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 범죄 케이퍼 34화

활주로 아래 19번 벨트

서명 밑에 붙은 시간

고태식은 자기 서명을 멀리서도 알아봤다. 마지막 획이 늘 오른쪽으로 길어졌다. 왼손에 공구를 쥔 채 서명하는 일이 많아, 종이가 밀릴 때마다 펜이 그쪽으로 미끄러졌다. 감식실 유리 너머의 보수요청서에도 그 버릇이 있었다.

글자 크기

고태식은 자기 서명을 멀리서도 알아봤다. 마지막 획이 늘 오른쪽으로 길어졌다. 왼손에 공구를 쥔 채 서명하는 일이 많아, 종이가 밀릴 때마다 펜이 그쪽으로 미끄러졌다. 감식실 유리 너머의 보수요청서에도 그 버릇이 있었다.

“제 겁니다.”

“서명 모양이 같다는 뜻입니까, 그 종이에 직접 하셨다는 뜻입니까?” 하지후가 물었다.

태식은 대답을 고쳤다. “서명은 제 것입니다. 이 요청서는 본 기억이 없습니다.”

앞줄에는 세 달 전 정기 보수 내역이 적혀 있었다. 19번 벨트의 오래된 롤러와 진동값. 뒷줄에는 지난 화요일의 수동모드 전환 시각이 새로 적혀 있었다. 자신이 쉬는 날이었다. 그런데 종이에서는 태식이 범행 시각의 유지보수를 확인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문서감식 담당자가 확대 화면을 바꿨다. 서명 아래로 토너의 작은 점들이 지나갔다. 처음 출력된 글자와 나중에 추가된 숫자의 짙기가 달랐다. 종이를 다시 넣어 인쇄한 흔적일 수 있지만, 그 작업을 누가 했는지는 화면에 없었다.

“종이를 갖고 있던 사람부터 보면 되잖습니까.” 태식이 말했다. “정비사무실 보관함 열람자가—”

“고 기사님은 열람기록 감식에서 빠집니다.”

지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태식의 의자가 밀렸다. 앞선 조사에서도 자기 카드가 창고문을 열었다는 기록 때문에 카드를 자진 반납했다. 이번에는 자기 손으로 쓴 서명마저 남이 들여다보고 있는데, 당사자가 빠져야 한다니.

“내 이름이 걸렸는데 내 파일을 못 보게 해요?”

“보면 됩니다. 조사 뒤 열람 범위를 정해서요. 지금 원본을 직접 고르면 유리한 쪽만 봤다는 말이 따라옵니다.”

“그 말이 무서워서 나를 밖에 세우는 거군요.”

“당신에게도 필요한 선입니다.”

태식은 유리벽에 비친 자기 모습을 봤다. 안전모를 벗은 머리가 낯설었다. 분류기에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서면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증거를 먼저 찾는 사람이 아니라, 남이 찾아 준 사실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는 것은 여전히 어려웠다.

이나경이 얇은 보관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세 달 전 소규모 설비 손상 건이 보험사에 접수됐을 때, 운영사가 정비 확인자료 사본을 제출해 두었다. 그 상자는 회사 내부 보관함과 달리 손을 댈 수 없었다. 당시 접수시각과 페이지 순서가 남아 있었다.

“이 자료가 사건과 관련 있다는 이유로 가져온 건 아닙니다.” 나경이 말했다. “이 문서의 예전 모양을 비교하려고 가져왔어요. 원본은 정식 제공절차로 냈고, 저는 사본을 설명만 합니다.”

태식이 상자에 손을 뻗다가 멈췄다. 나경은 그에게 장갑을 주지 않았다. 대신 감식 담당자가 오래된 자료의 첫 장을 유리 아래 펼쳤다. 태식의 서명은 똑같이 길었다. 그러나 문제의 시각줄이 들어갈 자리는 비어 있었다. 원래의 보수 내역은 롤러 소음과 교체 부품만 적고 있었다.

