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야간 왕진
하지 않을 것의 목록
노영숙은 머리를 감겠다고 했다. 이유는 멀리 사는 손녀가 오후에 온다는 전화 때문이었다. 윤채영은 욕실 문 앞에 앉아 있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곧장 안 된다고 했다. 영숙은 수건을 무릎에 놓고 말했다.
노영숙은 머리를 감겠다고 했다. 이유는 멀리 사는 손녀가 오후에 온다는 전화 때문이었다. 윤채영은 욕실 문 앞에 앉아 있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곧장 안 된다고 했다. 영숙은 수건을 무릎에 놓고 말했다.
“내 손녀가 나를 보고 놀라지 않게 하고 싶어. 닷새째 머리를 못 감았어.”
“놀라기는. 엄마가 숨차다며.”
“그래서 혼자 하겠다는 게 아니라 너더러 도와 달라는 거야.”
전날 낮 이송 연습을 멈춘 뒤, 모녀는 저녁에 남은 무김치를 병에 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채영은 어머니가 무를 직접 썰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이제 같은 사람이 머리를 감겠다고 하자 위험이 먼저 보였다. 미끄러운 바닥, 따뜻한 물이 갑자기 차가워지는 순간, 젖은 수건의 무게. 채영의 머릿속에서는 늘 가장 나쁜 장면이 먼저 완성됐다. 영숙은 그 장면에서만 살고 싶지 않았다.
문하진이 방문했을 때 두 사람은 수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영숙은 하진에게 물었다.
“내 머리 감는 것도 계획서에 넣어야 하나?”
“종이에 쓰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 몸 상태를 같이 보고, 무리하지 않을 방법을 찾죠.”
오세현은 영숙이 평소와 다르게 숨이 차거나 어지럽지 않은지 확인했다. 전날보다 오래 말하면 쉬어야 했지만 대화는 분명했다. 하진은 욕실보다 거실 의자에 앉아 머리만 앞으로 숙이는 방식이 영숙에게 편한지 직접 물었다. 영숙은 의자를 시험해 보고 고개를 저었다. 목이 당겼다. 그때 김정례가 작은 대야를 들고 왔다. 정례는 돌봄의 범위에서 도울 수 있는 부분과 자신의 근무 종료시각을 먼저 말했다. 채영은 그 말이 차갑게 들리지 않았다. 정례가 오늘 맡을 수 있는 일을 알면 자기도 어떻게 도울지 고를 수 있었다.
“오후 세 시까지예요. 그 전에 천천히 하면 돼요.” 정례가 말했다.
“우리 집 미용실은 예약이 되는구먼.” 영숙이 웃었다.
세현은 두 사람이 의자를 옮기는 동안 침상 옆 한 장 계획을 펼쳤다. 전날의 연습에서 채영이 물었던 질문이 빈칸에 남아 있었다. 영숙이 나중에 피곤하거나 말을 잇기 어려워도, 지금 써 둔 뜻을 언제 어떻게 다시 확인할 수 있을까. 그 질문은 진료실 용어로만 적으면 영숙의 오늘 같은 욕망을 놓칠 것 같았다. 손녀를 맞기 위해 머리를 감고 싶은 사람이 자신의 처치를 고를 때 무엇을 우선하는지 이미 말하고 있었다.
“오늘 문서도 조금 보고 싶어요.” 세현이 말했다. “하지만 머리부터 감고 하셔도 됩니다.”
영숙이 놀란 얼굴을 했다. “의사가 문서보다 머리를 먼저 보자고 하네. 오늘은 우리 집 미용실 원장이야?”
하진이 웃었다. “원장님은 어르신이세요. 예약 시간을 정하셨잖아요.”
작은 대야를 거실로 옮기자 산소줄이 의자 다리에 걸렸다. 영숙이 바로 손을 들었다. 모두 멈췄다. 박건이 설치한 벽 고리에서 줄을 다시 정리하고, 영숙이 앉아 호흡을 고른 뒤에야 정례가 수건을 어깨에 둘렀다. 하진은 젖은 바닥을 바로 닦을 수 있게 마른 수건을 가까이 뒀다. 영숙은 두피에 물이 닿자 눈을 감았다.
