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상업 미스터리 36화

의주대로의 붉은 매듭

꽃잎 없는 문서

한매화가 장롱을 열자 먼지보다 먼저 말린 쑥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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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매화가 장롱을 열자 먼지보다 먼저 말린 쑥 냄새가 났다.

장롱 아래 칸에는 베개 한 채, 겨울 솜옷 두 벌, 그리고 대나무 상자 하나가 있었다. 매화는 오라비가 떠난 뒤 상자를 세 번이나 열어 보았다. 볼 때마다 돈 받을 사람이 남긴 쪽지나 갚아야 할 외상표가 나왔다. 오늘 꺼낼 것은 그보다 오래된 문서였다.

“이걸 왜 아직 갖고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매화는 상자 바닥에 붙은 종이를 조심스럽게 떼었다. 집 뒤쪽 좁은 밭을 팔 때 주고받은 매매쪽지였다. 한덕수가 글을 모르던 것은 아니지만 제 이름을 정자로 쓰면 오래 걸린다며 끝마다 같은 꺾임을 그렸다.

“오라비는 빨리 쓰려다 이걸 만들었죠. 매매할 때 상대가 웃었어요. 닭이 벼슬 세우고 도망가는 그림 같다고.”

맞은편에 앉은 허만복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객주 주인은 이틀 내내 매화가 길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면서도 쪽지를 보자 첫마디가 농담이었다.

“그 닭 때문에 내 장부를 얼마나 다시 썼는지 압니까. 덕수는 자기 표라 우기고 나는 닭발이라 우기고.”

매화는 웃지 않았다. 종이 끝의 묵은 먹빛을 손가락으로 짚고 나서야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민연화는 가져온 푸른 소매를 두 사람 사이에 놓았다. 나루에서 건진 날 젖은 천을 마른 받침에 펴 둔 뒤, 수결이 있는 안단만 접어 따로 가렸다. 천의 열일곱 획과 한 점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누가 무슨 뜻으로 긁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겹쳐 볼까요?”

연화가 묻자 매화가 고개를 저었다.

“천을 바짝 말렸어도 안단에는 물기가 남았을지 몰라요. 종이를 대지 말고 나란히 두죠.”

매화는 작은 짚자리를 펴고 두 물건을 올렸다. 한쪽은 밭을 팔던 날의 종이, 한쪽은 길에서 뜯겨 나온 옷이었다. 잃어버린 사람을 두 물건 사이에 가두는 기분이 들어 손이 잠깐 멈췄다.

연화는 곧바로 같다고 말하지 않았다. 두 표식 모두 가운데가 꺾여 있고 끝이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소매 쪽은 짧고 옆으로 기울었다. 비바람에 젖은 섬유에 먹이 스민 탓일 수도, 다른 손이 그린 탓일 수도 있었다.

“오라비가 급할 때는 더 삐뚤어요.”

매화가 말했다.

“급했다는 건 어떻게 압니까?”

“모릅니다. 내가 닮은 데를 찾다 보니 그런 말이 나와요.”

매화가 자기 말을 먼저 거두자 연화는 더 쉽게 질문할 수 없었다. 만복이 오래된 매매쪽지를 들었다.

“이날 쓴 것을 내가 봤소. 밭 산 쪽에도 한 장이 남아 있을 겁니다. 두 장을 맞추면 적어도 이 쪽지의 손은 확인할 수 있어요.”

“그 사람에게 다시 찾아가야겠군요.”

“내가 가겠습니다.”

매화가 손을 들었다. 이틀 전에는 광산으로 달려가겠다고 하던 손이었다. 오늘은 한양 안에서 증인을 만나겠다고 했다. 연화가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만복은 그제야 다른 종이를 꺼냈다. 식솔들에게 빈방을 마련해 주겠다는 약조를 받아 적은 종이였다. 매화가 두 집을 돌며 받은 답이었다. 한 집은 방 한 칸을 내주겠다고 했고, 다른 집은 아궁이를 공유하겠다고 했다. 둘 다 돈 이야기가 뒤에 붙었다.

