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야간 왕진
보내지 않은 진단서
노영숙의 집에 있는 팩스는 몇 년째 받기만 했다. 영숙이 직접 보낸 마지막 종이는 손녀 초등학교 준비물 신청서였다. 윤채영은 오랜만에 종이를 밀어 넣을 자리를 닦았다. 팩스 옆에는 진단서 사본, 약 목록, 그제 보건소에서 만든 처치 선택표가 가지런했다. 그 아래 오래된 입원기록과 가족 상담 메모까지 붙은 두꺼운 파일이 있었다. 서류가 많을수록 응급실이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
노영숙의 집에 있는 팩스는 몇 년째 받기만 했다. 영숙이 직접 보낸 마지막 종이는 손녀 초등학교 준비물 신청서였다. 윤채영은 오랜만에 종이를 밀어 넣을 자리를 닦았다. 팩스 옆에는 진단서 사본, 약 목록, 그제 보건소에서 만든 처치 선택표가 가지런했다. 그 아래 오래된 입원기록과 가족 상담 메모까지 붙은 두꺼운 파일이 있었다. 서류가 많을수록 응급실이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잠깐 놓였다.
“이건 누구 거야?” 영숙이 파일을 가리켰다.
“엄마 거지.”
“그럼 왜 나한테 안 물어보고 봉투에 넣어?”
채영은 대답 대신 파일을 꺼냈다. 세현과 하진이 오기로 한 시간이었다. 어머니가 다시 숨이 가빠질 때를 대비해 병원에 필요한 정보를 미리 알리자는 생각은 채영에게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들고 갈지, 누가 열람할지, 무엇을 전송할지까지 전부 딸이 정한 적은 없었다.
아홉 시 십 분, 법률사무소 동료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 채영이 복귀하겠다고 한 오전 회의가 곧 시작했다. 전날 밤까지 영숙 곁의 빈 시간을 맡을 사람이 정해지지 않아 채영은 출근을 미뤘다. 동료는 며칠 함께 준비한 의뢰인을 자신이 만나도 되느냐고 물었다. 채영은 회의 자료의 마지막 쪽을 찾아 읽어 주고, 의뢰인에게는 가족 사정을 자세히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 상담 뒤 담당은 내가 이어받을게.” 동료가 말했다.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래. 의뢰인 기다리게 하지 마.”
전화를 끊자 영숙이 팩스 옆의 종이를 밀었다. “나 때문에 네 일이 없어지는 건 싫어.”
“없어지지는 않아. 다만 오늘 건 내가 못 맡게 됐어.” 채영은 가방 손잡이의 붉은 자국이 아직 남은 손을 폈다. “어제 저녁에 빈 시간을 못 메운 것도 사실이고.”
영숙은 괜찮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선택한 집의 비용이 딸의 일에도 적힌다는 걸 두 사람 모두 보았다. 채영은 점심 이후 동료에게 업무를 다시 넘겨받을 수 있는지 묻겠다고 했다. 영숙은 먼저 오늘 함께 정하려던 정보부터 끝내자고 했다. 사라진 회의를 없는 일처럼 덮지 않은 채였다.
세현이 도착해 문턱에서 허락을 구하자 영숙이 팩스를 가리켰다.
“의사 선생님, 저 기계가 오늘 사람을 많이 먹으려 해. 안에 내 인생 절반이 들어가 있어.”
“전송을 아직 안 하셨군요.”
“내가 막았지. 쓸 일 있으면 필요한 만큼만 쓰라고.”
세현은 진단서를 집으려다 손을 멈췄다. 영숙이 고개를 끄덕인 뒤에야 첫 장을 펼쳤다. 채영은 그 잠깐의 멈춤에 짜증이 났다. 응급 상황에서도 이렇게 허락을 구하다가 시간을 놓치면 어쩌나 싶었다. 며칠 전 밤의 서른 분을 이미 겪고도, 기다림은 매번 새로 두려웠다.
“엄마가 말을 못 하게 되면 필요한 자료를 그때 고를 수 없잖아요.” 채영이 말했다.
“그래서 지금 고르는 거지.” 영숙이 답했다.
하진은 파일을 전부 식탁 위에 펼치지 말자고 했다. 두꺼운 종이가 영숙 앞에 벽처럼 서 있었다. 대신 이송할 때 의료진이 우선 확인해야 할 정보를 영숙과 하나씩 짚었다. 현재의 상태, 쓰는 약, 알려진 알레르기, 최근 달라진 증상, 영숙이 직접 표시한 처치에 대한 뜻. 세현은 과거의 모든 병력과 가족 대화가 같은 급한 정도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내가 지난번 입원 때 간호사랑 싸운 것도 적혀 있어?” 영숙이 물었다.
채영이 파일을 뒤졌다. “대화 기록에 있어. 싸운 게 아니라 설명을 다시 해 달라고 한 거잖아.”
