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미래 하드SF 재난극 36화

라그랑주 5의 유언

원격잠금의 열쇠

진아리는 실제 대피선에 손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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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아리는 실제 대피선에 손대지 않았다.

현재 절차에 넣을 수 있는 이백삼십이 석의 출항승인 래치와 같은 예비품 하나를 정비창 시험대에 옮겨 놓았다. 백팔십팔 석의 금융봉인은 별도 상위 잠금이라 이 시험으로 건드릴 수 없었다. 사각 금속함 안에는 모터와 걸쇠, 원격 수신기가 들어 있었다. 의자 대신 쇳덩이를 묶어 승객 무게를 흉내 냈고, 도킹선 대신 시험 전원을 연결했다.

“개방 좌석 이백삼십이 석 출항승인 모형 수신.” 가온이 말했다.

시험대의 녹색 불이 켜졌다. 진아리는 통신선을 뽑았다.

철컥.

걸쇠가 열리는 대신 더 깊이 잠겼다.

정비창에 모인 주민 대표들이 웅성거렸다. 권도한은 시험대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었다. 실제 좌석을 열었다는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바닥에 붉은 선을 그어 두었다. 선 안에는 진아리와 운항책임자만 들어갔다.

“다시.” 진아리가 말했다.

통신선을 꽂고 승인 신호를 넣었다. 녹색 불. 다시 선을 뽑았다. 철컥. 잠금 유지.

세 번 모두 같았다.

가온이 설계 문구를 읽었다. “원격권한 상실 시 승인 좌석의 무단 출항을 방지하기 위해 잠금 상태를 유지합니다.”

진아리는 래치에 손을 얹었다. 모터가 멈춘 뒤에도 잔진동이 손바닥에 남았다.

“통신이 끊겼을 때 빈 배를 지키는 게 안전측이라면, 사람은 설계 밖에 있습니다.”

재단 법무 담당자의 얼굴이 벽 화면에 떴다. “그 장치는 탈취 방지 설비입니다. 임의 해제장치를 만들면 운항보험이 즉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주민석에서 야유가 나왔다. 도한이 손을 들자 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다.

“태양통신 장애 때 재단 승인을 받을 수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사전 승인 토큰을 배포할 수 있습니다.”

진아리가 시험대에서 고개를 들었다. “사고 때 우리 중단 명령을 덮은 것과 같은 방식입니까?”

담당자의 입이 굳었다.

“별도 정책입니다.”

“그래도 지구에서 만든 토큰이고, 여기 사람이 내용 전부를 볼 수 없죠.”

도한은 논쟁을 끊었다. “사전토큰만으로 가지 않습니다. 오프라인 수동대체안을 시험합니다. 운영선에는 아직 적용하지 않습니다.”

진아리는 래치 덮개를 열었다. 안쪽에는 제조사가 정비용으로 남긴 작은 축이 있었다. 평소에는 봉인판 아래 가려져 모터를 떼어 낼 때만 쓰는 부분이었다. 축을 일정 각도로 돌리면 전원 없이도 걸쇠가 물러났다. 하지만 시중 공구가 들어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전용 키를 만들 수 있어요.”

“누가 갖습니까?” 주민 대표가 물었다.

정비창이 조용해졌다. 열 수 있다는 사실보다 그 질문이 무거웠다.

한 사람에게 주면 새 원격권한이 될 뿐이었다. 누구나 쓸 수 있게 만들면 평상시 탈취와 오작동 위험이 생겼다. 아리는 키 모형을 화면에 그리다 멈췄다.

“두 조각으로 나눕니다.”

운항책임자가 시험대 가까이 왔다. “둘을 합쳐야 축이 돌아가게?”

“네. 하나는 주민이, 하나는 운항책임자가 보관해요. 통신상실과 대피 발령이 함께 확인될 때만 꺼냅니다.”

법무 담당자가 말했다. “주민 대표가 누구인지 재단 승인도 없이 정할 수 없습니다.”

리오의 목소리가 주민석 뒤에서 날아왔다. “그래서 주민이 정합니다.”

도한은 키를 만드는 것만으로 끝내지 않았다. 잘못 여는 경우를 시험대에서 먼저 만들었다. 도킹이 끝나지 않은 상태, 객실 압력이 맞지 않은 상태, 추진계가 점검 중인 상태. 그때 키를 합치면 어떤 경고가 나오는지 확인했다.

