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미래 하드SF 재난극 34화

라그랑주 5의 유언

비료 스물여덟 명분

농업링의 물은 천천히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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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링의 물은 천천히 돌았다.

회전 중력이 약한 수조에서 뿌리들이 긴 머리카락처럼 한쪽으로 기울었다. 윤하진은 질소비료 저장통의 밸브를 열어 투명한 계량관에 흰 알갱이를 채웠다. 손바닥 하나만 한 양이었다.

“이게 오늘 저녁 채소밭 한 줄분입니다.”

그녀는 계량관을 리오 박에게 내밀었다. 리오는 받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통신 화면 속 보급선 선장은 육 톤을 요구하고 있었다. 흡착통 스물여덟 명분과 맞바꿀 질량이었다.

“육 톤이면 저 관이 몇 개입니까?”

“그걸 세는 동안 작기 하나가 지나가겠죠.” 하진이 밸브를 잠갔다. “숫자로 보시려면 여기 있습니다.”

수조 옆 질량수지판에는 두 개의 그림이 떠 있었다. 비료 육 톤을 지켰을 때와 내줬을 때. 첫 작기에는 차이가 작았다. 저장 곡물로 메울 수 있었다. 두 번째 작기부터 배양조 단백질과 잎채소 생산량이 함께 꺾였다. 빨간 선은 식량 최저선 바로 위를 스쳤다.

리오가 말했다. “대피자는 스물여덟 명 더 살 수 있습니다.”

“잔류자는 천 명이 넘습니다.”

“누가 죽는다는 계산은 아니잖습니까.”

“당신이 어제 좌석 숫자 때문에 화냈던 이유와 같습니다. 식량도 재고통 개수만으로는 못 셉니다.”

하진은 수조에서 잎 하나를 뜯어 들었다. 가장자리가 옅게 누렇게 변해 있었다. 감압 뒤 환기량이 흔들린 탓에 이번 작기 회복이 늦었다. 비료를 내주면 다음 두 작기 동안 배급의 신선식 비율이 줄고, 배양 단백질 설비를 더 오래 돌려야 했다. 그 전력은 차폐 공사와 겹쳤다.

리오는 공개판에 올라온 예순세 개 코드 중 다섯 개를 떠올렸다. 외벽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었다. 누구인지 알 수 없게 가려졌지만 근무조를 보면 짐작할 수 있었다. 스물여덟 자리가 늘면 그들 중 누군가는 떠날 수 있었다.

“나는 사람을 의자에 먼저 앉히려는 사람입니다.”

“나는 남은 사람에게 다음 식사를 주는 사람이고요.”

“그래서 여섯 톤을 한 알도 못 내준다는 겁니까?”

하진이 그를 똑바로 보았다. “그래서 스물여덟 명의 이름을 들고 와서 천 명의 식량과 바꾸자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둘 다 숫자로 놓고 선택해야죠.”

진아리는 둘 사이에서 수조의 파문을 보고 있었다. 환기구 바람이 바뀔 때마다 물 표면의 둥근 물결이 벽에 부딪혔다. 그녀는 보급선 화물목록을 확대했다.

“흡착통만 있는 게 아니네요.”

보급선에는 사용기한이 짧은 예비 촉매도 있었다. 라그랑주 5의 현용 흡착통 반응재를 되살리는 데 쓸 수 있지만, 정식 완제품보다 손이 많이 갔다. 작업시간과 시험이 필요했다. 반대로 농업링 창고에는 다음 정비까지 쓰지 않을 예비 촉매가 일부 있었다. 규격은 달랐으나 보급선 정제장치에 맞았다.

하진이 목록을 당겨 보았다. “우리 촉매를 같이 주면 비료를 줄일 수 있겠군요.”

“보급선이 받을지는 물어봐야 합니다.”

리오가 즉시 통신 연결을 요구했다. 그러나 보급선과의 다음 실시간 창은 십칠 분 뒤였다. 세 사람은 그동안 화물 질량을 직접 확인했다. 장부의 육 톤이 실제 육 톤인지, 촉매가 다른 설비에 이미 예약돼 있지 않은지 창고를 열었다.

