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지난 복숭아밭
설탕 한 숟갈의 몫
류미정이 새 라벨을 붙인 병 하나를 작업대에 올렸다. 병 뒤에는 다섯 농가의 코드가 한 줄에 있었다. 겉에서 보면 서로 같은 비율의 몫을 낸 것 같지만, 주방의 설탕통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류미정이 새 라벨을 붙인 병 하나를 작업대에 올렸다. 병 뒤에는 다섯 농가의 코드가 한 줄에 있었다. 겉에서 보면 서로 같은 비율의 몫을 낸 것 같지만, 주방의 설탕통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어제 배치 설탕이 예상보다 적게 들었어요.” 미정이 말했다. “이씨네 완숙 과육이 들어간 솥이죠.”
박 여사가 바로 반응했다. “우리 과육은 단단해서 조각이 많이 남았잖아. 설탕 아낀 것만 이익인가?”
보리는 저울에 남은 설탕 봉지와 공정표를 가져왔다. 두 집의 과육이 한 병에서 맡은 역할이 달랐다. 향 좋은 과육은 설탕을 덜 쓰게 했고 단단한 과육은 버려지는 양을 줄였다. 어느 하나를 ‘좋은 과일’이라고 부르면 다른 쪽 노동이 사라졌다.
“오늘은 계산부터 해 봐요.” 보리가 말했다.
옥순은 빈 의자를 당겼다. “계산을 하면 더 싸울 텐데?”
“근거 없이 싸우면 끝날 때도 없어요.”
다섯 농가는 지난해 저장과에서 식용 가능 판정을 받은 물량만 작은 통에 나눠 담았다. 올해 냉해 뒤 새로 열린 과일이 아닌 만큼, 밭별 이번 봄 피해율을 지난해 과육의 품질판정에 억지로 넣지 않았다. 그래도 냉해 때문에 올해 벌이가 줄어든 농가들에게 원물값은 민감했다. 보리는 지난해 수확 원가와 보관료도 별도 칸에 적었다.
당도계 첫 숫자는 9.8브릭스였다. 다음은 12.1, 세 번째는 14.6. 박 여사는 자기 과육이 가장 낮은 구간에 놓이자 저울을 밀었다. “우리 품종은 원래 새콤해. 이건 농사를 못 지어서가 아니야.”
“알아요.” 보리가 말했다. “그래서 무조건 당도가 높다고 더 주면 불공평할 수 있어요.”
“그런데 어제는 절감한 설탕을 나누자면서?” 옥순이 물었다.
“말을 너무 빨리 했어요. 절감이 있었는지 확인하고, 그게 품종 차이인지 보관 차이인지 구분해야 해요. 기본값을 낮게 잡아 놓고 가산이라고 부르면 사실은 다른 집 값을 깎는 거예요.”
미정이 색 국자 세 개를 놓았다. 첫 배합시험에서 세 솥을 같은 시간 끓였다가 저당도는 묽고 고당도는 바닥에 붙었던 기억 때문에 보리는 시계를 일찍 켰다. 이번에는 목표한 제품 규격과 냉장보관 조건을 먼저 고정했다. 설탕을 줄였다고 소비기한을 늘려 적지 않았다. 실험마다 가열시간과 최종 수율도 재야 했다.
박 여사는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그럼 우리 집은 기본값만 받나?”
“아직 시험 중이에요. 먼저 모든 식용 가공과에 최저단가를 보장하자는 데 동의가 필요합니다.”
한쪽에서 장씨가 말했다. “당도 높은 집이 좋은 원물을 냈는데 다 똑같으면 내가 오래 보관한 수고는?”
“그 수고가 실제로 설탕과 시간을 아꼈다면 그 절감분 일부를 가산하죠. 그런데 절감이 없는 날은 그냥 높은 숫자만으로 돈을 더 주지 않아요.”
옥순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재다 보면 낮은 밭 사람은 또 손해보겠지. 올해 꽃도 많이 잃었는데.”
