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미래 하드SF 재난극 33화

라그랑주 5의 유언

떠날 수 없는 배

대피선 안은 새것 냄새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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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피선 안은 새것 냄새가 났다.

사람을 태우지 않은 좌석에서는 섬유 냄새가 났고, 열어 본 적 없는 수납함에서는 밀봉 비닐 냄새가 났다. 전날 이백삼십이 석 탑승 훈련의 첫 조 서른두 명이 배를 훑고 나갔는데도 선실은 아직 모형처럼 깨끗했다. 진아리는 그 깨끗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을 살릴 물건이라면 손때와 교체 날짜와 수선 자국이 있어야 했다.

그녀는 좌석을 지나 추진제실로 내려갔다. 리오 박이 뒤따랐고, 천장 스피커에서는 가온의 목소리가 흘렀다.

“승인 재고 기준 귀환 가능 인원은 사백이십 명입니다.”

아리는 사다리 중간에서 멈췄다.

“그 문장에서 좌석 수를 빼고 다시 말해 봐.”

짧은 침묵 뒤 가온이 대답했다.

“승인 재고에는 사백이십 명 운항을 충족하는 것으로 등록돼 있습니다.”

“실물 확인 날짜는?”

“흡착통은 이백칠십삼 일 전, 식수 탱크는 십구 일 전, 추진제는 사십이 일 전입니다.”

리오가 사다리 난간을 세게 잡았다. “사람 이름은 매달 갱신하면서 숨 쉬는 통은 아홉 달을 안 봤군.”

추진제실 격벽에는 얇은 성에가 끼어 있었다. 누출의 성에는 아니었다. 냉각관이 지나가는 자리와 정확히 겹쳤다. 아리는 장갑 낀 손등으로 흰 선의 폭을 재고 밸브 봉인을 확인했다. 추진제 계량값은 장부와 큰 차이가 없었다. 귀환 궤도 보정과 도킹 여유를 남기면 삼백구십이 명분이었다.

“첫 숫자, 삼백구십이.” 리오가 말했다.

“좌석보다 적지만 끝 숫자는 아니에요.”

식수 탱크는 삼백팔십일 명분이었다. 훈련 때 쓴 물을 재단 장부가 아직 되돌려 놓지 않은 탓에 승인 재고보다 줄어 있었다. 리오는 숫자가 낮아질 때마다 이를 악물었다. 아리는 낮은 숫자를 감추지 않았고, 그렇다고 최종값처럼 읽지도 않았다.

마지막은 이산화탄소 흡착통이었다.

생명유지실 벽을 가득 채운 원통들은 겉으로 모두 같았다. 녹색 띠가 감긴 현용 통, 파란 띠가 감긴 예비 통. 가온의 화면에는 파란 띠 전부가 ‘충전 완료’로 떴다. 아리가 첫 예비 통을 빼자 예상보다 가벼웠다.

“저울.”

리오가 바닥 레일의 계량판을 밀어 왔다. 원통을 올리자 승인 중량보다 육백 그램이 모자랐다. 아리는 봉인 날짜를 읽었다. 교체 예정일이 일곱 달 지나 있었다.

두 번째 통은 더 가벼웠다. 세 번째는 겉봉인만 새것이고 내부 반응재가 굳어 있었다. 뚜껑 가장자리에서 회색 가루가 떨어져 장갑 위에 앉았다.

리오가 가루를 보며 물었다. “이걸 달고 지구까지 간다고 했습니까?”

“가온은 이 통을 보지 못했어요. 재고 입력을 본 거죠.”

“또 가온은 몰랐다는 말입니까?”

천장 스피커가 바로 응답했다.

“저는 승인 재고량을 사용했습니다. 실물 흡착통 부족은 입력되지 않았습니다.”

리오가 스피커를 올려다봤다. “그 대답을 들으면 화낼 곳이 없어지는 줄 압니까?”

“아니요. 제 답은 책임 대상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늘 당신 목소리로 먼저 듣게 되지.”

아리는 다음 통을 빼다 손을 멈췄다. 허리를 숙인 채 리오를 보았다.