첫 모형은 너무 쉽게 돌아갔다. 진아리가 힘을 주자 경고등이 켜져도 걸쇠가 풀렸다.

“이건 안 돼요.” 그녀가 키를 내려놓았다.

주민 대표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비상시에 경고 때문에 또 못 여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도킹문이 열린 상태에서 좌석만 풀리면 사람이 통로로 몰립니다. 문이 열렸다는 것과 탈출할 수 있다는 건 달라요.”

두 번째 모형에는 기계식 확인턱을 하나 더 붙였다. 운항책임자가 도킹 상태를 수동 레버로 맞춰야만 주민 키 조각이 들어갔다. 전자 승인은 쓰지 않았다.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쪽에서 손을 뻗어야 했다.

진아리와 주민 대표가 키를 끼웠다. 운항책임자가 상태 레버를 맞췄다.

“통신 상실.” 가온이 말했다.

“대피 발령 모형 확인.” 도한이 말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돌렸다.

처음에는 움직이지 않았다. 주민 대표가 힘을 더 주려 하자 아리가 멈췄다. 키 조각 하나가 반 바퀴 덜 들어가 있었다. 다시 맞춘 뒤 돌리자, 쇳덩이를 잡고 있던 걸쇠가 천천히 물러났다.

철컥.

이번에는 잠기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 순간 시험대 옆 대피등이 꺼졌다. 누군가 숨을 들이켰다. 실제 정전이 아니라 도한이 넣은 두 번째 조건이었다. 어둠 속에서 주민 대표는 열쇠를 놓쳤고, 금속 조각이 바닥을 튕겨 붉은 선 밖으로 미끄러졌다.

“찾지 마세요.” 아리가 말했다.

비상등이 켜질 때까지 열두 초가 걸렸다. 열쇠 조각은 주민석 첫 줄 발밑에 있었다. 실제 대피 때라면 수십 개의 부츠가 그 위를 밟았을 터였다.

운항책임자가 말했다. “보관함에서 꺼내 래치까지 가져오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절차보다 손에서 안 놓치는 게 먼저예요.” 주민 대표가 손바닥의 땀을 작업복에 닦았다.

진아리는 키 조각에 짧은 손목 고리를 달았다. 그러나 목에 거는 긴 끈은 쓰지 않았다. 밀집 통로에서 걸리면 사람을 넘어뜨릴 수 있었다. 보관함에서 시험대까지 가는 바닥에는 촉각 돌기를 붙여 어둠에서도 길을 찾게 했다.

두 번째 암전에서는 키를 잃지 않았다. 대신 운항책임자가 잘못된 래치 앞에 섰다. 같은 모양의 제어함이 줄지어 있을 때 생기는 실수였다. 아리는 손으로 구별할 수 있는 홈을 키와 함 양쪽에 새겼다.

세 번째 암전이 끝났을 때, 두 사람은 빛 없이도 올바른 함을 찾아 열었다. 걸린 시간은 마흔아홉 초였다. 박수보다 먼저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권한은 설계도 한 장이 아니라 땀나는 몸이 끝까지 수행할 수 있어야 했다.

주민석에서 박수가 터졌다. 아리는 웃지 못했다. 방금 자신의 손으로 이미 개방 절차에 든 이백삼십이 석의 출항잠금을, 통신이 끊겼을 때 대신 풀 가능성을 시험했다. 금융봉인 백팔십팔 석은 그대로였고 실제 배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래도 같은 손이 잘못된 시각에 돌아가면 수백 명을 닫힌 통로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수동키는 열 권한과 잘못 열 책임을 함께 줍니다.” 도한이 말했다. “오늘 시험 보관자는 참석자 공개동의로 임시 선임하고, 실제 운용 보관자는 검증이 끝난 뒤 공개추첨으로 뽑겠습니다. 운항책임자와 같은 교대에 가족이 있는 사람은 제외하고, 사용 조건과 교체 인계도 공개합니다.”

“왜 가족이 있으면 안 됩니까?” 누군가 물었다.

“자기 가족을 먼저 태우려 했다고 의심받지 않게 하려는 겁니다. 보관자도 보호해야 합니다.”

