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료·완화의료 휴먼극 36화

열세 번째 야간 왕진

돌아오는 선택

접이식 들것이 노영숙의 집 현관에 들어온 날, 아래층 반찬가게 아줌마가 무 세 단을 들고 올라왔다. 누구도 구급차를 부르지 않았고 영숙의 숨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복도에 놓인 들것은 한눈에 응급 상황처럼 보였다. 아줌마가 무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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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이식 들것이 노영숙의 집 현관에 들어온 날, 아래층 반찬가게 아줌마가 무 세 단을 들고 올라왔다. 누구도 구급차를 부르지 않았고 영숙의 숨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복도에 놓인 들것은 한눈에 응급 상황처럼 보였다. 아줌마가 무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영숙 언니, 어디 아파서 가?”

“무가 먼저 들어와야 내가 깍두기를 담지.” 영숙이 답했다. “이건 오늘 사람 태울 물건 아니야.”

문하진이 들것을 벽 쪽으로 옮겼다. 보건소 교육용 장비를 빌려 왔다는 설명을 들은 아줌마는 민망해하며 무 한 단을 놓고 돌아갔다. 복도는 다시 조용해졌지만, 윤채영은 들것이 문 앞에 있는 것만으로 심장이 빨리 뛰었다. 며칠 전 어머니가 숨을 몰아쉬던 밤, 자신이 여행가방 손잡이를 놓지 못하던 감각이 손바닥에 돌아왔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채영이 물었다.

“싫으면 지금 멈출 수 있어.” 영숙은 딸보다 하진을 봤다. “내가 하자고 한 거야. 내가 병원 가자고 말했다가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잖아. 그때 너희가 내 말을 들을지 보고 싶어.”

하진은 오늘 실제 이송을 부르거나 누군가를 들것에 눕힐 생각이 없다고 확인했다. 현관에 가방과 요약문을 어떻게 챙길지, 영숙이 지금의 뜻을 다시 말하고 싶을 때 어느 사람이 듣는지 말로 맞춰 보는 날이었다. 영숙은 주방에서 무의 푸른 잎을 먼저 잘랐다. 채영은 칼을 내려놓으라고 했지만 영숙은 “손목이 힘든 날에는 내가 먼저 말할게”라고 했다. 무김치가 꼭 오늘 완성돼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부엌에서 맡을 수 있는 작은 몫을 빼앗기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오세현은 접은 여행가방을 현관에 놓았다. 가방 안에는 전날 보낸 한 장 응급요약의 사본과 영숙이 직접 고른 손수건, 충전기가 있었다. 꽃무늬 슬리퍼는 현관에 그대로 뒀다. 영숙은 잠시 복도 밖을 보더니 말했다.

“만약 내가 저 가방을 들고 나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올래’ 하면?”

“그때 어르신의 상태와 말씀을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세현이 말했다. “이미 출발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대로 밀고 가지 않겠습니다. 반대로 지금 위험한 변화가 있는데 아무 이유 없이 괜찮다고만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 내 말은 언제 듣는데?”

“가장 먼저요.” 하진이 대답했다. “그리고 왜 바뀌었는지 어르신이 설명하실 수 있으면 듣고, 저희가 보는 상태를 따로 말씀드릴게요.”

채영은 어머니에게 이미 그 말을 여러 번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손 앞에 실제 들것이 놓이자 문장이 다르게 들렸다. 종이 위에서 철회는 깔끔한 한 줄이었지만, 복도에서는 누군가를 불러 놓고 다시 돌려보내야 하는 일이었다. 그 사람들이 화를 낼까, 나중에 정말 필요할 때 늦게 올까. 채영은 모르는 것이 많았다.

“내가 전화하고 나서 엄마가 바뀌었다고 하면, 내가 괜히 불렀다고 혼날 것 같아.” 그녀가 말했다.

영숙은 무 잎을 내려놨다. “그럴 수 있지. 내가 미안하다고 말할게. 네가 미안하다고만 하지는 마.”

