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료·완화의료 휴먼극 34화

열세 번째 야간 왕진

딸과 대리인의 거리

윤채영은 어머니 방의 의자를 두 번 옮겼다. 침상 곁으로 붙이면 딸이 앉는 자리였고, 책상 앞에 두면 문서에 서명하는 사람이 앉는 자리 같았다. 결국 두 자리 사이에 의자를 놓았더니 노영숙이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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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영은 어머니 방의 의자를 두 번 옮겼다. 침상 곁으로 붙이면 딸이 앉는 자리였고, 책상 앞에 두면 문서에 서명하는 사람이 앉는 자리 같았다. 결국 두 자리 사이에 의자를 놓았더니 노영숙이 한숨을 쉬었다.

“문간에 앉으면 내가 네 얼굴 보려고 목을 돌려야 해.”

“여기서도 보여.”

“변호사 얼굴만 보여. 내 딸은 좀 더 가까이 와.”

채영은 의자를 당겼다. 어제 보건소에서 돌아오는 길, 어머니는 차 안에서 잠들었다. 깨어나서는 장독대 헝겊이 어디 있는지 묻고, 저녁에는 손녀와 통화했다. 평범한 일들이 계속되는 가운데 파일 속 종이 세 장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채영은 서명할 곳을 찾는 습관 때문에 자꾸 그 페이지를 열었다.

“내가 못 말할 때는 네가 봐야 한다며.” 영숙이 먼저 말했다.

“봐야지. 그런데 뭘 보고 어떻게 말할지 모르겠어.”

“어제 읽었잖아.”

“읽는 것하고, 그때 사람들 앞에서 엄마 대신 말하는 건 달라.”

영숙은 딸의 손을 잡으려다 멈췄다. 채영이 손톱으로 파일 모서리를 뜯고 있었다. 영숙은 그제야 자신이 딸에게 너무 큰 일을 한 장의 종이처럼 밀어 넣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일이 크다고 해서 자신의 뜻을 넘길 수는 없었다.

문하진이 왔을 때 영숙은 먼저 물었다. “이 아이가 나중에 울면, 울었다는 이유로 내 말을 못 옮기는 사람 취급할 건 아니죠?”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하진이 말했다. “무서운 상황에서 누구나 흔들릴 수 있어요. 그래서 오늘은 채영 씨 혼자 기억하게 두지 않으려는 거예요.”

채영이 헛웃음을 냈다. “엄마는 내가 변호사라서 이런 문서 잘 읽을 줄 알았죠?”

“그랬지. 그런데 네가 읽을 때마다 내가 피고인 된 기분이 들더라.”

“나는 엄마를 지키려고 그랬어.”

“알아. 네 글씨가 너무 똑바르면 무서워.”

채영은 웃었다. 밤새 한 글자도 쓰지 못한 파일을 덮었다. 하진은 새 서식을 내놓지 않았다. 영숙에게 먼저, 의사를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면 채영이 무엇을 기준으로 말해 주길 원하는지 묻었다. 영숙은 창문 쪽을 봤다. 첫눈 이후 얼어붙은 화분 받침이 눈에 띄었다.

“내가 집에 있고 싶다고 했지. 정신이 맑았으면 좋겠다고도 했고. 채영이가 잠을 자야 한다고도 했어. 그런데 이 셋을 순서대로 외우라고 시키면, 얘가 숨 쉬는 것까지 틀렸나 검사할 거야.”

“그럼 어떻게 하실까요?”

“그때의 나를 사람으로 보고, 내가 지금까지 고른 이유를 먼저 말해 줘. 내가 말할 수 있으면 내게 다시 물어. 못 한다면 내가 읽고 표시한 종이를 보여 줘. 그리고 네가 원하는 건 네가 원한다고 따로 말해.”

채영이 어머니를 바라봤다. “내가 원하는 걸 말해도 돼?”

“당연하지. 네가 나 살리고 싶다고 말하는 걸 내가 어떻게 금지해. 대신 내 뜻인 것처럼 말하지 말라는 거야.”