“돌아오는 사람이 몇인지도 모르는데 방세부터 내라네요.”

“방 주인은 돌아올 사람이 아예 없을까 봐 걱정하는 겁니다.”

만복의 말에 매화가 얼굴을 굳혔다. 그는 곧 말을 고쳤다.

“내 뜻은, 여기서도 약조를 받으려면 담보가 필요하단 소리요. 객주 빈방 둘은 내가 먼저 비우겠소. 대신 넉 달치 외상처럼 장부에 올리진 맙시다. 돌아올 사람이 그 장부를 자기 빚으로 오해하면 안 되니까.”

매화는 그제야 자리에 앉았다. 오라비를 위해 준비한 방이 다른 사람을 또 빚쟁이로 만드는 건 바라지 않았다.

마당에서 강복단의 고함이 들렸다.

“약탕기는 약 달이는 데 쓰는 거요! 밥그릇 안 닦았다고 거기 넣지 말라니까!”

만복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범수가 물통을 든 채 복단에게 쫓기고 있었다. 그는 갱목을 어깨에 메고도 표정 하나 안 바뀌는 사내였지만 약탕기 앞에서는 항복한 사람처럼 양손을 들었다.

매화가 피식 웃었다. 웃고 나서 종이 위의 수결을 다시 보았다.

“저 사람이 오라비를 데려올 길을 열 수 있겠죠?”

연화는 창밖에서 물통을 내려놓는 범수를 보았다.

“혼자 열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날 낮, 매화는 밭을 산 노인을 찾아갔다. 노인은 처음에 매매가 다시 문제 되는 줄 알고 문도 열지 않았다. 매화가 밭값이 아니라 수결을 확인하러 왔다고 세 번 말한 뒤에야 방문이 반쯤 열렸다.

노인은 다른 한 장을 꺼냈다. 거기에 붙은 종이 가장자리의 찢긴 결이 매화의 것과 맞았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새 종이에 수결을 베끼지 않았다. 오래된 두 장을 나란히 놓고, 노인이 그때 본 손을 말하게 했다.

“덕수가 오른손을 다쳐서 왼손으로 했어.”

매화가 놀라 물었다.

“오라비가 손을 다쳤다고요?”

“그때 밭 울타리 고치다 긁혔다고 했지. 아니, 오른손 손가락이 아니라 손등이었나.”

노인은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웃었다.

“그건 자신 없구먼. 왼손으로 종이를 누르고 오른손으로 그렸던 건 봤네. 내가 뒤집어 주려 했더니 혼자 할 수 있다며 고집을 부렸거든.”

매화는 노인이 확실하게 본 것과 떠올려 붙인 것을 연화에게 나눠 전했다. 다른 한 장의 수결도 같은 모양이었고, 노인은 한덕수가 그린 것을 직접 봤다고 했다. 그 사실은 소매 안의 먹을 한덕수가 남겼다는 확정과는 달랐다. 그래도 매화에게는 처음으로 자기 기억 바깥에 서 있는 눈이 생겼다.

해 질 무렵 막동이 객주에 들어왔다. 그는 나루에서 한참 더 머물며 다섯 물자길을 지나는 장꾼들을 살핀 뒤였다. 문턱에서 흙 묻은 짚신을 벗는 데 시간이 걸렸다.

“덕수의 것일 수도 있겠소.”

소매 표식을 보더니 그가 말했다.

“그 말을 하러 온 겁니까?”

매화가 묻자 막동이 머리를 긁었다.

“아니. 내가 본 덕수의 수결은 이보다 뒤의 것이오. 안에서 그자가 배급 자루에 이름 대신 올려 그리던 건 끝에 획 하나가 더 있었어. 말을 잘못하면 이 소매가 안에서 나온 것처럼 될까 봐.”