하진은 비료통을 하나씩 두드렸다. 세 번째 통에서 둔한 소리가 났다. 바닥에 굳은 덩어리가 있었다. 쓸 수 없는 양을 빼자 실물은 장부보다 백이십 킬로그램 적었다.

리오가 씁쓸하게 웃었다. “여기도 화면이 더 많군요.”

“농업링은 매 작기 실물을 엽니다. 그래서 이 정도에서 잡힌 겁니다.”

예비 촉매는 밀봉 상태가 좋았다. 진아리는 대기설비 정비표를 확인했다. 앞으로 두 작기 동안 라그랑주 5에서 쓸 계획은 없었다. 다만 비상용 하나는 남겨야 했다.

통신창이 열리자 보급선 선장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비료 육 톤이면 흡착통 스물여덟 세트. 촉매를 넣겠다면 시험 성적부터 보내시오.”

진아리가 이미 준비한 성적을 올렸다. 선장은 규격표를 훑더니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비료 삼 톤과 촉매 두 상자. 흡착통 열네 세트. 그 이상은 우리도 귀환 여유를 깎아야 하오.”

리오가 앞으로 숙였다. “스무 세트.”

“열넷.”

“촉매 세 상자.”

하진이 리오의 어깨를 잡아 뒤로 당겼다. “세 번째는 우리 비상용입니다.”

선장이 그 장면을 보고 말했다. “당신들 남는 사람 몫까지 팔 생각이면 거래 안 하겠소. 우리도 그 책임은 못 집니다.”

통신창이 닫힌 뒤 리오는 수조 난간에 두 손을 짚었다. 스물여덟을 구하려던 입에서 열넷이라는 숫자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하진은 승리한 얼굴을 하지 않았다. 그녀도 화면의 열네 자리를 오래 보았다.

“나는 누구도 덜 살리자는 게 아닙니다.”

“알아요.” 리오가 말했다. “그래서 더 화가 납니다.”

“나도 그래요.”

진아리는 두 선택을 주민 공개판에 올렸다. 육 톤과 스물여덟 명. 삼 톤·촉매 두 상자와 열네 명. 교환하지 않음. 각 선택 아래에는 대피용량뿐 아니라 두 작기 수확량, 저장식 사용일, 추가 전력, 복구 예상기간이 나란히 붙었다.

공개표결은 농업링에서 열렸다. 회의석 대신 수조 사이 통로에 사람들이 섰다. 잔류를 생각하는 가족과 대피 우선심사 대상자가 같은 줄에 섞였다. 한 외벽 노동자는 스물여덟 명 안에 들 가능성이 있는데도 삼 톤안을 눌렀다. 어린 딸이 농업링에 남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농업 노동자 한 명은 육 톤안을 눌렀다. 그의 아내가 고선량 재검진 대상이었다.

표를 넣기 전, 하진은 배급 쟁반 세 개를 통로에 놓았다. 첫 번째에는 현재 한 끼분 잎채소가 담겼다. 두 번째에는 육 톤을 내줬을 때 두 번째 작기의 예상량, 세 번째에는 삼 톤안의 예상량이 담겼다. 숫자보다 작은 잎 몇 장이 사람들의 얼굴을 더 오래 붙들었다.

“겁주려는 전시 아닙니까?” 누군가 물었다.

“맞습니다. 굶는 계산은 겁나는 일입니다.” 하진이 말했다. “다만 어느 안도 당장 굶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육 톤안은 저장식을 더 빨리 쓰고 복구 여유가 사라집니다. 삼 톤안은 메뉴가 줄지만 다음 작기에 되돌릴 수 있습니다.”

리오는 그 옆에 흡착통 한 개를 세웠다. “이 통 하나도 사람 하나와 같지 않습니다. 동반자와 건강상태, 귀환 중 필요한 물이 다릅니다. 오늘은 통 개수와 잎 개수 사이에서 사람을 지우지 맙시다.”

한 노인이 물었다. “조합장은 어느 안입니까?”

리오는 손의 표를 보여 주지 않았다. “내가 먼저 말하면 조합원들이 따라옵니다. 마지막에 넣겠습니다.”