하진은 영숙의 말을 다시 읽어 주었다. 영숙은 몇 군데를 고쳤다. ‘집에 머물 것’이 아니라 ‘집에서 받을 수 있는 도움을 우선 확인할 것’. 그날 밤에는 집에 남았지만 상태가 크게 달라지면 병원에 가겠다고 할 수도 있었다. ‘채영의 판단에 따를 것’도 지웠다. 대신 자신의 표현이 어려울 때, 이전에 직접 정한 선택과 그 이유를 채영이 전달한다고 적었다. 그 선은 채영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채영에게 무리한 결정을 혼자 만들지 않게 하는 선이었다.

채영은 펜 끝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그 문장을 들고 있어도, 누가 ‘지금은 다른 상황입니다’라고 하면 어떡해?”

“의학적으로 지금 가능한 일을 설명해 줄 사람도 있어야죠.” 하진이 말했다. “세현 선생님이나 그때 진료하는 사람에게 상황을 듣고, 어머님 뜻과 맞는지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혼자 정하는 게 아니네.”

“엄마 몸이니까 엄마가 먼저 정하고, 나중에는 그 말을 여러 사람이 확인하는 거예요.” 영숙이 말했다. “너만 벌 세우려고 만든 종이가 아니야.”

채영은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전날 상담실에서 어머니가 관을 원하지 않는다고 표시하는 순간, 채영은 ‘내가 이 사람을 살릴 기회를 버리게 되나’라는 생각을 했다. 이제 어머니는 자신에게 생사 판결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이미 말해 둔 삶의 모양을 빼앗기지 않게 도와 달라는 부탁이었다. 부탁의 무게가 줄어든 것은 아니지만 모양은 달라졌다.

채영은 사무실 동료가 보낸 메시지를 봤다. 내일 오전 회의에 복귀할 수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며칠째 답을 미뤘다. 어머니 곁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과 일을 잃으면 어머니 돌봄의 비용도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이 번갈아 왔다. 영숙은 메시지 화면을 보지 않고 딸의 굳은 얼굴만 보았다.

“일 얘기지?”

“내일 오전만 가면 돼.”

“그럼 가. 대신 가는 동안 내가 누구한테 전화할지만 같이 확인하자.”

“엄마, 방금 이런 얘기 해 놓고 날 보내?”

“이런 얘기 했으니까 보내는 거야. 네가 매번 여기 앉아 있어야 내 뜻이 살아 있는 거라면 이 종이는 무슨 소용이니.”

채영은 그 말에 바로 동의하지 못했다. 하진은 오전 당직과 김정례의 도착 시간을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아직 빈 시간이 있는지 확인하지 않고 채영의 출근을 약속할 수는 없었다. 영숙은 딸이 일하러 가는 것을 원했지만, 혼자 있게 될 시간의 길이까지 모른 채 용감한 척하지는 않았다. 셋은 작은 달력을 펴고 내일 오전 칸에 각자 가능한 일을 썼다. 빈칸이 남았다. 그 빈칸은 오후까지 확인하기로 했다.

그날 낮 김정례가 다녀갈 시간이 되자 영숙이 죽 한 그릇을 더 담으라고 했다. 정례는 자정 근무를 다시 시작한 뒤로 시간을 지켜 퇴근했지만, 영숙의 부엌에서는 아직 손님처럼 앉지 못했다. “저는 가져온 도시락이 있어요”라고 했지만 영숙이 숟가락을 내밀었다.

“우리는 지금 대리인 얘기 중이야. 정례 씨는 나중에 내가 무슨 소리 하면 딸한테 다 말해 줄 거야?”

정례는 숟가락을 든 채 생각했다. “선생님께 연락해야 할 증상은 연락하죠. 따님께는 연락표에 정한 때에 말씀드리고요. 어르신이 그냥 반찬이 짜다고 하신 것까지 보고할 필요는 없죠.”