연화가 붓을 들었다. 막동은 손을 내밀어 잠깐 기다리게 했다. 직접 그리는 대신 먼저 자기 기억을 물었다. 자루는 한 번 보았는지 여러 번 보았는지, 그때 불빛이 있었는지. 서로 다른 장면 두 번이 겹친 것 같다고 인정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같은 손이 바꿔 쓴 건지, 다른 사람이 흉내 낸 건지 모릅니다. 다만 내가 본 자루에는 끝이 둘로 갈라졌어.”

연화는 소매, 매매쪽지, 막동의 기억을 세 칸에 나눴다. 매화는 그것을 보다가 빈 네 번째 칸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뭘 쓰죠?”

“아직 못 구한 자루요.”

“그럼 내가 할 일을 알겠네요.”

“광산에 혼자 들어간다는 뜻은 아니죠?”

매화가 연화를 흘겨봤다.

“밭 노인을 찾아오는 길만 있는 줄 압니까. 오라비가 떠날 때 물건을 매어 준 장꾼들을 찾아볼 거예요. 그때 누가 옷 안쪽을 만졌는지도요.”

그 말에 만복은 떠나던 날의 출입 장부를 찾아왔다. 장꾼의 이름 대신 짐 수와 통과한 문만 적은 장부였다. 열여덟 상인과 뒤따르던 짐꾼 열둘은 한 줄에 섞여 있었다. 만복이 손가락으로 세다 틀리자 매화가 종이를 돌려 두 줄로 다시 그었다.

“사람 서른이 갔다면서 왜 이 종이에서는 스물여덟만 보여요?”

만복이 한 줄을 가리켰다.

“뒤의 두 짐은 다른 문으로 나갔소. 늦게 온 수레 때문에.”

“짐과 사람이 같습니까?”

만복은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그는 짐 둘이 늦게 나간 일을 사람 둘이 뒤따른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매화는 장부의 뒤쪽에서 별도의 삯 지급 기록을 찾아냈다. 수레를 끌던 두 사람에게 품삯이 나간 시각은 정오 뒤였다. 그러나 그들이 본행렬을 따라잡았는지는 장부에 없었다.

“내가 그날 본 건 여기까지요.”

만복은 어색하게 웃었다.

“객주 주인이라는 사람이 자기 마당을 나온 뒤의 일까지 본 듯 말했군.”

연화는 두 사람이 뒤따라갔을 가능성과 실제 광산에 닿았는지를 구분해 적었다. 막동이 안에서 센 열일곱이라는 숫자와도 섞지 않았다. 숫자를 나누자 모르는 사람이 늘어난 듯했지만, 찾아야 할 길도 선명해졌다. 매화는 늦은 수레꾼에게 먼저 물어보겠다고 했다.

“오라비만 찾고 싶었는데 자꾸 이름이 늡니다.”

매화가 장부를 접으며 말했다.

복단이 약탕기를 씻어 문턱에 세웠다.

“방도 그만큼 준비해야겠죠. 다 돌아온다는 약속은 못 하지만, 돌아왔는데 누울 데가 없으면 그건 우리 잘못이니까.”

매화는 객주 빈방 둘을 보러 갔다. 하나는 비가 오면 벽이 젖었다. 매화는 마른 방을 먼저 병자에게 주고 젖은 방은 불을 때 말리자고 정했다. 준비라는 말은 그렇게 손이 더러워지는 일부터 시작됐다.

만복은 그 방세를 자기 계산으로 먼저 치르겠다고 했다. 매화는 빚으로 적지 않는다는 문장을 약조 끝에 꼭 넣게 했다.

매화는 꽃잎 하나가 비어 있는 소매를 덮었다. 더 놓지 못한 수를 마무리하는 방법은 바늘을 바로 드는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막동이 문 쪽을 돌아보았다. 마당 담장 너머에서 짧은 휘파람이 들렸다. 그가 아는 다섯 물자길 중 하나에서 짐을 나를 때 쓰던 신호였다. 그런데 이 시각에 그 소리가 한양 객주 안에서 날 까닭은 없었다.

“누가 저 소리를 냈소?”

범수가 물통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웬 장꾼 아이가 뒷문에서 기다립니다. 이름은 두칠이라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