그가 욕망을 숨긴 것이 아니라 영향력을 늦추자, 줄 뒤에 있던 노동자 몇 명이 서로 보던 눈을 거두고 자기 표를 읽었다.

리오는 자기 표를 한동안 쥐고 있었다. 조합원들에게 좌석을 더 가져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최대 좌석이 최대 정의는 아니었다. 스물여덟을 얻는 순간 남은 사람의 식량 위험을 감출 수 있다면, 그것은 재단이 사고지수를 낮춘 방식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삼 톤안을 눌렀다.

결과도 삼 톤안이었다. 큰 차이는 아니었다. 육 톤안과 마지막까지 표가 엇갈렸다. 하진은 결과가 뜨자 곧바로 비료통 세 개에 운송 띠를 감았다. 리오는 촉매 두 상자를 직접 밀었다.

부결된 육 톤안의 표도 삭제하지 않았다. 누가 이기고 졌는지가 아니라, 스물여덟 명을 더 보내려 했던 주민이 얼마나 많았는지 다음 배급 조정 때 다시 보자는 하진의 요구였다.

“후회합니까?” 하진이 물었다.

“떠날 수 있었던 열네 명을 생각하면요.”

“나는 비료 삼 톤을 생각하면 후회합니다.”

두 사람은 화물 카트를 도킹링까지 함께 밀었다. 교환 작업이 끝나자 새 흡착통 열네 세트가 계량대를 통과했다. 진아리는 하나씩 중량과 반응효율을 확인했다. 모두 기준 안이었다.

마지막 통을 내릴 때 보급선 카트의 제동기가 미끄러졌다. 삼 톤짜리 비료 묶음이 통로 벽 쪽으로 쏠렸다. 리오가 몸으로 막으려 하자 하진이 비상 고정끈을 당겼다. 끈이 팽팽해지며 화물이 리오의 무릎 한 뼘 앞에서 멈췄다.

“사람으로 질량을 막지 마세요.” 하진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좌석을 늘리는 날 다리 하나쯤은 내놓을 뻔했군요.”

“남는 사람 식량을 지킨다고 떠날 사람을 다치게 할 생각도 없습니다.”

둘은 비료 묶음의 고정점을 하나 더 달았다. 교환의 대가는 표결에서 끝나지 않았다. 실제로 질량을 옮기는 사람의 무릎과 다음 작기의 작업시간까지 따라왔다.

대피선 안전 귀환용량은 삼백오십육에서 삼백칠십으로 올라갔다.

금융봉인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당장 배정 가능한 자리는 여전히 이백삼십이였다. 다만 담보 문제를 해결했을 때 실제로 살릴 수 있는 상한이 열네 명 늘었다. 농업생산 감소는 저장식과 다음 작기 투입 조정으로 회복 가능한 범위에 남았다.

리오는 공개판에 두 숫자를 모두 적었다.

대피용량 +14. 비료 -3톤.

그때 배정 서버가 금융봉인이 풀렸다고 가정한 삼백칠십 명 후보 순위표를 출력했다. 실제 개방 좌석은 여전히 이백삼십이였고, 이것은 봉인 해제 뒤에야 쓸 배정계획이었다. 종이표가 마른 소리를 내며 길게 밀려 나왔다. 리오는 첫 줄부터 읽다가 멈췄다.

의료 우선심사를 기다리는 외벽 노동자 코드보다 앞에, 같은 가족군을 뜻하는 익명 결합코드들이 연달아 놓여 있었다. 투자등급 표시가 붙은 일흔네 명이었다. 어린이도 있었고 건강한 성인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피폭 재검진 대상보다 백 순번 넘게 앞섰다.

하진이 종이를 잡아당겨 식량표 옆에 펼쳤다.

“우리가 열네 자리를 어렵게 늘렸는데.”

리오의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안전 상한은 늘었고, 순서는 그대로였군.”

열네 명분의 안전용량을 얻은 기쁨은 종이 위에서 한 교대도 버티지 못했다. 이번에는 자원의 총량이 아니라, 봉인이 풀릴 때 누구에게 먼저 문을 열 것인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