“그럼 누가 뒤에 붙였네요.” 태식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범행 주간에 추가 인쇄된 줄이라는 점까지는요.”

감식 담당자가 종이를 빛에 비춰 보였다. 새 줄은 오래된 접힘을 가로질렀다. 한 번 접힌 종이를 펼쳐 다시 인쇄한 것이다. 이 형태는 최근 유사 요청서 세 장에서도 보였다. 모두 태식이 휴무인 화요일. 서명은 같지만 시각만 바뀌었다.

태식은 말이 없어졌다. 누군가 그의 서명 한 장을 보관해 두었다가 주마다 다른 밤으로 그를 보냈다. 그는 설비의 반복 이상을 수년간 들었지만, 자기 서명이 반복 사용될 줄은 몰랐다.

“이제 내 결백이 증명됩니까?”

“그 시각줄을 당신이 서명하면서 적었다는 주장은 깨집니다.” 지후가 말했다. “그걸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는 더 봐야 합니다.”

태식은 맞는 말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한 단계씩 가는 일이 이론으로는 좋았다. 급여일과 근무표가 걸리면 한 단계의 길이가 달랐다.

복도에서 유만호가 태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정비반에서 오래 일한 반장이다. 그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살핀 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무실에서 다들 걱정해. 임원 쪽에서 종이까지 나왔다는데 네가 이번 주 점검에서 빠질 수도 있어.”

“원본보다 늦게 찍힌 숫자래요.”

“알지. 그런데 상사는 서명만 보면 끝났다고 해.”

태식은 만호에게 자기 편을 들어 달라고 말하려다 그만뒀다. 만호 역시 공용 유지보수 계정을 쓰던 시절의 기록 때문에 조사받았다. 그가 지금 아는 것은 소문뿐이었다.

“내가 휴무일에 일한 적 있는지 확인해 주세요. 기억 말고 근무표 원본으로.”

“볼게. 네 출근기록은 내가 건드리지 않고 노무팀에 요청하마.”

만호가 계단으로 내려가자 태식은 소리 없이 숨을 내쉬었다. 동료를 믿는 것과 동료에게 증거를 골라 달라고 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그는 만호가 그 차이를 알고 돌아선 것이 고마웠다.

그때 아래층에서 짧은 경보가 울렸다. 태식은 소리만으로 18번 우회 슈트의 과부하 경고라는 것을 알았다. 몸이 먼저 계단 쪽으로 움직였다. 조사 중이라는 이유로 출입증 권한을 임시 조정받은 그는 현장에 내려가도 제어반에 손댈 수 없었다. 더 나쁜 것은 급하다고 다른 사람 출입증을 빌리는 일이었다. 지난번 공용계정의 잘못을 똑같이 되풀이하는 셈이니까.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만호에게 무전했다.

“18번 경고 들립니까? 투입을 줄이고 막힌 위치를 확인하세요. 누구 하나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지는 말고.”

만호가 현장 기사에게 무전을 넘겼다. 젊은 목소리가 슈트 입구에 포장끈이 엉켰다고 답했다. 태식은 제 손이 기억하는 순서를 입 밖으로 옮겼다. 먼저 그 구역을 멈췄는지 확인하고, 함께 있는 분류원이 안전선 밖으로 물러났는지 확인하라고. 조작 방법을 대신 지시하지는 않았다. 현장에 선 사람만 볼 수 있는 상황이 있었다.

몇 분 뒤 경보가 멎었다. 우회 운항이 재개됐다는 짧은 무전이 왔다. 태식은 계단 난간을 놓았다. 자기가 없어서 사고가 난 것도 아니고, 자기가 뛰어가지 않아서 해결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 사실은 위로이면서 동시에 쓰렸다. 자신을 멈추게 한 회사의 조치가 정당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직장을 혼자 떠받치고 있다는 착각은 조금 벗겨졌다.

나경이 복도 끝에서 그를 봤다. “안 내려가셨네요.”

“내가 필요하면 절차대로 불러야죠. 내 카드로 들어가면 또 표 하나가 생길 테니까.”