“그건 그날 일이지. 그걸 먼저 읽으면 새로 만나는 사람이 내 말을 또 까다로운 노인 소리로 들을 거야.”
세현은 그 기록을 응급요약에서 제외했다. 채영이 곧장 물었다. “알아야 미리 조심하죠. 병원이 엄마의 성향을 알면 좋잖아요.”
“내 성향은 내가 말할게.” 영숙이 말했다. “지금도 말할 수 있어.”
채영의 얼굴이 굳었다. 어머니가 입원 중 겪었던 일에 자신이 옆에 없었다. 그래서 한 줄이라도 더 전하면 그 빈자리를 메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영숙에게는 더 많은 종이가 자신을 지켜 주는 갑옷이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보다 먼저 들어가는 낙인일 수 있었다.
하진은 빈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세현은 글씨를 크게 쓰고, 영숙에게 한 문장씩 읽었다. 다른 병원에서 영숙이 숨이 차거나 의사를 표현하기 어려워졌을 때 우선 확인할 내용만 남겼다. 영숙은 ‘병원 이송 거부’라는 표현을 보고 줄을 그었다. 며칠 전 밤에도 정한 조건에 이르면 가겠다고 말했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은 어떤 처치인지 따로 적었고, 계속 원하는 도움도 같은 크기의 글씨로 적었다.
“병원에 가면 나도 환자고, 여기 있어도 환자지.” 영숙이 말했다. “가는 게 벌은 아니야. 남는 게 고집도 아니고.”
세현은 ‘현재 의사 재확인’이라는 칸을 아래에 만들었다. 영숙이 병원에 도착해 말할 수 있으면 다시 묻고, 말하기 어렵다면 미리 적은 뜻과 그때 가능한 의료 설명을 함께 확인해야 한다는 문장이었다. 세현은 이 종이가 자동으로 모든 판단을 대신하는 증서처럼 보이지 않게 문장을 여러 번 고쳤다. 영숙은 “한 번 더 물어보라는 말이면 됐다”고 했다.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었을 때 채영은 냉장고를 열었다. 남은 계란말이가 두 조각 있었다. 어머니가 “어제보다 오늘이 더 맛있다”고 했고 채영은 어제 만든 것 그대로라고 했다. 영숙은 혀를 찼다.
“그럼 내 입이 바뀌었나 보지.”
“입이 바뀌어도 양보는 안 하네.”
“맛있다는 말은 양보해야 하나?”
세현은 웃었지만 종이를 덮지 않았다. 식사가 끝난 뒤 영숙은 한 장을 다시 읽을 힘이 있었다. 하진은 서두르지 않고 물컵을 갈아 주었다. 채영은 팩스 앞의 검은 덮개 아래 가족 상담 메모를 넣었다. 굳이 버리지 않아도 됐다. 보내지 않기로 하는 것과 없던 일로 하는 것은 달랐다.
“선생님 과거 사고 기록도 이렇게 한 장으로 만들 수 있어요?” 영숙이 세현에게 물었다.
세현은 뜻밖의 질문에 펜을 멈췄다. “그 사건은 지금 감정 중이고, 피해가족이 무엇을 들을지 정할 권리도 있습니다.”
“그렇겠지. 그분들은 오래 기다렸겠네.”
“네.”
“오늘 내 종이는 내가 먼저 고를 수 있어서 좋구먼. 그분들은 그때 그러지 못했겠지.”
세현은 대답을 꾸미지 않았다. 조정원에서 발견한 누락과 삭제가 떠올랐다.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사실을 숨기는 일이 상처였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사생활을 모두 넘기는 일이 상처였다. 두 상황을 같은 말로 뭉개면 아무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채영은 병원 연락처를 확인한 뒤 수화기를 들었다. 바로 전송 버튼을 누르지 않고, 사전 공유가 가능한 범위와 접수 방법을 담당자에게 물었다. 전화 너머에서는 양식을 안내했다. 채영은 영숙에게 들리도록 복창했다. 한 장의 요약을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접수 뒤 확인을 어떻게 받을지. 영숙은 통화를 지켜보다가 딸의 손을 잡았다.
“내가 지금 허락한 건 저 한 장이야.”
“알아. 나머지는 네가 못 말할 때 누가 열어야 할지도 따로 정할게.”
“못 말할 때도 아무나 열게 하지 마.”
“응. 목적이 생기면, 필요한 사람만.”
세현은 그 약속을 간단한 말로 다시 적었다. 상세기록 전체를 사전 전송하지 않되, 의사 표현이 어려운 실제 상황에서 필요한 항목을 지정된 진료진이 확인할 수 있도록 연락과 보관 위치를 남긴다고. 영숙은 글씨를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채영은 과거 상담 메모에 검은 덮개를 다시 씌웠다.