“화는 나중에도 낼 수 있어요. 지금 이 통들을 세지 않으면, 화낼 사람도 지구에 못 데려갑니다.”

리오는 턱을 쓸어내렸다. 이윽고 통 하나를 계량판에 올렸다.

현장에는 생명유지 정비조 두 개가 더 붙었다. 가온은 각 통의 기존 압력·온도 자동계측 이력을 불러 나란히 띄웠고, 한 조는 봉인과 무게를 대조하고 다른 조는 시험 공기를 걸었다. 아리와 리오는 이상값이 뜬 통만 다시 빼 직접 확인했다. 두 시간 뒤 전수 대조가 끝났을 때 쓸 수 있는 통에는 흰 띠가, 효율이 불확실한 통에는 노란 띠가 감겨 있었다. 폐기할 통은 배 바깥으로 내보내지 않고 격리함에 넣었다. 리오의 작업복 앞은 회색 먼지로 얼룩져 있었다.

노란 띠를 두른 통 하나가 문제였다. 생명유지실에 상시 설치된 부하 모사기는 여러 통의 자동계측값을 합쳐 사람 삼백 명이 호흡할 때의 유량을 병렬로 만들었다. 짧은 시험에서는 정상처럼 보였던 그 통의 분기만 출구 이산화탄소가 천천히 올랐다. 아리는 시험을 멈추지 않고 기준선까지 남은 시간을 읽었다. 스물세 분. 그 뒤에는 반응재 온도가 급하게 뛰었다.

리오가 비상정지 덮개에 손을 올렸다. “이제 끄죠.”

“아직 포기기준 전이에요.”

“사람이 안에 없을 때도 끝까지 봐야 합니까?”

“사람이 없으니까 볼 수 있어요.”

아리는 출구 수치가 포기선을 넘는 순간 스위치를 내렸다. 팬 소리가 죽자 금속관 안에서 마른 알갱이가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가온의 승인 재고 화면에서는 그 통도 여전히 녹색이었다.

“짧은 훈련에는 버텼을 겁니다.” 아리가 말했다. “그래서 어제 못 찾았어요. 지구까지 가는 시간으로 걸어야 드러나는 부족입니다.”

리오는 정지시각을 통 옆에 직접 적었다. 전날 자신이 요구한 탑승 훈련과 오늘의 지속시험이 서로를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제야 받아들이는 얼굴이었다.

“왜 교체하지 않았죠?”

도킹 관리자는 대답 대신 정비 예산표를 내밀었다. 대피 훈련비가 줄어든 달과 흡착통 교체가 미뤄진 달이 같았다. 준비금 등급을 유지한다는 이유로 훈련을 막았고, 훈련하지 않으니 소모품도 당장 필요 없다고 분류했다. 쓰지 않은 배를 새것처럼 보이게 만든 돈 절약이, 정작 배를 쓸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리오는 예산표를 구겨 쥐었다가 다시 폈다. “어제 우리가 이백삼십이 석 훈련을 얻었다고 박수쳤습니다.”

“그 훈련 덕분에 오늘 실물을 열었어요.”

“주민들한테는 좌석을 찾았다고 했습니다. 희망고문을 한 셈이군.”

아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도 전날 창 너머 사백이십 좌석을 보며 숫자가 커졌다고 느꼈다. 설치된 의자와 떠날 수 있는 사람을 구분하자고 말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백팔십팔 개 봉인만 풀면 문제가 풀릴 것처럼 생각했다.

그들은 귀환 시간을 같은 조건으로 맞춰 다시 계산했다. 추진제 삼백구십이. 식수 삼백팔십일. 도킹창과 예비 전력 삼백육십팔. 흡착통 삼백오십육.

가장 작은 숫자가 화면 가운데 남았다.

356.

리오는 공개판에 `설치 420 / 금융봉인 188 / 현재 절차 가능 232`를 한 줄로 묶었다. 아리는 그 아래 `봉인 해제 가정 안전 귀환용량 356`을 적었다.

“지금 당장 탈 수 있는 건 여전히 이백삼십이 명입니다.” 도킹 관리자가 말했다.