세현은 어떤 변화가 있어 연락했는지, 연락 뒤 영숙이 현재 무엇을 원한다고 말했는지를 따로 전하면 된다고 말했다. 누군가의 꾸지람을 막아 줄 수 있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다. 하진은 채영이 처음 느낀 두려움과 실제로 연락해야 할 변화를 혼동하지 않도록, 가방 위에 붙인 작은 카드의 문장을 영숙과 함께 읽었다. 영숙은 ‘취소’라는 말 대신 ‘내 계획을 다시 읽어 주세요’라고 말했다.

첫 번째 연습은 문턱에서 끝났다. 가방을 드는 사람을 정하자 채영이 손을 들었고, 영숙이 자기 손수건만은 직접 집어 들겠다고 했다. 손수건은 병원에서 누군가가 준 것이 아니라 남편과 바닷가에 갔을 때 산 것이었다. 손에 쥐자 오래된 비누 냄새가 났다. 채영은 그 냄새 때문에 잠시 아버지가 현관에서 신발을 찾던 아침을 떠올렸다. 집을 떠나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검사 기록뿐이라고 생각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채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날 가족 단체방에 보낸 ‘내일 이송 연습을 해 볼 예정’이라는 말을 읽은 사촌이었다. 사촌은 병원 이름을 묻더니 ‘엄마들끼리 연락망을 만들어 줄게’라고 했다. 채영은 좋은 뜻인 줄 알면서도 어머니가 이 사실을 어디까지 알리고 싶은지 물은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영숙에게 전화기를 건넸다. 영숙은 사촌의 안부를 받고는 똑똑히 말했다. “오늘은 안 간다. 진짜 가게 되면 내가 연락할 사람은 내가 정하마. 네 엄마한테는 무김치가 다 됐다고나 전해.” 사촌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통화를 끊고 영숙은 채영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내 몸이 동네 방송이 되면 다음에는 너한테도 말을 아낄 거야”라고 했다. 채영은 단체방에 보낸 한 줄을 지우지 않았다. 이미 읽은 사람을 다시 모르게 할 수 없었다. 사실을 바로잡되 새 자세한 이야기는 더하지 않았다.

“그 말이 너무 길면?” 채영이 물었다.

“그럼 손을 들지.” 영숙이 손을 들었다. “이만큼은 할 수 있겠어.”

세현은 손짓만으로 뜻을 다 알아들었다고 여기지 말자고 했다. 하진이 다시 묻자 영숙은 자기 말로 답했다. 들것을 현관에 가져온 상황 자체를 되돌리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 이동 여부와 그 뒤 도움을 다시 고르고 싶다는 뜻이라고. 채영은 어머니가 지금은 또렷하게 설명한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며칠 전 밤처럼 피곤하고 숨찬 때에도 이만큼 말할 수 있을지는 몰랐다.

문밖에서 벨이 두 번 울렸다. 아까 반찬가게 아줌마가 무 두 단을 더 가져온 것이었다. “아까 들것 때문에 한 단만 놓고 갔더니 양이 모자랄까 봐.” 영숙은 웃으며 무를 들여오게 했다. 아줌마는 접힌 들것을 힐끗 보았다.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진이 물건을 치우자 복도에서 누군가 신발을 끌고 가는 소리가 들렸다. 영숙은 현관문을 닫고 채영에게 속삭였다.

“동네에 죽을 사람이 생겼다는 소문은 막아 줘.”

“내가 아랫집에 말할게.”

“내가 말할 거야. 저녁에 무 나눠 주면서.”

영숙에게는 병원으로 가는 길을 정하는 일만큼 집에 돌아와 살 사람으로 보이는 일도 중요했다. 채영은 더는 대신 전화하겠다고 하지 않았다. 아랫집에 줄 작은 통을 씻었다.