“봐라.” 영숙이 채영을 향해 말했다. “나에 관한 말을 다 모아 두는 게 보호는 아니야.”

채영은 정례의 죽 그릇에 김가루를 조금 올려 주었다. 자신이 어머니의 모든 시간을 알아야 안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정례에게까지 무급 보고를 요구하게 만들 뻔했다. 어머니는 그걸 웃으며 알려 주고 있었다.

오후에 세현이 전화로 들어왔다. 진료 일정 때문에 방에 오지 못했지만 영숙이 원하면 계획 문장만 확인하겠다고 했다. 채영이 전화를 스피커로 놓자 영숙이 먼저 말했다.

“내가 정신이 없으면, 당신은 내가 어떤 병인지 설명해. 채영이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고. 둘이 내 목소리인 척하지는 마.”

세현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네. 제가 보이는 상태와 가능한 도움을 말하겠습니다. 어르신 뜻은 기록과 채영 씨 말씀을 함께 확인하겠습니다.”

“하진 씨는?”

“제가 먼저 어르신이 지금 직접 답할 수 있는지 다시 물을게요.” 하진이 말했다. “답하실 수 있으면 이 종이는 참고만 하고요.”

영숙은 만족한 듯 휴대전화를 채영에게 돌려줬다. 세현은 전화를 끊기 전에 정례가 근무를 마치면 누가 저녁을 맡는지도 물었다. 영숙이 “딸이 오늘 계란말이 복수전을 한다”고 했다. 채영은 며칠 전 소금이 모자랐던 걸 아직 기억하느냐며 투덜거렸다. 방 안의 웃음은 몇 분뿐이었지만, 그 몇 분은 결정을 기다리는 공백이 아니었다. 그들이 함께 사는 시간이었다.

서명할 차례가 되자 채영이 펜을 들었다. 영숙이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내가 써.”

“손 떨리잖아.”

“별 지우개도 있어.”

영숙은 천천히 이름을 적었다. 마지막 획이 종이 끝으로 기울었다. 채영은 그 선을 바로잡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이름 옆에 ‘어머니의 선택을 전달할 사람’이라고 적었다. ‘대신 선택할 사람’이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진은 두 사람이 고른 말을 읽어 주고 각자 무엇을 이해했는지 물었다. 영숙은 딸이 자신의 말을 옮겨 주되, 자신의 말이 새로 가능하면 다시 듣는다고 답했다. 채영은 자신이 다른 바람을 품어도 그것을 어머니의 바람인 양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하진은 빈칸을 하나 남겼다. 생각이 달라질 때 고칠 자리였다.

해 질 무렵 채영은 파일을 응급 가방에 넣으려다가 멈췄다. 이 종이를 다른 병원에 미리 보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파일에는 영숙의 진단만이 아니라 가족이 다툰 이야기와 세현이 물은 오래된 상담 내용도 함께 끼워져 있었다.

채영은 상담 메모 첫 장에 자신이 쓴 문장을 보았다. ‘어머니가 협조하지 않음.’ 그날 영숙은 검사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설명을 다시 듣고 싶다고 했었다. 채영은 지우개를 찾다가 종이를 덮었다. 기록을 몰래 고치면 사실이 더 흐려진다. 대신 옆 종이에 그날 자신이 제대로 듣지 못한 말을 적었다. 언젠가 어머니에게 물을 기회가 있으면 그때 읽어 보려 했다. 지금은 이 사적인 후회까지 응급실로 보낼 이유가 없었다.

“이걸 통째로 보내는 건 아니겠지?” 채영이 물었다.

영숙은 파일을 받아 자기 무릎 위에 놓았다. “보낼 건 내가 골라. 내 이름도 내가 썼으니까.”

채영은 어머니 옆 의자를 더 바짝 붙였다. 딸과 대리인의 거리를 재던 오전과 달리, 두 사람의 어깨가 닿았다. 파일을 넘길 사람은 여전히 정해지지 않았지만, 어떤 말을 넘겨서는 안 되는지 묻는 사람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