“물은 어때요?” 채영이 물었다.
“조금 덜 뜨겁게. 손녀가 오면 나한테 할머니 냄새 난다고 할 거야.”
“걔는 엄마한테 비누 냄새 난다고 좋아했잖아.”
“그건 어릴 때고. 이제 친구들 앞에선 할머니가 꽃향기 나야지.”
물이 대야를 채우는 동안 영숙은 힘들면 바로 멈추겠다고 두 번 말했다. 실제로 절반쯤 감다가 숨을 골라야 했다. 채영의 손이 수건을 급히 감으려 하자 영숙이 “잠깐”이라고 했다. 젖은 머리로 기다리는 게 싫은 게 아니라, 자신의 ‘잠깐’을 딸이 끝이라는 말로 바꿀까 봐 걱정됐던 것이다. 채영은 손을 내리고 영숙이 다시 시작하겠다는 말을 기다렸다. 늦게 끝났지만 머리는 다 감았고, 정례의 퇴근시간도 넘기지 않았다.
손녀가 보낸 사진에는 노란 머리핀이 있었다. 채영이 말렸다. “이걸 꽂으면 열 살 애하고 경쟁하는 것 같아.” 영숙은 그 말을 무시하고 귀 옆에 핀을 꽂았다. 세현은 자기 옛 펜라이트를 챙기다 핀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영숙이 눈을 가늘게 뜨자 그가 말했다.
“진료기록에는 안 적겠습니다.”
“적어. 오늘 꽃처럼 생겼다고.”
“그건 진료기록보다는 손녀가 찍을 사진에 남는 편이 낫겠습니다.”
하진은 영숙이 지치기 전에 문서 한 장만 꺼냈다. 영숙은 질문을 들을 수 있지만 지금은 피곤하다고 했다. 채영이 대신 대답하려 하자 영숙이 손을 들어 막았다.
“쉬었다가 할게. 딸 입을 빌릴 만큼 멀리 간 건 아니야.”
세현은 어제 연습에서 남은 문장을 그 상태로 두었다. 오후에 손녀가 다녀간 뒤 영숙이 원하면 다시 보자고 했다. 채영은 자기 입이 너무 빨랐다는 걸 깨달았다. 어머니가 대답을 미루는 것과 대답할 수 없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그 사이에 앉아 있는 법은 아직 어려웠다.
손녀는 약속보다 일찍 왔다. 학교 가방을 든 채 현관에 서서 외쳤다. “할머니, 머리핀 나랑 똑같다!” 영숙은 침상에서 손을 흔들었다. 손녀가 가까이 와서 머리핀을 만지려 하자 영숙이 먼저 허락했다. 사진은 얼굴을 찍어도 되지만 가족 단체방에만 보내라고 했다. 손녀는 지난번 노란 헝겊처럼 천만 찍을 필요가 없느냐고 물었다. 영숙은 오늘은 얼굴을 찍고 싶다고 했다. 날마다 사진의 범위가 같은 것도 아니었다.
손녀가 가져온 귤을 까는 동안 채영은 사무실에서 온 메시지에 답했다. 며칠 전 오전 의뢰인을 넘긴 동료가 오후 자료 검토를 부탁했다. 채영은 잠시 서운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적어 보냈다. 영숙은 손녀에게만 집중하지 않고 딸의 휴대전화도 흘깃 봤다. “일도 해. 여기 사람 셋이 귤 한 봉지 못 까겠니.” 채영은 마침내 노트북을 들고 작은방으로 갔다. 문을 닫자 죄책감이 조금 올라왔지만, 바깥에서 손녀가 귤 껍질로 만든 나비를 보여 달라고 소리치는 걸 듣고 웃었다.