주민 대표는 시험 키를 내려다봤다. “자유를 얻는 줄 알았는데 당직을 얻었군요.”

진아리가 대답했다. “거주지에서 자유는 대개 당직표로 옵니다.”

그 말에 짧은 웃음이 번졌다. 긴장이 조금 풀렸다.

참석자들은 방금 전 과정을 함께 수행한 주민 대표에게 다음 시험까지 임시 보관을 맡기는 데 공개동의했다. 그는 한 번 실패했으니 자격이 없다고 물러서려 했다. 진아리는 반대했다.

“실패를 숨긴 사람이면 안 됩니다. 떨어뜨린 곳과 이유를 모두가 봤고, 두 번째에는 고쳤어요.”

“실제 때 또 떨어뜨리면요?”

“그래서 교대자가 있고 반복훈련이 있습니다. 완벽한 사람을 기다리면 재단 원격키보다 나을 게 없어요.”

그는 잠시 고민하다 `시험용·한 교대`라고 적힌 보관함 인계표에 이름을 적었다. 권한을 얻은 표정이라기보다 야간 당직을 떠맡은 표정이었다. 주민들은 그 얼굴을 보고도 박수를 쳤다.

첫 모형을 깎는 데 세 시간이 걸렸다. 교대종이 울리고 야간 정비조가 들어온 뒤에야 두 번째 확인턱과 촉각 홈이 완성됐다. 실제 좌석용 키는 같은 모양으로 여러 개 찍지 않고, 주민 조각과 운항 조각을 서로 다른 재료로 만들기로 했다. 다음 교대까지 시험대에서만 열 번의 통신상실과 다섯 번의 잘못된 조건을 반복했다. 실제 대피선의 이백삼십이 석 출항잠금도, 백팔십팔 석 금융봉인도 건드리지 않았다.

마지막 시험에서 가온은 아무 판단도 하지 않았다. 상태값과 경고만 읽었다. 두 사람이 조건을 확인하고 손으로 열었다. 원격망이 없어도 래치는 풀렸다.

도한은 그 결과를 공개판에 올렸다.

봉인 해제 가정 배정계획 370. 현재 개방 절차 232. 금융봉인 188 유지. 출항승인 수동대체 시험대 통과.

재단 법무 담당자는 운항보험 중단 가능성을 다시 경고했다. 도한은 중단 여부를 확정문처럼 쓰지 말고 보험자 질의 중으로 표시하게 했다. 대신 두 교대 동안 정비조가 산출한 키 제작비와 시험비의 예비견적을 공개했다.

금속 가공, 이중 보관함, 시험용 래치, 교대 교육. 액수는 대피선 전체에 비하면 작았다. 그러나 비용 항목을 운영자 책임 준비금의 손해방지비로 올리자 상태판 색이 바뀌었다.

주민석 뒤에서 누군가 자비로 내겠다고 외쳤다. 도한은 받지 않았다. 개인 기부로 만들면 열쇠가 다시 돈을 낸 사람의 소유처럼 보일 수 있었다. 필요한 비용을 누가 먼저 냈는지까지 권한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됐다.

아리는 그 말을 듣고 두 조각의 재료표에서 기증자 이름 칸을 지웠다. 남은 것은 주민 보관과 운항 보관이라는 두 역할뿐이었다.

준비금 예상 잔액이 약정 하한 아래로 내려갔다.

이반 노가 통신으로 들어왔다. 뒤늦게 시험 소식을 들은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 돈을 준비금에서 쓰면 좌석 담보 추가 요구가 옵니다. 지금 만든 열쇠 때문에 백팔십팔 석을 영영 잃을 수 있어요.”

진아리는 시험대 위 두 조각을 바라봤다. 열쇠 하나를 만들면 문이 열릴 줄 알았다. 실제로는 비용, 담보, 책임이 한꺼번에 그 문 앞에 섰다.

도한이 준비금 화면을 주민석 쪽으로 돌렸다.

“그러면 다음에 정할 것은 열쇠가 아니라 돈의 우선순위입니다.”

시험대의 래치는 열린 채였다.

이백삼십이 석 출항잠금의 수동대체는 아직 시험대에만 있었고, 실제 대피선의 백팔십팔 석 금융봉인도 여전히 잠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