연습을 한 번 더 하자 영숙은 예상과 다르게 움직였다. “이제 가자”고 말해 놓고 가방을 건네받았는데, 복도 끝의 낡은 우산을 보더니 멈춘 것이다. 아버지가 쓰던 우산이었다. 채영은 어머니가 왜 그 우산을 보는지 알고 싶었다. 영숙은 “병원에 갔다 돌아오면 저걸 버릴까 봐”라고 했다. 채영은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집을 비우면 오래된 물건부터 정리해야 한다고 스스로 말했던 게 떠올랐다.

“그 우산은 안 버릴게.” 채영이 말했다.

“내가 없을 땐 네가 버릴 수 있지.”

“그래. 그때는 내가 결정하겠지. 하지만 지금은 엄마가 여기 있잖아.”

영숙은 가방을 내려놓았다. “내 계획을 다시 읽어 줘.”

하진은 짧게 읽었다. 지금은 영숙이 직접 말할 수 있고, 장소와 처치에 대한 뜻을 다시 확인한다고. 영숙은 오늘 연습을 여기서 멈추고 부엌에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세현은 영숙의 숨과 말의 길이를 살폈다. 오늘은 실제 악화가 없는 낮이었고, 연습을 더 할 이유도 없었다. 가방은 현관에, 들것은 다시 접혀 보건소로 돌아갔다.

채영은 무를 썰면서 물었다. “진짜로 갑자기 숨이 차면 그때도 이렇게 멈출 수 있을까?”

“모르지.” 영숙이 말했다. “그러니까 너희가 내 말을 한 번 더 듣기로 한 거야.”

“못 말하면?”

영숙의 칼이 멈췄다. 낮 연습 내내 말할 수 있었기에 가려져 있던 질문이었다. 하진은 이미 적어 둔 선택표를 가리키며, 그때의 상태를 보는 사람과 영숙이 이전에 분명히 말한 뜻을 전달하는 사람이 각자 무엇을 맡을지 더 구체적으로 정해야 한다고 했다. 영숙은 오늘 당장 또 문서를 쓰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모두 그 뜻을 받아들였다.

그날 저녁 반찬가게 아줌마는 무김치 통을 들고 내려가는 영숙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언니, 아까 어디 안 가?”

“가기는. 당신한테 무 돌려주러 왔지.”

“무를 줬는데 왜 돌려줘?”

“김치로 돌아왔잖아.”

아줌마가 웃었다. 영숙은 통을 건네고 스스로 계단 한 칸을 내려갔다. 채영은 뒤에서 따라가되 팔을 잡지 않았다. 영숙이 멈춰 숨을 고르면 함께 멈췄다. 돌아온다는 말은 병원 문에서만 쓰는 말이 아니었다. 오늘 영숙은 자기 발로 아래층까지 갔다가, 남은 무 두 단의 냄새를 맡으며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에 돌아오자 사촌에게서 또 메시지가 와 있었다. ‘고모가 직접 연락할 때까지 기다릴게. 무김치 사진은 보내도 돼?’ 채영은 웃으며 영숙에게 화면을 보였다. 영숙은 김치통 뚜껑이 제대로 닫힌 사진을 골랐다. 침상도, 기계도, 복도의 들것도 찍히지 않은 사진이었다. “이건 보내. 덜 익었다고 하면 다음 주에 와서 맛보라 그래.” 채영은 사진을 보냈다. 답장은 금방 왔다. 사촌이 ‘고모 김치 앞에선 내가 늘 져’라고 했다. 영숙은 그걸 읽고 내년에도 이겨야겠다고 했다가, 내년이란 말에 잠깐 멈췄다. 채영은 약속할 수 없다고 고치지 않았다. “올해 건 너무 짜니까 이번 승부는 엄마가 진 걸로 해.” 영숙이 손등으로 딸 팔을 툭 쳤다. “그제 소금 모자랐다고 네가 두 숟갈이나 더 넣었거든.” 채영은 자기 짓이라고 인정했다. 둘은 한 조각씩 맛보고 물을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