손녀는 귤껍질 나비를 할머니 침상 머리맡에 붙여 주겠다고 했다. 영숙은 거절했다. “밤에 보면 노란 벌레인 줄 알겠다.” 손녀가 입술을 삐죽이자 영숙은 귤껍질을 작은 접시에 올려 창가에 두었다. 딸이 어려서 만든 종이학을 아직 서랍에 모아 둔 사람의 거절이었다. 손녀는 더는 삐치지 않고 머리핀을 두 개 나란히 놓아 보았다. 영숙은 손녀가 내일도 들르겠다는 말을 하자 바로 약속하지 않았다. 내일은 피곤할 수도 있고, 손녀에게도 친구와의 약속이 있다고 들었다. “네가 오고 싶고 내가 보고 싶은 날, 그때 다시 전화하자.” 손녀는 처음엔 불공평하다고 했다. 영숙은 “그래서 우리 둘 다 고르는 거야”라고 했다. 손녀가 고개를 끄덕인 건 귤 두 쪽을 더 먹고 난 뒤였다.
작은방 문이 열렸다. 채영이 통화 중인 줄 알았던 손녀가 노트북 앞에 앉은 엄마를 향해 물었다. “할머니랑 나랑 있으면 엄마는 일해도 되는 거야?” 채영은 잠시 대답을 못 했다. 영숙이 대신 말했다. “네 엄마는 우리하고 같이 있고 싶어서 일을 포기한 게 아니야. 네가 친구 만나러 나가는 것처럼 저 사람도 자기 사람들 만나야 해.” 채영은 화면에 열린 자료가 자기 의뢰가 아니라 동료의 의뢰라는 말을 삼켰다. 손녀가 이해해야 할 것은 사무실의 소유권이 아니었다. 오늘 자신이 방에 들어간 것을 어머니가 버림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채영은 문을 완전히 닫지 않고 다시 자료를 읽었다.
손녀가 돌아간 뒤 영숙은 수건을 펼쳐 마른 쪽으로 접었다. 머리핀 한 개가 귤접시 밑에 남아 있었다. 손녀에게 전화를 걸자 아이는 일부러 두고 간 것이라 했다. “다음에 와서 찾아갈게.” 영숙은 내일이라고 말하지 않은 게 고마웠다. 작은 핀 하나가 다음 만남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릴 수 있었다. 하진에게 약속한 대로 문서를 다시 읽자고 했다. 세현은 ‘하지 않을 것’ 두 줄부터 펼쳤다. 영숙은 먼저 그 줄이 아직 자신의 뜻인지 말했다. 이어 ‘계속할 것’ 옆에 하나 더 적어 달라고 했다. 오늘처럼 상태가 허락하면 손녀를 맞이할 준비를 스스로 고를 것. 세현은 그 문장을 의료 처치 목록에 섞지 않고 생활 목표에 적었다.
“의식이 좀 흐린 날도 있을 텐데, 그땐 이걸 보고 내가 말할 수 없는 사람인 줄로 바로 정하지 마.” 영숙이 말했다. “피곤하면 조금 쉬게 해 줘.”
“그날그날 왜 말이 달라졌는지도 확인하겠습니다.” 세현은 답했다. “저희가 위험하다고 보는 변화가 있으면 그것도 숨기지 않겠습니다.”
채영은 작은방에서 나와 어머니가 직접 문장을 고치는 걸 보았다. 아침에는 머리를 감는 일부터 말다툼이었고, 저녁에는 어머니가 무엇을 하지 않을지뿐 아니라 무엇을 하고 싶은지 덧붙이고 있었다. 그 종이는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는 표가 아니라, 가능한 하루를 더 또렷하게 하는 약속이어야 했다.
창밖으로 바람이 불자 농축기 아래에 놓인 점검표 한 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채영이 주워 보니 대체 전원 사용시간이 빨간 펜으로 고쳐져 있었다. 예전에 듣던 시간보다 짧았다. 그녀는 숫자를 세현에게 보여 줬다. 그는 종이를 다시 읽고 박건에게 실제 상태를 확인하자고 했다. 영숙은 노란 머리핀을 뽑아 탁자에 놓았다.
“내일 머리핀보다 먼저 저 기계 손보러 오겠네.”
“먼저 확인할 겁니다.” 하진이 말했다.
“그럼 난 내일도 머리 감은 사람답게 손님 맞을게.” 영숙은 머리카락 끝을 만졌다. 서류에서 정한 선이 집의 전기줄과 만나는 곳을 모두가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