“그 표에는 이제 잘못된 서명 하나만 적히지 않겠죠.”

태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경보가 그친 뒤에도 귀에는 벨트가 다시 도는 소리가 잠시 남았다.

나경은 요청서와 보험사 사본을 나란히 놓고 더 이상하지 않은 것을 찾았다. 세 장의 최근 요청서 중 하나에는 날짜가 겹쳐 두 번 찍혀 있었다. 오래된 날짜가 지워지지 않은 채 새 화요일이 그 위를 지나갔다. 급히 만든 위조 문서라면 서툰 실수였다. 하지만 그 실수 덕분에 서명의 출처를 특정할 가능성도 있었다.

“원본 종이를 누가 보관했죠?” 나경이 물었다.

감식 담당자는 회사 제출 보관함의 이관 기록을 확인했다. 세 달 전부터 정비자료 상자는 임원실 감사용 자료실에 한 차례 올라갔고, 이후 다시 내려왔다. 직원 여럿이 접근할 수 있었다. 태식은 ‘임원실’이라는 말을 듣고 곧장 장승원을 떠올렸으나, 나경이 먼저 말했다.

“방의 이름과 손의 주인은 아직 다릅니다.”

“이제 내가 말하기도 전에 막네요.”

“세 번쯤 같은 말을 했으니까요.”

태식은 반박 대신 웃었다. 웃음은 금방 사라졌다. 구민재가 문을 열고 들어와 인사팀에서 긴급 사고보고를 준비 중이라고 전했다. 보고서에 로사의 카드와 태식의 서명이 함께 올라갈 예정이었다.

“방금 감식결과를 보내 주세요.” 태식이 말했다.

“정식 결과는 내일 나옵니다.”

“그럼 내일 전에 인사팀이 먼저 결론을 냅니까?”

민재는 답하지 않았다. 그는 결과를 기다릴 수 없는 부서가 있다는 표정으로 보안서류만 들고 나갔다. 지후는 잠정 감식 사실과 미확정 범위를 인사팀에 별도로 알리겠다고 했다. 그것이 징계를 멈출 권한은 그에게 없었다.

태식은 처음으로 감식실 밖 의자에 앉았다. 방 안에서는 프린터 출력 표면을 비교하는 작업이 계속됐다. 한 줄에 일정한 간격으로 아주 옅은 줄무늬가 있었다. 나경이 지난번 반품창고 허위 입고표의 출력본을 가져오자 같은 간격이 나타났다. 두 종이가 같은 종류의 프린터에서 나왔을 수도 있었다. 정확히 같은 기계인지, 누가 그 기계를 썼는지는 장치 기록과 실물을 더 확인해야 했다.

“임원층 복도 프린터요?” 태식이 물었다.

“후보예요.” 나경이 말했다. “거기서 인쇄한 일정표도 있죠. 같은 줄무늬가 있는지 확인해요.”

태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범인을 가리키는 손가락보다 프린터의 작은 흠집이 더 느리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 흠집이라면, 사람을 멋대로 건너뛰지 않고 종이에서 종이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잠시 뒤 인사팀의 연락이 태식의 휴대전화에 떴다. ‘야간 정비 배치 관련 면담 요청.’ 세 달 된 서명에 붙은 최근의 한 줄이, 이제는 그의 다음 주 근무표까지 바꾸려 하고 있었다.

태식은 메시지를 로사에게 보여 줄까 망설였다. 그녀 역시 자기 카드 때문에 불려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로사가 먼저 전화를 걸었다. “내 것도 왔어요. 야간배치에서 잠깐 빼겠대요.”

그는 문서감식 결과부터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로사가 듣고 싶은 것은 위로처럼 들리는 가설이 아닐 것이다.

“내일 같이 인사팀 가요. 각자 기록 들고.”

“같이 가되 내 말은 내가 할게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태식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감식실 불이 꺼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내일은 종이의 주인을 찾기보다, 그 종이 때문에 사라질 시간을 먼저 지켜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