팩스가 낮은 소리를 내며 한 장을 삼켰다. 채영은 전송 완료 표시가 뜨자 종이를 바로 빼지 못했다. 한 장으로 충분할까 불안했다. 하진은 받은 쪽에 도착 확인을 하자고 했다. 채영이 확인 전화를 걸었고, 담당자는 종이가 읽히는 상태로 도착했다고 말했다. 이것이 앞으로의 치료가 원하는 대로 된다는 약속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보낸 정보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작은 확인은 됐다.
“내가 이 종이를 잘못 보냈으면 어쩌죠?” 채영이 물었다.
“그럴 가능성을 줄이려고 어머님과 같이 읽고, 받은 곳도 확인한 겁니다.” 하진이 말했다. “나중에 내용이 달라지면 바로 새로 알릴 연락처도 적어 두죠.”
채영은 한때 서류를 많이 모을수록 안전하다고 믿었다. 변호사 사무실에서는 제출하지 않은 한 장이 뒤늦게 사건을 바꿔 놓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은 종이의 양보다, 누구의 목적에 맞게 어느 부분이 전달됐는지가 중요했다. 영숙이 전송한 한 장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 보자, 채영은 어머니의 진단보다 어머니의 현재 뜻이 위에 적힌 것을 보았다.
동료에게서 문자가 왔다. 오전 의뢰인은 다음 상담도 동료와 이어 가기로 했다. 채영은 잠깐 속이 쓰렸다. 자신이 만든 질문지를 남이 쓰게 된 게 아까웠고, 그걸 아까워하는 자신도 미웠다. 영숙은 딸의 얼굴을 보고 물었지만 채영은 휴대전화를 그대로 보여 줬다. “이 일은 놓쳤어. 오후에는 내가 맡은 다른 일로 돌아갈 거야.” 영숙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딸이 자신 때문에 일을 전부 버리는 이야기도, 아무 손실 없는 효녀 이야기도 원하지 않았다.
영숙은 옆에서 보온병 뚜껑을 열었다. “나중에 내가 그 뜻을 고치면 귀찮아?”
“귀찮지.” 채영이 말했다. “그래도 다시 보낼게.”
“정직해서 좋네.”
“엄마 닮았지.”
세현은 두 사람에게 최신 종이를 구별할 방법도 정하자고 했다. 영숙은 냉장고 달력의 날짜를 가리켰다. 서류마다 작성한 날을 크게 쓰고, 새 종이가 생기면 오래된 사본을 섞어 들고 다니지 않기로 했다. 채영은 팩스 옆 봉투에 오늘 보낸 사본과 수신 확인 시각을 넣었다. 이것은 법률 문구보다 집에서 실수 없이 찾기 위한 약속이었다.
영숙은 슬리퍼를 끌고 창가로 가다가 잠시 멈췄다. 하진이 쉬자고 말하기 전에 영숙이 의자를 당겼다. 자기 속도를 자신이 먼저 인정하는 것도 오늘의 선택이었다. 식탁에 돌아온 영숙은 사전 전송한 종이를 접지 않고 냉장고 계획 옆에 붙여 달라고 했다. 누가 봐도 무엇을 보냈는지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채영은 어머니가 서명한 날짜를 확인하고 마지막 칸을 가리켰다. ‘현재 의사 확인’. 그 옆은 비어 있었다. 나중에 병원에 가게 되면 영숙이 그때 다시 답할 자리였다. 영숙은 빈칸 위에 별 지우개 연필을 올려놓았다.
그날 저녁 손녀가 장독대 헝겊 사진을 보내 달라고 했다. 채영은 서랍에서 빨간 천과 노란 천을 꺼내 바닥에 펼쳤다. 영숙은 한참 보다가 노란 천을 골랐다. “붉은 건 고추장인 줄 알고 벌레가 오겠다.” 채영이 웃으며 사진을 찍자 영숙은 잠깐 카메라를 막았다. 얼굴을 찍지 말고 천만 찍으라고 했다. 오늘 종이를 어디까지 보낼지 정한 사람은, 가족 단체방에 어떤 사진이 올라갈지도 정했다. 채영은 노란 천만 찍어 보냈다. 손녀가 해바라기 같다고 답했다. 영숙은 해바라기는 너무 크다며 손바닥만 한 민들레로 해 달라고 했다.
“빈칸이 있으니 덜 무섭네. 가방도 닫혔고, 종이도 한 장만 갔고. 나중에 내가 말할 일은 남았어.”
세현은 두꺼운 진단서를 원래 봉투에 넣었다. 더 많이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지금 더 많이 보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채영은 팩스 앞을 치우고 어머니와 남은 계란말이 한 점을 반씩 나눴다. 한 장을 보낸 뒤에도 집에서는 평소처럼 접시를 설거지해야 했다. 그 평범한 일이 오늘 영숙이 지키기로 한 생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