“올해 피해가 큰 곳에 필요한 지원과 지난해 원물값을 한 숫자로 섞으면 아무도 이유를 설명 못 해요.” 보리가 옥순을 보았다. “기본 생산비는 먼저 지키고, 냉해 지원은 다른 장부에서 다뤄요. 해진 씨 자료도 아직 최종 보상금이 아니잖아요.”
해진은 관측소 퇴근 후 뒤늦게 들어왔다. 자기 이름이 들린 듯 어깨를 움츠렸다. “제가 무슨 일을 했나요?”
“보험금이 설탕통에 들어가지 않게 막는 일.” 미정이 주걱을 건넸다.
그는 주방 일에는 끼지 않겠다며 주걱을 돌려주었다. 대신 옥순이 들고 온 밭 지도 모서리를 눌러 주었다. 보리는 그가 자신을 대신해 논쟁하지 않는 점이 좋았다. 그래서 더 자주 그의 얼굴을 보게 됐다.
첫 배치는 당도가 높아 설탕이 줄었지만 가열시간은 조금 늘었다. 과육을 더 많이 남기려고 불을 낮춘 탓이었다. 장씨가 “설탕 아꼈으니 내 몫”이라고 말하자 미정이 기록표를 보여 줬다. “절감액에서 늘어난 가열비와 노동시간을 빼야 진짜 남은 돈입니다.” 장씨는 입을 다물었다가, 자기가 직접 불을 지켰으니 노동시간도 기록해 달라고 했다. 미정은 웃지 않았다. “당연히 적어야죠. 오늘은 시험이라 지급 기준도 함께 보죠.”
두 번째 배치는 박 여사의 새콤한 과육을 향 좋은 원물과 섞었다. 한 숟갈 먹은 배정자는 눈을 감고 다시 먹었다. “이건 복숭아 맛이 먼저 오고 나중에 깔끔해. 장터 손님은 이쪽을 다시 찾겠는데요.”
박 여사는 아직 화가 덜 풀린 얼굴로 물었다. “당도가 낮으면 값이 낮다더니.”
“그 말 안 했습니다.” 보리가 대답했다. “낮은 당도가 맛의 결함이라는 표가 아닙니다. 오늘은 오히려 산미가 제품을 살렸어요.”
옥순이 손뼉을 쳤다. “그럼 이제 박 여사네가 제일 비싼 거야?”
“아줌마, 순위를 정하는 게임 아니에요.”
보리는 칠판에 세 줄을 그었다. 첫째, 안전하게 가공할 수 있는 원물의 기본단가. 둘째, 실제 배치에서 설탕과 가열비를 포함해 줄어든 비용. 셋째, 산미나 식감처럼 판매가치를 높이지만 아직 가격으로 입증하지 못한 특성. 셋째 줄에는 오늘 곧바로 보너스를 매기지 않았다. 손님 반응과 재구매가 쌓여야 계산할 수 있었다.
“이번 시험분의 기본단가는 오늘 지급해요. 품질가산은 가열비와 노동시간까지 확정한 뒤 별도 지급하고요. 산미와 식감은 다음 배치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는지 봐야 가격에 넣을 수 있어요.”
다섯 농가가 숫자를 더듬어 읽었다. 박 여사는 기본단가가 자기 생산비보다 낮지 않은지 물었다. 보리는 오늘 산정에 포함된 보관료와 손질 전 무게를 보여 주었다. 이씨는 향 1위가 당도만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기분이 덜 상한다고 했다. 장씨는 높은 당도인데도 가산이 작아졌지만, 적어도 왜 그런지 알겠다고 했다.
미정은 보리의 커피에 설탕을 한 숟갈 넣었다. “오늘 가산입니다.”
“제 동의 없이 가격을 바꿨는데요?”
해진이 자기 잔을 내밀었다. “저도 품질가산 받습니까?”
“기사님은 오늘 설탕값 벌어 오신 일이 없잖아요.” 미정이 빈 숟갈을 쥐여 줬다. “직접 저으세요.”
보리가 웃다가 커피를 마셨다. 너무 달았다. “실험 실패. 제 잔엔 반 숟갈이 좋겠어요.” 해진은 말없이 뜨거운 물을 조금 가져다줬다. 그녀가 잔을 내밀며 “고쳐도 될까요?”라고 묻자 그가 “컵 주인이 결정하죠”라고 답했다. 주방의 공정표와 상관없는 말인데, 보리는 그 말이 오래 따뜻했다.
