 물었다. “예순세 명 전원이 고선량 환자로 확정된 것도 아닙니다.”

도한이 답했다. “그래서 검진이 필요합니다. 좌석을 주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치료가 필요한 몸을 가리기 위해서요.”

이반은 붉은 하한선을 보았다. “셋을 다 승인하면 추가 담보 요구가 옵니다. 백팔십팔 석을 되찾기는 더 어려워집니다.”

“안 쓰면요?” 소피아가 물었다.

“등급을 유지할 시간을 법니다.”

“무엇을 위해?”

처음으로 이반의 대답이 늦었다.

배당 묶음 전송까지 십이 분.

그는 관리실 벽에 떠 있는 거주지 단면도를 보았다. 농업링, 주거링, 대기설비실, 도킹링이 얇은 빛줄기로 이어져 있었다.

“이 거주지를 닫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주민석에서 욕설이 나왔지만 이반은 피하지 않았다.

“지수가 오르면 준비금이 줄고, 준비금이 줄면 담보와 보험료가 오릅니다. 납품이 끊기고 대피선까지 묶입니다. 나는 그 연쇄를 막으려 했습니다.”

리오가 한 걸음 다가갔다. “그래서 압력이 떨어진 사십사 초를 없앴습니까?”

“거주지 전체가 사고시설로 분류되는 걸 막으려 했습니다.”

“다친 사람도 거주지의 일부입니다.”

이반의 입가가 떨렸다. “알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도한이 둘 사이에 손을 들었다. “동기는 들었습니다. 지금 확인할 것은 선택입니다. 집을 지키려 했다는 말이 지수를 거짓으로 낮춘 책임을 없애지는 않습니다.”

그는 이반에게 관리 권한 화면을 돌렸다. 배당 전송 중지에는 재단 운영책임자의 확인이나 조정관의 지급분쟁 표지가 필요했다.

“직접 멈추시겠습니까?”

이반은 손을 들지 않았다.

십 분.

주민석 앞줄에서 아이를 데려왔던 여자가 일어났다. 오늘도 접힌 계약서를 들고 있었다.

“배당에 제 돈도 있습니까?”

도한은 이름을 열어 보지 않았다. “있을 수 있습니다.”

“멈추면 돌려받지 못합니까?”

소피아가 화면 너머에서 답했다. “없애는 결정이 아닙니다. 피해·안전 지출의 범위를 확인할 때까지 순서를 뒤로 미루는 겁니다. 결과에 이의할 권리도 남습니다.”

여자는 계약서를 펼쳤다가 다시 접었다. “어제는 우리 좌석이 뒤로 갔습니다. 오늘은 돈도 뒤로 가네요.”

리오는 변명하지 못했다.

여자가 붉은 선 위의 금속 조각을 가리켰다. “그걸 만들면 내 아이가 타는 자리가 열립니까?”

“아니요.” 진아리가 말했다. “금융봉인된 자리는 못 엽니다. 이미 절차에 들어갈 수 있는 자리도 통신이 끊기면 출항잠금이 남는데, 그때 손으로 대체할 방법을 만드는 겁니다.”

“그럼 우리한테 당장 오는 건 없군요.”

“검진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옵니다. 흡착통을 달면 열네 명이 더 끝까지 숨 쉴 수 있습니다. 다만 누구 자리인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어요.”

여자는 오래 붉은 선을 내려다봤다.

“내 돈을 포기한다고는 안 하겠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도한이 말했다.

“대신 저 돈이 나가기 전에, 왜 먼저 나가는지 보여 주세요.”

여자는 주민석에 다시 앉았다. 동의도 양보도 아니었다. 순서를 숨기지 말라는 요구였다.

배당 묶음 전송까지 칠 분.

이반의 손이 마침내 움직였다. 그러나 확인칸이 아니라 거부칸 위에서 멈췄다.

“내가 멈추면 재단은 책임을 인정한 것으로 쓸 겁니다.”

도한이 말했다. “멈추지 않으면 주민은 무엇으로 읽겠습니까?”

“나를 협박하는 겁니까?”

“선택 시각을 기록하는 겁니다.”

이반은 끝내 손을 내렸다.

소피아가 공동조정 표식을 활성화했다. 화면 가장자리에 푸른 테두리가 생겼다.

“운영자 책임 준비금의 지급순위 분쟁을 접수합니다. 배당과 조기 투자환급은 심사 종료까지 정지. 이미 접수된 치료비는 유지. 수동키 제작, 흡착통 장착, 예순세 명 재검진은 추가 피해 방지 항목으로 우선 집행합니다.”

가온이 확인을 읽었다.

“배당 전송 정지. 안전지출 세 항목 승인. 준비금 예상 잔액은 약정 하한 아래입니다.”

붉은 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잔액 막대가 그 아래로 내려갔다.

누구도 박수치지 않았다.

진아리는 금속 조각을 집어 들었다. 이제 실제 규격으로 깎을 수 있었다. 그 대가로 관리실의 여러 계약 상태등이 녹색에서 노란색으로 바뀌었다. 농업링 영양염 납품과 산소막 재료 주문은 아직 유지됐지만, 다음 갱신 때 선결제를 요구할 수 있다는 경고가 붙었다.

“이 위험도 공개판에 올립니다.” 하진이 주민석 뒤에서 말했다. “안전비를 썼다는 좋은 문장만 남기지 마세요.”

도한은 경고 세 건을 지출 승인 바로 아래에 붙였다.

리오는 이반에게 물었다. “집을 지킨다는 게 이런 겁니까?”

이반은 노란 상태등을 보았다. “내가 두려워한 게 저겁니다.”

“우리도 두렵습니다.” 리오가 말했다. “다른 건, 두려운 값을 사람 몸에서 몰래 빼지 않겠다는 겁니다.”

공동조정 회선에 새 문서가 도착했다. 배당 정지 사실을 확인한 대피선 담보권자들의 공동회신이었다.

도한이 첫 줄을 읽었다.

`추가 담보 요구 유예 검토.`

두 번째 줄에서 그의 눈이 멈췄다.

`금융봉인 좌석 188석의 조건부 해제 협상에 응할 수 있음.`

리오가 곧바로 물었다. “열린 겁니까?”

“아니요.” 도한은 회신 시각과 발신자를 확인했다. “협상할 문이 생긴 겁니다.”

진아리는 대피선 상태판을 다시 보았다.

현재 절차 가능 232. 금융봉인 188.

숫자는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 아래에 처음 보는 항목이 하나 생겼다.

`담보해제 협상 — 개시 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