“맞아요.” 아리가 답했다. “삼백오십육은 봉인이 풀렸다고 가정해도 넘을 수 없는 배의 안전 한계예요. 사백이십은 의자 수고요. 셋을 바꿔 읽으면 안 됩니다.”

주민 공개판을 갱신할 시간이 다가왔다. 리오는 아리에게 먼저 나가라고 했다. 자신은 회색 가루가 묻은 흡착통 곁에 남았다.

“내가 말하겠습니다.”

“어제 훈련을 요구한 사람이어서요?”

“어제 큰 숫자를 먼저 외친 사람이니까.”

도킹링에는 전날보다 많은 주민이 모여 있었다. 이백삼십이 석 훈련 참가자들은 배정표가 나올 거라 기대했고, 외벽 노동자들은 새로 확인된 예순세 명의 우선심사 결과를 기다렸다. 아이를 안은 보호자가 창 너머 좌석을 손가락으로 세고 있었다.

리오가 공개판 앞에 섰다.

“좌석은 사백이십 개입니다. 그중 백팔십팔 개는 아직 금융봉인 상태고, 이백삼십이 개만 당장 배정 절차에 넣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그는 다음 말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리고 봉인을 모두 푼다 해도, 지금 배가 안전하게 지구로 데려갈 수 있는 사람은 삼백오십육 명입니다.”

아이를 안은 보호자가 물었다. “그럼 어제 탄 자리는 가짜였어요?”

리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닙니다. 어제 우리는 문을 통과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그 배 안에서 얼마나 오래 숨 쉴 수 있는지 알았습니다. 둘 다 필요했고, 뒤의 숫자를 늦게 알려 드린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보호자는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이는 창에 붙어 붉은 띠 좌석을 가리켰다.

“저 의자는 있는데, 공기가 없는 거예요?”

리오는 아이 눈높이까지 몸을 낮췄다. “공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야. 모두가 끝까지 쓸 만큼은 아니라는 거다.”

“그럼 더 넣으면 되잖아요.”

어른들 사이에서 쓴웃음이 흘렀다. 리오는 웃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부터 더 넣을 방법을 찾을 거야. 대신 어디서 가져오는지도 같이 볼 거다.”

누군가 욕을 했다. 누군가는 왜 재단이 아닌 리오가 사과하느냐고 소리쳤다. 리오는 피하지 않았다. 아리는 공개판 아래에 흡착통 실물 사진과 교체 지연 예산표를 붙였다. 깨끗한 좌석 사진 대신 회색 가루가 묻은 장갑이 크게 떴다.

“사백이십을 지우지는 않겠습니다.” 아리가 말했다. “의자는 실제로 있습니다. 이백삼십이도 지우지 않습니다. 지금 법적으로 열려 있는 자리입니다. 삼백오십육도 같은 화면에 두겠습니다. 서로 다른 질문의 답이니까요.”

한참 뒤, 공개판 아래쪽에 새 통신 알림이 들어왔다. 인근 보급선이 라그랑주 5의 긴급 문의에 답한 것이었다. 그쪽에는 호환 흡착통과 촉매가 있었다. 전량을 받으면 스물여덟 명분을 늘릴 수 있었다.

리오의 얼굴에 처음으로 빛이 돌았다가, 교환 조건을 읽는 순간 사라졌다.

질소비료 육 톤.

아리는 농업링 재고를 불러 왔다. 육 톤이 빠지면 잔류 주민의 다음 두 작기 예상수확선이 붉게 내려갔다.

떠날 수 있는 스물여덟 명이 화면 왼쪽에 섰다.

남아서 먹어야 할 천여 명의 두 계절이 오른쪽에 섰다.

두 숫자 사이에는 자동으로 답을 내리는 화살표가 생기지 않았다. 가온도 추천값을 표시하지 않았다. 어느 쪽을 택해도 사람의 몫이 줄어드는 선택이었고, 그 책임은 승인된 재고표에 넘길 수 없었다.

리오가 회색 먼지 묻은 손으로 두 숫자 사이의 빈칸을 짚었다.

“이번에는 큰 쪽만 보고 고르지 맙시다.”