마지막 계산을 하던 미정이 한 장을 들어 올렸다. 서로 다른 품종 두 집의 당도 차이는 해동 조건을 맞춰도 남았다. 장씨와 이씨가 같은 기준선에서 시작한 것처럼 가산액을 비교하면 품종 고유의 당을 마치 노력의 결과로 보상하는 셈이었다. “다음 배치에서는 품종별 기본 범위를 먼저 정해야겠어요.”
옥순이 즉시 물었다. “그럼 오늘 정한 것도 다시 싸우자는 거냐?”
“오늘은 확정된 기본단가만 드려요.” 보리가 말했다. “가산액은 계산을 닫고 따로 드리되, 오늘 지급한 기본값은 소급해서 빼지 않습니다.”
박 여사가 시험병을 품에 넣었다. “좋아. 다음에는 우리 새콤한 과육도 이름 대신 맛으로 겨뤄.”
옥순은 실제 병 하나를 놓고 계산을 다시 하자고 했다. 설탕 90그램이 줄었다고 그 값을 전부 한 농가에게 얹을 수는 없었다. 같은 배치에서는 과육 형태를 남기려고 불을 낮춰 더 오래 저었고 냉각 뒤 나온 병도 하나 적었다. 미정이 전기 사용시간과 작업시간을 붙이자 남는 돈은 모두의 예상보다 작았다. “이렇게까지 재고 이만큼이라고?” 장씨가 물었다. “네.” 보리가 말했다. “적은 돈이라도 실제로 아낀 만큼을 나누는 게, 근거 없이 병당 백 원을 얹는 것보다 오래 가요. 그 백 원은 결국 누군가의 노동비에서 빠지거든요.”
박 여사는 자기가 낸 새콤한 과육을 가리켰다. “산미는 돈으로 못 세니까 영원히 공짜야?” 보리는 시식점수와 장터 예약자의 맛 의견을 같은 종이에 붙였다. 좋은 반응이 다음 배치에서도 반복되면 제품 가격과 배합 기준에 넣을 수 있었다. 한 번 좋아했다는 말을 전체 손님의 선택처럼 쓰지는 않겠다고 했다. 박 여사는 마뜩잖아하면서도 “다음에도 내 것을 섞어 봐”라고 했다. 보리는 그럴 거라고 약속했다.
서로 다른 품종을 같은 출발선에 세울 수 있는지도 다시 봐야 했다. 미정은 같은 품종인데 보관기간이 다른 작은 표본 두 개를 꺼냈다. 더 단 쪽은 향이 약했고 덜 단 쪽은 가열 후에도 복숭아 향이 남았다. 보리는 다음 실험표에 ‘품종별 통상 당도 범위’와 ‘가열 뒤 향’을 나란히 적었다. 이씨가 웃으며 말했다. “가림평가에서 우리 집 일등은 당도 말고 향으로 했으니까.”
옥순은 다섯 봉투에 오늘 확정한 기본 원물대만 넣었다. 장씨가 빈 가산 칸을 보며 기름값으로 쓸 생각이었다고 하자 보리는 지급예정액을 부풀려 적어 주고 싶은 마음을 삼켰다. “아직 얼마가 남는지 확인 전이에요. 계산이 닫히는 날과 확인할 사람은 여기 적어 둘게요.” 장씨는 당장 못 받을 돈이라면 빈칸이 낫다며 봉투를 접었다. 대신 자기 과육이 들어간 시험병 하나를 가져가 가족에게 맛을 보여 주겠다고 했다. 박 여사는 자기 봉투에 적힌 기본단가를 다시 읽고, 다음 배치도 이 값 아래로 내려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보리는 오늘 합의한 적용범위와 다음 논의 날짜를 영수증 아래 적었다. 누구도 당장 한 철 전체의 가격이 확정된 듯 말하지 않았다.
설탕 한 숟갈의 값이 생각보다 작다는 사실보다, 그 작은 값을 누구에게서 빼앗지 않고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그날 작은 주방의 수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